# 59
59화
청운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송인호를 다그쳤다.
“그래서 범인을 놓쳤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천호장 송인호는 청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경비를 어떻게 했기에 적이 침입하고 불까지 지른단 말인가? 그동안 그대는 무엇을 했는가?”
“송구하옵니다!”
“인명 피해는?”
“다행히 죽은 자는 없고, 불길을 잡다가 화상을 입은 부상자가 서넛 있을 뿐입니다.”
청운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송인호에게 말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그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게.”
“예, 대인.”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송인호는 벌을 받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곧장 돌아갔다.
그가 나간 후에야 청운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 * *
자룡궁이 불길에 휩싸이고 다시 이틀이 흘렀을 때, 기다리던 감찰관 일행이 도착했다.
“어서들 오십시오. 원행에 노고가 많습니다.”
청운은 자룡궁 입구부터 그들을 맞이했다. 아무리 약점을 잡았다고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그들의 접대는 석덕조가 맡기로 했다. 청운은 그들을 위한 연회에 잠시 참석했다가 자리를 벗어났다.
청운이 자리를 벗어나자 두 명의 감찰관이 함께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자룡궁 심처에 마련된 한 전각 안에서 청운과 두 감찰관의 은밀한 만남이 이뤄졌다.
알고 보니 그 두 사람은 도찰원 소속이었다.
도찰원은 감찰기관으로 관리의 임무 수행능력을 평가하는 곳이었다.
“도찰원 정3품 우부도어사 독고인찬이오.”
“도찰원 정4품 좌첨도어사 조엄입니다.”
“반갑습니다. 진무사 이청운입니다.”
청운은 인사를 나누고 차를 마셨다.
며칠 전에는 이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청운조차 그들의 정확한 신분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운을 띄웠다.
“제가 듣기로는 두 분이 각기 오군도독부와 동창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맞소. 나는 오군도독부의 종2품 도독첨사를 겸하고 있고, 여기 계신 조엄 님은 태감님이시며 동창에 계신 분이오.”
뜻밖의 사실이었다.
신분은 독고인찬이 더 높긴 하나, 쥐상의 얍삽하게 생긴 조엄이 실권자라는 말이었다.
청운은 포권을 취하며 쥐상의 조엄에게 말했다.
“이런, 실례가 많았습니다. 독고 대인께서 품계가 한 단계 높으셔서 제가 큰 결례를 범할 뻔했습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이번 임무에서는 독고 대인이 높은 것도 사실입니다.”
자리에 앉은 청운은 차를 입에 가져갔다. 그런 청운을 향해서 동창 출신의 조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보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호위 덕분에 횡액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 흉악한 놈이 감히 대인들의 청정을 어지럽혔다면서요?”
“예, 진무사 덕에 오해를 벗어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하며 탐색을 시작했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이 있어야 함이 당연한 일.
청운을 향해서 이번에는 독고인찬이 말했다.
“따로 부탁하실 일이 있으시오?”
“별것은 없습니다. 단지 그동안 준비한 서류를 잘 확인해보시고 본연의 임무를 다 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이번에 구호량의 넷째를 추문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알아냈고, 이곳에서 일을 마무리하면 혁련장으로 곧장 가서 마저 알아볼 생각입니다.”
조엄의 말에 청운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행입니다. 놈들이 어떤 흉계를 꾸미는지 모르지만 일벌백계해야 할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철저하게 밝혀내겠습니다.”
청운은 조엄의 확답을 듣고 한시름 놓았다. 그 후 여러 가지 사안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근래 이곳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청운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자룡궁을 습격했고, 자룡궁주와 많은 정예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렸다.
조엄은 무릎을 탁 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청운에게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예, 더욱이 며칠 전에는 큰불이 나서 자룡궁의 많은 건물이 불탔습니다.”
“어허, 그래, 피해가 컸습니까?”
“다행히 빠르게 대처를 해서 부상자가 좀 있는 것 말고는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그런데…… 혹시 금고도 불에 탔습니까?”
“아닙니다. 재빨리 대처해서 금고는 멀쩡합니다. 다만 서고가 타서 아쉬울 뿐이지요.”
청운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금고는 비밀통로 안의 비밀금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곳 외에도 두 개의 금고가 있었고, 그곳은 자룡궁의 고위 간부들이라면 대부분 위치를 알고 있었다.
물론 그곳은 멀쩡했다.
조엄과 독고인찬은 청운의 말을 듣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이청운은 학사 출신이어서 책이 탄 걸 아쉬워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게 서고의 책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서책보다 황금이 더 중요했다.
“정말 다행이구려. 하하하하.”
“진무사 덕에 살았습니다. 살았어요.”
조엄과 독고인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상부에 바칠 돈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 * *
청운은 감찰관들의 조사가 이뤄지는 동안 정보를 얻기 위해 애를 썼다.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은 자룡궁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곳을 파악하는 일이었다.
일단은 그 일을 위해, 묘청 선생이 보내준 학사들을 최대한 활용했다.
“삼원, 여기 보면 알겠지만 자료가 너무 방대하네.”
넓은 실내에서 십여 명의 학사들이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을 돕는 또 다른 학사들도 열 명이 넘었다.
모두가 자룡궁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투입된 학사들이었다.
기간은 열흘, 그 안에 모든 것을 끝내야 한다.
더 시간을 끌 수도 없었다.
아직까지 자룡궁이 역모를 꾀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게다가 정파를 비롯해서 그들과 연관된 수많은 인사들이 자룡궁 구명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더구나 궁주는 물론, 장로를 포함한 핵심인물들이 대부분 죽어서 추궁하기도 애매했다.
지금까지는 오직 감찰관 일행을 매수하려고 했다는 혐의만 있는 상태였다.
혁련장이 남았지만 혁련장에서도 이렇다 할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처음부터 증거보다는 증인이었다. 그 증인이 사라진 것이 문제였다.
증인인 혁련휘와 무공 사부, 그리고 일기대협 육중경의 행방을 어떻게든 찾아야 했다.
청운은 서류를 훑어보며 품속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중년학사에게 말했다.
“권 학사님 그래도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알겠네. 쉽지 않겠지만 최선을 다하도록 하지. 그보다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고 자네는 다른 곳에서 한번 찾아보게. 무언가 찾게 된다면 바로 연락을 할 터이니.”
“감사합니다.”
청운은 학사들에게 서류작업을 맡기고 방을 나섰다.
청운이 향한 곳은 새롭게 발견된 지하통로였다.
아직도 자룡궁의 지하에 숨겨진 통로와 비밀 공간이 남아 있었다. 이곳도 혈황이 발견하고는 알려줬기에 찾을 수 있었다.
“무슨 비밀 공간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배신자와 손을 잡고 천교를 공격한 자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이 정도 비밀은 비밀도 아니다.]
천교를 상대할 만큼 거대한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오랜 세월 천하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들의 용의도주함은 하늘을 가릴 정도일 것이다.
청운은 길게 뻗은 좁은 통로를 향해서 발을 옮겼다.
‘딱히 기관진식이 펼쳐져 있는 건 아니군.’
다른 곳은 기관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이곳은 그냥 통로였다. 한 사람이 겨우 비집고 지나갈 만큼 좁은 통로다.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퀴퀴한 냄새가 심했다.
습기와 이끼, 그리고 온갖 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갔다.
얼마나 나갔을까, 통로의 끝이 보였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이 막혀 있었다.
“이상한데요?”
청운은 안력을 돋웠다. 막힌 곳을 이리저리 살피며 혹시 모를 장치가 되어 있는지 찾아보았다.
“괜한 헛걸음이었나 봅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상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막 뒤돌아서 나가려는 데 혈황이 오른쪽 벽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여기 발자국이 있다.]
청운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혈황이 보고 있는 곳에 희미하지만 무언가 밟은 흔적이 살짝 보였다.
[발자국을 지운 흔적이다. 제법 머리를 굴렸구나. 그리고 이 벽 너머가 궁금하지 않느냐? 여기 벽을 잘 보면 갈라져 있지? 신선한 공기가 이곳에서 희미하게 들어오고 있다. 한번 확인해 봐라.]
청운은 곧장 혈황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혈황의 말대로 시원한 공기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청운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선 다음에 묵룡파천권을 펼쳤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통로가 심하게 흔들렸다.
우수수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드러난 광경에 청운은 이상함을 느끼고 물었다.
“제가 무너트린 것입니까? 아니면 원래 이렇게 무너진 것인가요?”
[네가 한 일은 아니다. 아마 이쪽으로 놈들이 도주하면서 무너트린 것 같구나.]
크고 작은 돌덩어리들이 천장에서 떨어져 통로를 막고 있었다.
한 발 가까이 다가가서 무너진 돌을 살필 때였다.
무언가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청운은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헙.”
주춤 청운이 물러서자 혈황이 빠르게 앞으로 나서며 주위를 살폈다.
[허, 이놈들, 누가 무너진 돌을 치우고 쫓아올까 봐 독을 풀었구나.]
다행이라면 청운이 독을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너는 괜찮겠지만 다른 자들이라면 중독되어서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혈황의 말에 청운은 느낄 수 있었다.
‘찾았다.’
놈들이 도망친 흔적을 드디어 찾았다. 자룡궁의 공간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으로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혈황님, 이 위쪽이 어디인지 알아봐 주십시오.”
[알았다.]
청운의 부탁에 혈황이 천장으로 사라졌다가 잠시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숲이다. 자룡궁에서 보면 동쪽이니 자룡궁 위쪽이구나.]
청운은 앞을 막고 있는 바위들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놈들이 도주한 도주로는 찾았기에 절반의 성과는 있었다.
“나가서 수색해봐야겠습니다.”
청운은 곧장 몸을 돌렸다.
한참 걸어서 들어온 길을 한달음에 빠져나갔다.
* * *
자룡궁이 자리 잡은 탕산의 위쪽에 수백 명의 금의위가 흩어져서 수색을 벌였다.
이미 여러 차례 살핀 곳이었는데 청운의 명령으로 다시 살피는 중이었다.
“대인, 아무리 찾아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분명히 이쪽 방향으로 통로가 이어져 있었다.
청운은 확신이 있었기에 다시 명령을 내렸다.
“분명히 이 방향으로 비밀통로가 뻗어 나갔네. 수색 범위를 구릉 너머까지 넓히고 다시 찾아보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금의위에게 다시 명령을 내린 청운은 난감했다. 놈들이 통로의 중간을 무너트렸다면 종착지가 어디까지 이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혈황 님은 어디로 가셨지?’
혈황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하로 내려간 것 같았지만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혈황이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대로 지하에서 올라왔다.
청운을 향해서 손짓했다. 청운은 빠르게 혈황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찾으신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잠시 기다려라.]
혈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적어도 삼십 장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혈황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최대한 솟구쳐라. 여기에서는 안 보이니.]
혈황은 청운에게서 삼십 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 높이 올라가려면 청운이 허공으로 솟구쳐야 한다.
팟.
청운은 지체 없이 하늘로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