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58화
한쪽 팔을 동여매고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인물이 보였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내였다.
그는 청운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자,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구호량의 넷째 아들인 구용평이었다. 객잔에서 청운에게 두들겨 맞고 한쪽 팔이 부러진 자.
안 그래도, 자룡궁에서 잡힌 줄 알았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찾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 있다니. 놈의 생각이 훤히 보였다.
‘감찰관들을 매수할 생각이었나 보군.’
청운의 짐작대로 구용평은 자룡궁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작을 벌이고 있었다.
관리 녹봉으로는 감히 문턱도 넘기 어렵다는 천향루를 통째로 빌려서 최고의 기녀들을 안겨주며 환심을 사고 있었다.
더욱이 황금도 천 냥씩 주겠다며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것을 지붕 위에서 들었다.
감찰관들도 황금 천 냥이라는 말에 이미 감사를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린 후였다.
그런데 불청객이 나타났다.
관리들은 서로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놈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었을까?’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었다.
기녀들이 있어서 딱히 대놓고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듣기에 따라서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가만히 청운의 반응을 살피는데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다.
“황금 천 냥이라…….”
넌지시 운을 띄우는 청운 때문에 관리들이 기겁했다.
“무, 무슨 소리냐!”
“이놈! 닥치거라!”
두어 사람은 호통을 치며 청운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청운은 겁먹은 강아지가 짖는 모습을 보며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겁먹은 것이냐? 이렇게 담이 작은 것들이 황상을 능멸하려 들어?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으냐?”
청운의 말대로 된다면 큰일 정도가 아니었다. 동창과 오군도독부가 발칵 뒤집히고, 자신들은 관복을 벗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관리들은 예상대로 크게 반발했다.
“닥쳐라! 어디서 망발이냐?”
“이놈 어디서 우리를 모함하려는 것이냐?”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자객이렷다.”
관리들이 펄쩍 뛰었다. 그러나 정작 청운을 제압하려고 나서는 자는 없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청운의 빈틈을 노렸다.
그런 관리들을 향해서 청운이 도발했다.
“겁먹은 강아지처럼 짓지 말고 입 다물어라.”
“뭣이라?”
“이놈 방자하구나! 감히 관리들을 협박하려 들다니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것이더냐?”
퍽.
청운에게 따지던 관리의 얼굴이 뒤로 꺾이며 벌러덩 나자빠졌다. 청운이 상위의 그릇을 차서 관리의 얼굴을 때린 것이다.
청운에게 따지고 들던 관리들이 거짓말처럼 입을 닫았다.
거창한 무공을 보여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발길질 한 번에 주위가 고요해졌다.
청운은 주위를 쓱 둘러보다가 구용평에게 말했다.
“네놈은 현재 역모죄로 현상수배 중이다. 알고 있느냐?”
“그, 그럴 리가 없다. 역모라니?”
구용평이 억울하다며 펄쩍 뛰었지만 청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관리들에게 차가운 눈길을 보냈다.
“관리라는 것들이 역모를 꾸민 놈과 작당모의를 해?”
청운의 이어진 말에 그제야 관리들은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동창 환관이 빠르게 무릎을 꿇으며 청운에게 매달렸다.
“대인! 소인은 이번 일과 무관하옵니다. 그저 상관을 따라왔을 뿐이옵니다.”
얍삽하게 생긴 환관이 나서자, 다른 환관들도 빠르게 청운에게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청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군도독부의 관리들을 보았다.
너희들은 어떻게 할 것이냐는 눈빛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는 오군도독부의 인물은 셋이었다. 그들 역시 일이 크게 잘못된 것을 알았지만 이대로 수긍할 수는 없었다.
“네놈이 말도 안 되는 억측으로 우리를 겁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건방진 놈, 감히 힘으로 우리를 겁박하려 들다니, 정녕 죽고 싶은 것이로구나.”
청운은 발끈하는 관리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밖에 있는 병사들이 몰려오기를 바라는 것이냐?”
청운의 말에 관리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조금 전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면 병사들이 벌써 달려왔어야 한다. 그런데 아직 소식이 없자 의아해했다.
결국 한 관리가 내공을 실어서 크게 외쳤다.
“자객이다! 병사들은 속히 놈을 잡아라!”
우렁찬 소리가 누각을 들썩이게 했다.
하지만 그 관리는 청운이 내공을 이용해서 소리를 차단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청운은 짐짓 딴짓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관리는 청운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뒷짐을 지고 있자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내 한 관리에게 눈빛을 보냈고, 그 관리가 누각 밖으로 뛰쳐나갔다.
쿵.
“아이코.”
경공을 펼쳐서 누각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관리는 무언가 투명한 막에 막혀서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제야 눈빛을 보냈던 관리가 이를 앙다물며 청운을 노려보았다.
‘고수다.’
처음부터 고수인 줄은 알았는데 이 정도 고수일 줄은 몰랐다. 함께한 부하들이라면 충분히 놈을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지막 시도마저 막혔다.
결국 협상하기로 마음먹은 관리가 청운에게 물었다.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느냐?”
“원칙대로 일 처리를 하는 것.”
청운의 말에 관리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는 복면을 하고 있는 청운의 정체가 궁금했다.
한 가지 사실을 유추했다.
“혹, 진무사가 보낸 것이냐?”
“그렇다. 혹시 모를 역도들로부터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네놈들이 작당모의를 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청운은 자신의 정체를 끝까지 드러내지 않기로 했다. 약점을 잡았다고 정체를 드러내는 우를 범할 수는 없었다.
물적 증거라고는 이들이 여기서 술판을 벌인 것과 구용평이 함께 있다는 것뿐.
구용평이 역도라는 사실을 몰랐다고 잡아떼면 그만이고, 술판이야 다른 이유를 대면 끝이었다.
청운이 관리와 대화를 할 때 한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구용평이 움직였다.
쉐엑.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구용평의 신형이 빛처럼 빠르게 청운의 뒤를 덮쳤다. 청운의 허리에 있는 명문혈을 노린 찌르기였다.
투캉!
청운이 상 위의 그릇을 차올려서 검의 방향을 틀었다.
회심의 일격이 빗나갔지만 구용평은 포기하지 않았다.
일류 고수답게 검을 회수하며 재차 청운의 다리를 베어갔다.
청운은 한쪽 발을 살짝 들어서 검을 피했다. 그러고는 올렸던 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퍽.
구용평의 얼굴이 발길질에 일그러졌다.
우당탕.
붕 날아간 그는 환관들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환관들은 나 죽겠다고 엄살을 부렸다.
청운은 꿈틀거리며 일어서는 구용평에게 상 위의 그릇을 연달아 발로 차서 날렸다.
휘익.
퍼퍽!
연달아 구용평의 머리를 강타한 그릇들이 깨져 나갔다.
그의 이마에서 주르륵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다 결국은 풀썩 쓰러졌다.
청운은 오군도독부의 관리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어찌할 것이냐? 이 자리에서 모조리 죽여줄까? 아니면 얌전히 내 말을 들을 것이냐?”
청운에게 지목당한 중년의 관리는 이를 앙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뜻에 따르겠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청운을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었다.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목에 드리워진 칼날이 무서웠다.
살수만 있다면 상대의 꼭두각시가 되어도 살아남는 게 나았다.
청운이 관리들을 한 차례 훑어보고 말했다.
“이곳에서 사흘을 보내라.”
“그건 아니 될 말이다. 무슨 이유가 있어야 지체할 것 아닌가?”
황제의 명으로 재촉하던 길이다. 아무 이유 없이 사흘을 보냈다가는 일정이 모조리 틀어지고 그 이유를 대야 했다.
변명 거리가 없다면 지엄한 황명에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청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쓰러진 놈을 문책한다는 핑계를 대면 될 것 같은데?”
“아! 그러면 사흘은 걸리지.”
기절해 있는 구용평이 눈에 들어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놈을 뇌물수수혐의와 역모 혐의로 엮는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얍삽하게 생긴 쥐상의 환관이 기회라도 되는 양 떠들었다.
“놈에게 자백을 받으려면 사흘도 부족합니다. 공범도 찾아야 하고, 여죄도 물어야 하니 쉽게 처리할 일은 아닙니다.”
“마, 맞습니다. 당장 황도로 사람을 보내서 놈의 죄상을 알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한 법이지요.”
환관들이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살길이 생겼으니 물고 뜯는 건 자신 있었다.
운만 띄웠을 뿐인데 일이 착착 맞아떨어졌다.
구용평의 미래는 결정되었다.
아무런 재판도 아무런 문초도 없이 말이다.
호들갑을 떠는 그들을 보며 청운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여기서도 잘하겠지만, 탕산에 와서도 잘 부탁하겠네.”
“여, 여부가 있사옵니까?”
“진무사님께 안부 좀 전해주십시오.”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만 하십시오.”
환관들은 이미 사라져 버린 청운의 향해서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어딘가에서 지켜볼 수도 있었기에 누구 하나 함부로 움직이거나 입을 놀리는 자는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관리들이 움직였다.
병사들을 부르고 구용평을 포박했으며, 천향루 루주를 불러서 단단히 입막음했다.
기녀들이 입을 함부로 놀릴 수도 있지만 이곳 천향루의 기녀들은 철저하게 교육받는다. 그렇기에 이렇게 질퍽하게 놀아나도 뒤탈이 없었다.
“이봐! 술을 더 가져와!”
“그래, 시간도 많은데 한잔 더 하자고!”
그렇게 천향루의 밤이 후끈 달아올랐다.
* * *
단현(單縣)에서 일을 마무리한 청운은 곧장 자룡궁으로 돌아왔다.
이미 청운과 뜻을 함께하기로 한 금의위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함께한 금의위들 중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은 자들은 배제했기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금의위들은 비밀금고의 돈은 물론 무고에서 발견한 비급과 무기 중 쓸 만한 것을 골라서 개봉 풍운장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청운은 제법 많은 비급이 잠들어 있는 서고와 무기고를 둘러보았다.
이백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모은 비급과 무기였기에 그 양이 제법 많았다.
비급의 경우는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어서 살펴보기도 한결 쉬웠다.
“황실무고도 이렇게 해놨으면 좋을 텐데요.”
[그랬다가는 좋은 비급만 골라서 다 빼갔을 거다.]
“그도 그렇군요.”
청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때 한 금의위 위사가 하는 말이 들렸다.
“모두 옮기고 다른 서책으로 채운 다음에 태워버리면 흔적이 안 남을 텐데.”
“그러게.”
금의위의 말에 청운은 혈황을 보았다.
혈황은 청운이 말하려는 바를 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생각은 아니구나. 어차피 비급이 사라진 것을 아는 자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한두 권 빼낸 것이 아니었다. 수십 권을 빼냈기에 분명히 표가 날 것이다.
청운은 잠시 생각하더니 물건을 옮기는 금의위를 불렀다.
“거기.”
“예, 대인.”
“가서 하만을 불러오게.”
“예, 알겠습니다.”
다음 날 밤. 자룡궁의 이궁과 손궁에 있는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지하서고가 있는 지상 건물이 큰 불길에 휩싸인 것이다.
그 바람에 지하서고까지 홀라당 타버려서 서고에는 불에 탄 흔적만이 남았다.
조사에 나선 송인호는 한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일전에 자룡궁을 침입했던 신출귀몰한 놈이 방화를 한 것이 분명합니다, 진무사! 불이 났을 때 그자와 같은 차림으로 그 건물에서 나와 도망간 것을 목격한 자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