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54화
청운이 노성을 내질렀다.
그다지 큰 소리가 아닌 듯했다. 그러나 자룡궁도들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다.
“무, 무슨…….”
홍민구는 이를 악물었다. 채 말을 다 할 수도 없었다. 청운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거대한 불길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불태울 것 같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홍민구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겁을 먹었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약관으로 보이는 애송이의 말 한마디에 주눅이 들다니.
화아악!
홍민구가 이를 꽉 물며 본능적으로 기세를 끌어올렸다.
수많은 사마외도들을 상대하면서 강한 자를 한두 번 만난 것이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사선을 넘어서 자룡궁 사대 무력단체 중 한 곳의 단주 자리에 올랐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무인의 삶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 홍민구를 보며 청운이 싸늘하게 물었다.
“이것이 자룡궁의 대답인가?”
“뉘신지 모르지만… 이곳은 자룡궁이오. 물러나시오.”
홍민구는 청운이 어려 보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송인호가 쩔쩔맬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삼원 이청운’
이미 하남성 혁련장을 풍비박산 낸 인물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등 뒤로 일단의 무리가 우르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뒤를 봤다. 자신의 휘하에 있는 혈사자들이었다.
홍민구가 히죽 미소 지었다.
숱한 사선을 함께 넘은 부하들이 등 뒤를 받쳤다.
홍민구는 청운을 보며 자세를 잡더니 도를 뽑았다. 홍민구가 도를 꺼내 들자 뒤를 받치던 혈사자들도 각자의 도를 꺼내 들었다.
폭풍 같은 기세가 뿜어졌다.
혈사자단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붉은 기운이 활활 타올랐다.
스르릉.
청운도 검을 뽑았다. 이미 이들을 상대하면서 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굳이 손속에 사정을 둘 이유가 없었다.
청운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앞으로 내밀었다.
“금의위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라!”
“충!”
청운의 왼손으로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패가 들려 있었다.
자룡궁도들은 그 패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예측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미 끌어올린 기세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는 자존심과 목숨이 걸린 싸움이었다.
청운은 차갑게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반항하는 자는 모두 참하라!”
“존명!”
금의위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고 자룡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자룡궁 역시 그냥 있지 않았다. 수많은 정파인이 함께할 것이기에 뒷수습은 걱정하지 않았다.
“물러서지 마라! 수많은 정파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홍민구의 외침과 동시에 금의위를 향해서 맞부딪쳤다. 실력만 놓고 본다면 자룡궁이 금의위보다 뛰어났다.
아니나 다를까 기세 좋게 공격해 들어간 금의위들이 몇 합 겨루지도 못하고 뒤로 밀렸다.
아무리 금의위 정예라지만 정파무림의 중원 수호자라는 자룡궁에 비할 수는 없었다.
특히 자룡궁의 사대 무력단체인 혈사자단의 무위가 대단했다.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기저기에서 쓰러지는 금의위들이 보였다.
홍민구는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청운을 노려보았다.
어찌할 것인지 묻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청운은 대답 대신 신법을 펼치며 검을 휘둘렀다.
청운의 검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검광이 번쩍이더니, 막 금의위에게 도를 내려치던 혈사자 하나의 목이 쩍 갈라졌다.
다시 검을 휘두르자, 이번에는 허공에 떠 있던 혈사자 셋의 허리가 양단되었다.
가볍게 휘두른 청운의 공격에 너무도 허망하게 죽어버린 부하들을 보며 홍민구는 입술을 깨물었다.
‘소문보다 강하다. 어찌 저 나이에 이처럼 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미 무공 사부로 파견되었던 사제에게 청운에 대해서 들었다. 자신보다 한 수 위라고 하더니 아니었다. 이자는 사제나 자신이 넘볼 수 없는 자였다.
하지만 기호지세였다. 여기서 멈추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홍민구는 기수식을 취했다. 혼자서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설 수 없었다. 자신이 물러서면 자룡궁에 앞날은 없는 것이다.
청운은 발을 가볍게 굴렀다.
쑥, 앞으로 미끄러진 그가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스캉.
혈사자단 단주 자리를 골패를 해서 딴 것이 아닌지 홍민구가 청운의 공격을 막아내고 반격했다.
챙챙챙.
순식간에 세 번의 공방을 주고받았다.
청운이 몸을 낮추며 사선으로 검을 그었다.
가슴을 노리고 올려 벤 검은 홍민구의 도를 미끄러지듯 타고 넘었다가 다시 머리 위에서 방향을 틀어서 목을 노렸다.
홍민구는 반보 물러서며 상체를 숙였다.
머리 위로 지나간 검이 다시 반대편에서 날아들었다.
미끄러지듯 물러선 홍민구는 사방으로 도를 휘둘러서 청운의 검을 털어내려고 애썼다.
타다다다당.
그러나 좀처럼 청운을 떨쳐낼 수 없었다.
홍민구가 위기에 처하자 뒤쪽에 있던 혈사자들이 청운을 향해서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쐐에에엑.
허공을 가르는 매서운 공격이 청운의 상체를 노렸다.
청운은 검을 빙글 돌리며 도격을 쳐냈다.
따다당.
홍민구는 바닥을 차며 뒤쪽으로 크게 물러섰다.
슈슈슈슉.
촤아아악.
청운은 홍민구를 쫓지 않고 자신을 공격해오는 네 명의 혈사자를 향해서 검기를 날렸다.
두 명의 가슴이 쩍 벌어졌고, 나머지 두 명은 도를 들어서 청운의 공격을 겨우 빗겨냈다.
청운은 몸을 살짝 낮춰졌다가 일어나며 검기를 쏘아냈다.
빛보다 빠르게 날아간 일점 공격에 청운의 공격을 피했던 두 명의 혈사자 미간에 구멍이 뚫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둘이 더 쓰러지자, 홍민구는 도를 강하게 움켜쥐며 곧장 청운을 향해서 돌진했다.
“으아아아!”
목숨을 도외시한 일격필살!
강력한 도기가 청운을 향해서 쏘아졌다. 양옆에서도 수십 줄기의 도기가 청운을 향해서 함께 쏘아졌다.
청운은 늘어트린 검을 앞으로 뻗었다.
따다다다당 땅땅.
검기와 도기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시퍼런 불꽃이 피어올랐다.
홍민구와 혈사자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단주와 함께 펼치는 공격을 이처럼 가볍게 막아내는 자는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청운의 몸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진 것이다.
당황한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청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냐?”
“어디로 사라졌지?”
깜짝 놀란 자들이 청운을 찾아 헤맸다.
“허공이다!”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십 장은 될 법한 허공에 청운이 떠 있었다.
빙글 몸을 튼 그가 곧장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수십 줄기의 빛이 비처럼 쏟아졌다.
번쩍!
몸이 꿰뚫리는 느낌을 받은 철사자들과 홍민구는 두 눈을 부릅떴다.
하늘을 보고 있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의 가슴에 나 있는 구멍을.
한 자루 도를 들고 검정중원하며 사파에겐 죽음의 공포를 선물했던 혈사자단의 최후치고는 너무도 초라했다.
청운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바닥에 내려섬과 동시에 신법을 펼쳤다.
비천무영신법을 극성으로 펼치며 전장이 되어버린 자룡궁 성문 앞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자룡궁 앞이 정리되었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몇몇이 보였지만 굳이 더 나설 필요는 없었다.
“모두 꿇어라!”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라!”
금의위들이 크게 외치며 살아남은 자들을 포박했다.
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문 안쪽에서 더욱 거대한 기세가 느껴졌다.
청운은 굳게 닫힌 성문을 향해서 일권을 내질렀다.
묵룡파천권.
한 마리 거대한 묵룡이 청운의 손에서 튀어나갔다.
허공으로 치솟은 묵룡은 곧장 성문을 향해서 돌진했다.
콰앙!
우지직.
두꺼운 성문이 청운의 일권에 박살 났다.
성벽이 흔들릴 만큼 거대한 일권에 성문 안에 늘어섰던 자들이 경악했다.
뚜벅, 뚜벅.
청운은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박살 난 성문을 통과해 들어선 자룡궁 안에서 수백이 넘는 각양각색의 무림인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성내로 들어선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정적 속에 청운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커다란 뜰의 중앙까지 걸어간 청운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나는 황명을 수행하는 진무사 이청운이다!”
청운의 말에 무림인들이 서로를 보며 웅성거렸다.
이제 겨우 약관이나 되었을 청운의 관직과 무위에 숨을 죽이며 귀를 기울였다.
“구호량은 어서 나와서 황명을 받들라!”
청운은 지난밤 구호량과 정예들을 죽인 것을 숨겼다.
자룡궁에서도 갑작스러운 궁주의 죽음을 아직 외부에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먼저 말해서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다.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자룡궁 내당 당주인 용악이라 하오. 궁주께서는 지금 자리에 계시지 않소.”
“그래서 어쩌라는 것이오?”
청운은 일갈을 터트렸다. 짜증 섞인 목소리에 용악 당주는 인상을 굳혔다.
“피치 못할 사정이 자룡궁에…….”
“닥치시오!”
우르릉.
청운의 사자후에 천지가 진동했다.
어차피 구호량이 살아 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청운이 원하는 것은 도망친 혁련휘와 무공 사부였다.
그리고 어딘가에 있을 철패를 사용하는 무리의 흔적 역시 필요했다.
청운은 더 기다리지 않고 몰아세웠다.
“그대들은 이미 황명을 수행하는 금의위를 죽였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시간을 끌고 있음이 분명하니, 내 어찌 그대들 말만 듣고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이오!”
“대인, 그것이 아닙니다. 이러지 마시고 안에 들어가셔서 자초지종을 들은 뒤에…….”
“아니! 더는 봐줄 수 없으니 그 입 닫고 있으시오!”
청운은 다시 한번 용악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수백 명이 넘는 무림인이 있었다.
이들은 자룡궁을 돕기 위해서 달려온 자들이었다.
청운은 이들이 나서면 일이 복잡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나서지 못하게 선을 그었다.
“그대들이 누구인지 모르오. 그러나 함부로 나서지 마시오. 이번 일은 역모에 관련된 일이며, 충분한 증거를 확보한 상태요.”
차가운 청운의 말에는 분명히 경고를 넘어선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서지만 않으면 건들지 않겠다는 사면령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몰라볼 무림인들이 아니었다.
다른 때 같으면 한목소리로 자룡궁을 두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어쩌면 청운의 무위에 기가 죽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성문이 산산조각 나서 흩날렸다. 자신들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언제나 그랬듯이 강함에 숨을 죽였다.
하지만 어디에나 나서기 좋아하고 힘에 굴복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시주, 저는 소림의 광덕이라 합니다.”
소림의 일대 제자로 한 자루 청죽을 사용한다고 해서 청죽대사라는 이름으로 유명했다.
구대문파 중 수좌에 있는 소림제자가 나서자, 몇 명이 더 인사를 건넸다.
“청성의 유환주요.”
“아미의 몽유란이에요.”
여기저기서 사문과 함께 이름을 알려왔다.
청운은 돌아가면서 인사를 건네는 이들을 보며 혈황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자들, 이 상황에서 뭐하는 겁니까?
한가롭게 인사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자룡궁을 점거해서 혁련휘를 붙잡고 증거를 찾아야 했다.
[원래 무림인들은 체면을 중시한다. 네가 이들의 말을 끊으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것이다. 이름을 밝히는 것은 막지 말고 그대로 들어줘라.]
혈황의 말에 청운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저 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다 받아줘야 한단 말입니까?
이 바쁜 판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