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57화 (57/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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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하만은 다른 백호장들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비밀금고에 쌓인 금자와 은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었다.

그중 한 상자만 있어도 청운을 따르고 있는 금의위에게 은자 수천 냥씩은 돌아갈 것이다.

그는 백호장들이 청운의 뜻에 반대하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소장은 대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하만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웅천이 버럭 화를 냈다.

“놈! 너는 나서지 마라!”

평소라면 웅천의 말에 쥐 죽은 듯이 고개를 숙였을 하만이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먹었고 청운의 뜻을 따르기로 한 상태였기에 물러서지 않았다.

“일조장님. 이번에도 일곱이나 죽었습니다. 여덟이 부상을 당했고, 그중 셋은 금의위를 나가야 할 만큼 중상입니다.”

“닥쳐라! 우리는 나라의 녹을 먹는 무장이다.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는데, 어찌 이제 와서 저 환관 놈들처럼 돈을 챙긴단 말이냐?”

싸늘한 웅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푹 숙였다.

금의위도 남몰래 돈을 챙기는 자들이 많았다. 심지어 대놓고 받는 자들도 있었다.

청운을 따라나선 자 중에도 그런 자들이 제법 된다는 걸 웅천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웅천은 돈보다 명예를 더 중시했다.

웅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무릎을 꿇으며 청운에게 말했다.

“대인, 소장이 대인을 모신 지 얼마 되지 않지만, 대인께옵서는 사사로이 은자에 연연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번 말씀을 거둬주십시오.”

청운은 지긋이 웅천과 다른 백호를 한차례 다시 보며 입을 열었다.

“내 뜻을 오해한 것 같군.”

청운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있는 웅천을 일으켜 세웠다.

“감찰관이 온다면 갖은 핑계를 대고 자룡궁의 재산을 가로채려 할 거네. 자네도 모르지 않을 거야.”

“저희 눈치를 보느라 대놓고는 못할 것입니다.”

“하하하.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나나 자네들이 정녕 그들의 욕심을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림없는 일이었다. 아니 오히려 없는 것도 찾아서 바치라고 할지 모른다.

청운은 웅천을 다시 자리에 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돈을 빼돌릴 것이네. 그들을 단죄하려 해도 황궁의 고관들까지 모두가 한통속으로 움직이면 우리 힘으로는 막을 수 없네. 아마 증거를 들이대고 몰아붙이면 말단 관리 몇 명을 내놓고 꼬리를 잘라낼 게야.”

“그건… 그렇지요.”

청운의 말에 웅천이 힘없이 대답했다.

멍청하고 권력이 없는 것들이나 잡혀 들어가지 고위직이나 줄을 잘 선 관리들은 뇌물에 연관되는 일이 극히 적었다.

만일 걸린다 하여도 얼마 안 가서 사면 받고 풀려날 것이다.

“나는 그 돈을 사사로이 쓰지 않을 거네. 나랏일을 하다가 죽거나 부상당한 부하들의 가족을 돌볼 것이며, 헐벗은 백성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할 생각이네. 물론 사악한 자들과 싸우는 일에도 쓸 것이고.”

“…….”

“이미 내 결심은 섰네. 그러니 지금부터 내 말에 따르지 않을 자는 물러가게.”

청운은 단호하게 말을 맺고 백호장들을 둘러보았다.

백호장들이 마음을 정했는지 하나둘 일어나서 무릎을 꿇었다.

그 동안 청운의 행보를 봐온 사람들이었다. 청운이 절대 허언하지 않는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어차피 공중에 뜬 돈. 더러운 돼지들에게 돈을 바치느니, 죽음을 넘나드는 형제들을 위해 쓰는 게 나았다.

“저는 대인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속하 역시 대인과 뜻을 함께 하겠습니다.”

딱 한 명, 웅천만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청운은 그런 웅천을 말없이 바라봤다.

심기가 굳은 그가 이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무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웅천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무릎을 꿇었다.

“대인의 숭고한 마음을 따르겠습니다. 대인께서 저 간신배들처럼 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잘 생각했네. 내 미리 말하지만, 내가 변한다면 그때는 내 목을 그대들에게 맡기지.”

청운은 기쁜 마음으로 백호장들의 손을 잡았다.

“어서들 자리에 앉게. 지시할 일이 있으니.”

“예, 대인.”

한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자리에 앉은 백호장들의 두 눈에서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비밀통로의 비밀금고는 자룡궁 사람들도 모르는 것 같네. 아무도 그곳에 대해서 묻지 않고, 신경조차 쓰지 않더군.”

그곳을 아는 자들이 모두 자룡궁주와 함께 죽은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 남은 자들 중 누군가는 그곳의 막대한 황금과 보물에 신경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그곳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아! 그렇다면…….”

백호장들의 눈빛이 조금 더 환해졌다.

설령 나중에 사실을 아는 자가 나와도 상관은 없었다. 혼란 속에서 보물이 사라지는 건 비일비재한 일이기에 딱 잡아떼면 그만이었다.

간단하게 몇 가지 사실을 말해준 청운이 지도의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가 새롭게 발견된 비밀통로네. 비밀금고의 돈과 물품을 이 통로를 통해서 풍운장으로 옮기도록 하게.”

어젯밤 새로운 비밀통로를 하나 발견했다.

아쉽게도 혁련휘가 도망친 비밀통로는 아니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걸 보니 몇 년간 사람이 지나가지 않은 듯했다.

지도를 내려다보던 웅천 백호가 질문했다.

“어디로 통하는지 가보셨습니까?”

“확인했네. 탕산의 한 장원으로 이어져 있더군. 그 장원에 사는 자들은 어젯밤에 모두 잡아들였네.”

비밀통로를 발견한 청운은 통로를 지나 출구로 나갔다. 통로는 자룡궁과 멀리 떨어진 자그마한 장원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자룡궁과 관련된 곳이었다.

그래서 금의위를 보내 포위하고, 그곳에 있는 자들을 모두 사로잡아서 데려왔다.

그 후 장원을 봉쇄하고 입구를 지키도록 금의위를 배치했으니 외부에 드러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했다.

웅천이 환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대인, 하늘이 돕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 일은 칠조에 있는 승필 부장하고 육조의 하만 백호가 처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처음 가장 심하게 반대하던 웅천이 의견을 말했다.

뇌물을 받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돈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터라 그도 마음의 부담이 덜어진 것이다.

그래도 금의위 중에서 문제가 있는 이들은 일단 배제하기로 했다.

청운은 백호장의 회의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러던 중 설진중이 물었다.

“대인, 내일이면 감찰관이 도착합니다. 물건을 빼돌리려면 시간이 빠듯합니다.”

“시간이 없다면 내가 벌도록 하지. 감찰관들이 산동 단현에서 여장을 풀었다고 했는가?”

“예, 대인. 내일 정오면 이곳에 도착한다는 연락이 있었습니다.”

“알겠네. 그럼 지금부터 이렇게 하도록 하게.”

청운은 자신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백호장들은 청운의 계획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단현(單縣)은 하남, 안휘, 강소성에서 들어오는 산동성의 관문이다.

교통의 요지이기에 오가는 인원이 많고 잘 발달된 큰 성읍이었다.

이곳 단현의 커다란 기루에서는 어둠이 내리기도 전부터 술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현의 명물인 천향루(天香樓)다.

천향루 내원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정원에는 커다란 누각이 연못을 끼고 자리하고 있었다.

전각에는 천향춘만(天香春晩)이라는 낯 뜨거운 현판이 걸려 있었다.

이곳 천향춘만이야말로 천향루의 자랑이었다.

탁 트인 운치 있는 곳에서 운우지락을 나눠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는 은밀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십여 명의 사내들이 기녀들을 끼고 질퍽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허허, 저런 놈들이 관리라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광경이었다.

그런 이들을 멀리서 지켜보는 눈이 있었다. 그 눈의 주인공은 청운이었다.

청운은 야행복을 입고 있었다. 자칫 자신의 얼굴을 기억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청운은 금의위에게 지시를 내리고 곧장 이곳 단현으로 달려왔다. 워낙 가까운 거리다 보니 극상의 비천무영신법을 펼치자 한 시진이 걸리지 않아서 도착할 수 있었다.

청운은 조금 더 어두워지기를 기다리며 그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봤다.

‘허허, 환관 놈들도 저러고 놀아?’

오군도독부의 관리들은 그렇다고 쳐도, 그것이 없는 환관들도 함께 어울리고 있었다.

기녀의 옷섶 속으로 손을 푹 찔러 넣고 주무르는가 하면 치마 속으로 손을 넣고 낄낄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어떤 녀석은 아예 위로 올라타고 무언가를 하는 모습마저 보였다.

눈살을 찌푸릴 만도 하건만 함께 자리한 오군도독부 소속의 감찰관들은 오히려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놈들 무슨 돈이 있어서 저러고 있지?’

이해가 안 되었다.

천향루는 인근에서 비싸다고 소문난 곳이다. 일개 관리들이 단체로 몰려와서 술판을 벌일 만큼 싼 곳이 아니었다.

‘뇌물을 많이 챙기는 자들인가 보군.’

감찰관 일을 하며 여기저기서 찔러 주는 돈이 적지 않을 테니 지금 상황이 이해는 되었다.

특히 등을 돌리고 있는 비단 무복을 입은 한 사내가 보였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저 사내가 이 자리를 마련한 것 같았다.

‘그나저나 곤욕이군.’

짐승들이 뛰어노는 것 같았다.

얼굴을 붉히고 지켜보는 것도 곤욕이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자, 청운은 곧장 누각의 지붕에 내려앉았다.

몸을 낮추고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야릇한 소리와 낄낄거리는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런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대인들만 믿겠습니다.”

“암요. 저희만 믿으십시오.”

청운이 누구의 말소리인지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는데 이어지는 말에 생각을 멈췄다.

“공자께서는 아무 걱정하지 말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금의위들이 행한 일은 잘못되었어.”

“아무렴, 그렇고말고. 아무리 황상의 귀여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자룡궁을 역도로 몰다니. 세상 사람들이 다 웃을 일이지.”

청운은 뜻밖의 소리에 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차렸다.

‘이놈들이 지금 작당모의를 하고 있군.’

자신을 옭아매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음이 분명했다.

관리의 본분도 잊은 채 누군가에게 청탁을 받고 있었다. 그 청탁을 하는 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청운은 더 기다리지 않고 누각 아래로 내려섰다.

끈적거리는 열기가 가득한 공간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내공을 이용해서 주위로 퍼져 나가는 소리를 차단했다.

찌이잉.

시커먼 야행복을 입고 나타난 청운을 발견한 관리 한 명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웬 놈이냐?”

그제야 무언가를 하던 자들의 시선이 청운에게 모였다.

검은색의 야행복을 입고 얼굴마저 가린 청운의 모습은 자객처럼 보였다. 함께 있던 기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청운은 대답 대신 손을 휘저었다.

슈슈슉.

푹푹푹.

청운은 우선 사내들과 놀아나던 기녀들의 수혈을 짚었다.

비명을 지르던 기녀들이 풀썩 풀썩 쓰러졌다.

청운이 가벼운 손짓만으로 기녀들을 잠재우자, 무공을 아는 관리들이 깜짝 놀라서 긴장했다.

그때 한 사내가 청운에게 뛰어들며 일검을 날렸다.

“죽어!”

슈슈슉.

시퍼런 검광이 청운의 요혈을 노렸다. 제법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청운의 손이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검기와 부딪쳤다.

퍼버버벙.

검기를 장법으로 날렸지만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좌측에 있던 다른 사내도 발검과 동시에 청운의 허리를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연이어 서너 명이 협공했다.

다시 청운의 손 그림자가 허공을 수놓았다. 나비처럼 너풀거리는 손 그림자가 그들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동시에 청운은 상 위로 올라서더니 상 위에 놓인 음식이 담긴 그릇을 연달아 찼다.

퍼버벅.

청운을 공격하던 자들이 그릇에 맞고 뒤로 벌러덩 나가떨어졌다.

남은 자들은 쓰러진 자들과 달리 청운을 공격하지 않고 노려보기만 했다.

가볍게 펼친 청운의 몸놀림은 그들을 주눅 들게 했다.

그렇다고 그냥 얌전히 있을 관리들이 아니었다.

한 관리가 청운에게 호통 쳤다.

“감히 이 자리가 어디라고 뛰어든 것이냐? 우리가 누구지 아느냐?”

내공이 실린 호통이었다. 복장을 보아하니 오군도독부에 속한 관리인 듯했다.

“물론 알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들이 아니더냐? 내 그래서 네놈들을 벌하기 위해 저승에서 친히 왕림했다.”

청운의 싸늘한 한마디에 좌중이 얼어붙었다.

자신들이 누군지 알고 뛰어들었다면 단순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긴장하고 있을 때, 주위를 쓱 둘러보던 청운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허, 네놈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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