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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53화 (53/257)

# 53

53화

쾅!

“큭”

외마디 비명이 구호량의 일그러진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저벅, 저벅.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청운을 보며 구호량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턱.

등 뒤로 느껴지는 차갑고 딱딱한 느낌.

구호량은 등이 벽에 부딪힌 후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파르르 떤 그는 청운이 손쓸 새도 없이 자신의 검을 심장에 박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놈의 손에 죽고 싶진 않았다.

놈에게 사로잡히면 자신의 입을 열기 위해 고문을 할지도 몰랐다.

천하의 자룡궁주 자존심이 있지, 그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컥.”

설마 자룡궁주인 구호량이 자결할 거라 생각 못했던 청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사로잡으려던 자가 자결한 것도 진천표국의 표행에 이어서 벌써 두 번째다.

마음이 씁쓸했지만 이미 검이 심장에 박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

청운은 차가운 눈빛으로 구호량을 쳐다보았다.

“내세가 있다면 꼭…… 금수로 태어나 죄를 갚아라.”

털썩.

구호량의 신형이 스르르 무너졌다.

천하를 호령하던 구호량의 죽음치고는 너무도 초라했다.

그런데 구호량이 쓰러지면서 작은 철패가 품에서 빠져나왔다.

청운은 허리를 숙여서 철패를 주웠다.

철패에는 처음으로 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패지?’

그는 고개를 돌려서 혈황을 보았다. 혈황이 철패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묻기 전에 혈황이 말했다.

[일단 나가자. 그 철패에 대해서는 나가서 이야기해주마.]

“그러죠. 내일은 금의위를 대동하고 와야겠습니다.”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다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저들이 들어온 곳이 저곳이니, 저기로 나가면 될 것 같군요.”

자신이 들어온 길로 나갔다가는 밖을 지키는 자들을 또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 오늘은 더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았다.

청운은 닫힌 문을 향해서 곧장 검을 휘둘렀다.

콰쾅!

뿌연 돌가루가 사방에 날렸다.

청운은 와르르 무너져 내린 공간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 * *

축시가 지나는 깊은 밤.

아담한 전각 안에서 한 사내가 앉아서 손에 쥔 무언가를 살피고 있었다.

사내는 자룡궁을 습격하고 돌아온 청운이었다.

“그러니까, 이 물건이 천교를 공격한 자들이 몸에 지녔던 물건이라는 말씀입니까?”

청운의 손에는 한 손에 들어오는 오각형의 철패가 들려 있었다.

별을 그리듯이 긴 선이 가로지르고 있었고, 그 중간에 하늘 천 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그 철패는 청운이 구호량의 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래, 당시에 천교를 공격한 자들을 상대하면서 본 적이 있다.]

과거 배신자들은 외부의 세력과 결탁해서 자신을 공격했다.

그때 외부인들이 지녔던 묵옥패와 이번에 발견한 철패가 비슷했다.

[대담한 놈들이었지, 내가 독에 암습만 당하지 않았어도 그리 허망하게 패하지는 않았을 거다. 혈황진기로 독을 해독하느라 공력을 너무 소모했거든.]

회한이 담긴 혈황의 말에 청운은 손에 쥔 철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자룡궁이 천교를 공격한 자들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군요.”

자룡궁이 천교의 후예였으면 청운이 미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궁주부터 최정예를 모조리 죽였으니 말이다.

청운은 가만히 혈황을 보다가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혈황님, 천교가 혈사천교를 말하는 것인지요?”

구호량 덕에 알게 된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름부터 무언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공포가 담겨 있었다.

[혈사천교가 맞다.]

청운의 눈매가 씰룩거렸다.

아니길 바랐건만…….

“저를 속이신 건가요?”

[그럴 리가 있느냐? 난 분명히 천교라고 알려줬었다.]

“그러셨지요. 앞의 두자는 빼셨지만요.”

청운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며 혈황을 보았다. 마음의 준비를 했기에 태연할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은 강호의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협의가 어떠니, 정의가 어떠니 운운하는 것도 우스웠다.

천교가 정파면 어떻고, 마도면 어떻단 말인가. 그저 자신의 복수에 도움이 되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스승님 말씀대로 무공이란 쓰는 사람에 따라 좌우되는 법이다.

인간의 심성을 바꾸는 사악한 마공만 아니라면 문제될 것이 없었다.

‘솔직히 정파가 나에게 뭘 해준 것도 없잖아? 그들이 아버지와 나의 복수를 대신해 줄 것도 아니고.’

이상할 정도로 편안해진 청운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혈황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딱히 너를 속일 마음은 없었다. 그래도 말이다. 이름이 그래서 그렇지, 천교는 사악한 곳이 아니다.]

“그런가요? 이름만 들으면 마교 같은데요.”

[그 미친 검둥이 놈들하고 천교를 비교하지 말거라. 완전히 다르니까.]

“무엇이 다릅니까?”

청운이 이번 기회에 정확히 알고 넘어가려고 마음먹었다.

자신의 근본이랄 수 있는 곳이 천교와 혈황이었다. 앞으로의 행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마교처럼 무림공적으로 낙인찍힌 곳이라면 여러모로 곤란했다. 자칫하면 한순간에 무림공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어떤 식으로든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런 청운의 마음을 아는지 혈황이 말했다.

[무림역사상 제대로 된 공적은 혈교 한 곳이었다. 마교라고 알려진 천마신교는 나라에서 위협을 느끼고 공적으로 내몬 자들이다. 내가 활동할 때 천마신교는 무림공적이 아니었다.]

“천교는요?”

[천교는 강했을 뿐 피에 굶주리지 않았다. 내가 그리 못하게 만들었지. 물론 천하를 질타하면서 많은 피를 흘린 것은 맞지만. 쉽게 말해서 전쟁이 나면 서로 죽고 죽이는 이치와 같다. 단지, 승자가 피의 통치를 하느냐, 아니면 선정을 베푸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

청운은 무림이라는 곳이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알고 쓴웃음을 지었다.

단순하게 백도와 흑도 같은 정사마로 나뉘는 것이 아닌, 무언가 근본적인 사상 등에서 차이가 있는 듯했다.

“후우우우.”

청운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답답하고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무림공적이 되는 것 아닌지 걱정했는데.”

[무림공적? 하하하. 만일 말이다. 무림이 너를 공적으로 지목한다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혈황이 확신하듯이 말했다.

과거 무림은 혈황을 무림공적으로 지목하지 못했다. 너무도 강했기에 감히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하물며 청운은 자신보다 더 무섭게 클 수도 있었다.

청운을 공적으로 지목한다면 그 순간 무림은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다.

청운이 철패를 품속에 집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아쉽습니다.”

[무엇이 말이냐?]

“천교가 정파면 나중에 무림지존이라는 것도 해보려고 했는데, 잘못하면 마존 소리만 듣게 생겼잖습니까.”

청운이 농담하듯 말하자 혈황이 피식 웃었다.

[지존? 그거 그렇게 좋은 자리 아니다.]

“그런가요?”

[내가 해봐서 아는데, 상당히 귀찮은 자리라는 것만 알아라.]

그렇게 깊은 밤이 흘러갔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청운은 금의위를 동원했다.

숫자만 천 명이 훌쩍 넘었다.

안휘와 하남의 금의위 위소에서 모인 정예였다.

청운은 그들을 동원해서 자룡궁을 포위했다.

갑작스러운 금의위의 행보에 자룡궁은 크게 반발했다. 무엇보다도 궁주와 장로 등의 부재가 컸다.

새벽에 궁주는 물론 장로와 최고의 정예고사들 시신이 발견되었다. 그 바람에 정신이 멍한 상황에서 금의위가 들이닥치자 자룡궁 간부들조차 우왕좌왕했다.

“어서 길을 열지 못하겠느냐?”

안휘성 금의위 위소 대장인 송인호 천호장이 소리쳤다.

쩌렁쩌렁한 그의 호통에 자룡궁도들이 주춤했다.

그들도 송인호를 알고 있었다.

송인호는 안휘에서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권력자였다.

대치하고 있는 자룡궁 무사들을 제치고 뒤쪽에 있던 덩치 큰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대인, 이 무슨 행패입니까?”

“그대는 누구인가?”

“자룡궁 외당 당주 철학중입니다.”

우람한 덩치에 맞게 그의 손에는 커다란 도가 들려 있었다.

“철 당주로군. 하남 혁련장의 첫째 혁련휘가 이곳에 숨어든 것을 확인했네. 순순히 길을 열고 협조하지 않는다면 모조리 역도로 잡아넣을 것이네.”

송인호의 서슬 퍼런 말에 철학중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도 혁련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인정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 일은 자신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은 외성을 지키는 존재. 윗선에서 연통이 와야 문을 열어주든지 아니면 막아서든지 할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막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안에 기별을 넣었으니 곧 연락이 올 것입니다.”

괜히 금의위를 자극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송인호도 무력 충돌을 일으킬 마음이 없었다.

혁련휘의 존재가 확인된 건 청운의 말뿐이었다. 아무리 상관이라 할지라도 잘못하면 자신이 죄를 뒤집어써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금의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일각이 흐를 즈음, 누군가 달려와서 철 당주에게 귓속말을 했다.

철학중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철학중은 인상을 굳히며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인, 오늘은 안 될 것 같습니다. 따로 날을 잡아…….”

“이놈! 네놈 체면을 생각해서 이제까지 기다려줬더니 뭐라? 돌아가라고?”

송인호가 버럭 화를 냈다.

최소한 자신들을 안으로 들여서 형식적으로라도 수색할 수 있게 해줘야 했다. 그런데도 강경하게 나오자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중도 말이 안 되는 억지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을 그대로 통과시킬 수는 없었다. 위에서 막으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이다.

철학중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안에서 다른 자가 나왔다.

자룡궁 무력단 중 하나인 혈사자단 단주 홍민구였다.

“물러서게. 대인,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송인호는 새롭게 나타난 인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홍민구의 위명 역시 이곳 안휘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자였다.

평소라면 금의위가 한발 물러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에서 청운이 지켜보고 있으니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런 송인호를 향해서 홍민구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이보시오, 송 천호장. 여긴 자룡궁입니다. 아무리 금의위라지만 너무하신 것 아니오?”

“무엇이 너무하다는 것인가? 역도를 찾으러 왔다지 않나. 결백하다면 냉큼 길을 열고 조사를 받으면 될 것 아닌가?”

“증거도 없이 무작정 몰려와서 수색하겠다니, 우리 자룡궁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니오? 우리 자룡궁을 어떻게 보시고 이러는 것이오? 내 관부에 이번 일을 강하게 따질 것이오!”

홍민구의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자룡궁은 백도의 대문파로 알려진 곳이다. 이런 곳을 단지 역도가 숨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들쑤실 수는 없었다.

송인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뒤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청운에게 행했다.

어쩌면 좋겠냐는 질문이었다.

청운은 턱짓을 하며 밀어붙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송인호는 깊게 숨을 뱉으며 홍민구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비켜주시게.”

“그리할 수 없다지 않소.”

“정녕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시겠나?”

“뭐라? 지금 겁박하는 것이오?”

둘의 말싸움이 길어졌다.

뒤쪽에 있는 청운은 짜증이 일었다.

송인호가 미리 부탁해서 일단 맡기고 있는데 상황이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청운이 나섰다.

“그만! 송 천호는 무엇을 하는 것이오?”

청운의 호통에 말다툼하던 송인호가 후다닥 달려와서는 머리를 조아렸다.

“자룡궁은 백도의 대표적인 문파입니다. 이들을 무작정 압박했다가는 모든 백도가 들고 일어날 것 것이기에…….”

“그래서 어쩌란 것이오?”

“이들 말대로 잠시 시간을…….”

“뭐요!”

청운은 일부러 사자후 같은 호통을 터트렸다.

우르르르릉.

“크윽.”

일대에 모인 자들이 귀를 막고 괴로워했다.

자룡궁 무인들 역시 엄청난 청운의 사자후에 긴장했다.

“그대가 정녕 죽고 싶은 것이오!”

이어진 청운의 말에 송인호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서슬 퍼런 호통에 부르르 몸이 떨렸다.

청운은 송인호를 지나쳐서,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자룡궁 무인들 앞으로 나섰다.

“비켜라. 그렇지 않으면 역적으로 알고… 모조리 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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