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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52화 (52/257)

# 52

52화

청운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곳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앞을 막고 있던 자들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한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흑백이 잘 어우러진 곤룡포를 입은 자였다.

자룡궁 궁주인 탕마대협 구호량이었다.

청운도 나타난 자가 구호량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미 금의위에게 받은 서류에 구호량의 초상화와 용모에 대해서 읽어본 터라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의외군. 자룡궁의 궁주가 직접 나서다니.’

그런데 구호량이 거만한 얼굴로 청운을 노려보며 물었다.

“혈사천교와 관련이 있는 놈이었느냐?”

“……혈사천교?”

청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곁에 있는 혈황을 보았다.

혈황은 아무 말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구호량을 보고 있었다.

구호량이 다시 물었다.

“묻지 않느냐. 혈사천교와 관련 있느냐고?”

“혈사천교는 모르겠고, 자룡궁이 천교와 관련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군.”

“하하하. 이거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군. 정파인 자룡궁에 와서 혈사천교같이 흉악한 곳과 관련이 있느냐고 묻다니.”

구호량은 껄껄 웃었다. 웃고 있는 그의 눈은 여전히 차갑게 번들거렸다.

청운은 그런 구호량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너희들이 천교의 무공을 사용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오리발을 내밀겠다는 것이냐?”

“아까부터 천교 천교 하는데 혈사천교를 말하는 것 같구나. 그런데 천교의 무공은 또 무슨 소리냐?”

“잘 알 텐데.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 며칠 전에 네놈들이 펼친 진법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진법? 아! 네놈이었구나. 하하하, 현현미리말살진을 뚫고 자룡궁을 제집처럼 들락거린 놈이.”

구호량의 음성에 살기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눈앞에 있었다. 강한 적개심을 살기와 함께 줄기줄기 뿌렸다.

살기가 폭포수처럼 쏘아졌지만 청운은 담담하게 흘리며 대답했다.

“그 진법을 현현미리말살진이라고 부르나 보군. 천교에서는 혈사만마살진이라 부른다고 하던데.”

“헛소리! 자룡궁과 혈사천교를 연관 짓는 네놈의 의도가 불순하구나.”

청운은 구호량의 반응을 살폈다. 딱히 이상함을 느낄 수는 없었다.

정녕 자신들이 펼친 진법이 천교의 진법이라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설마 혈황이 잘못 안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어느 쪽도 속단할 수는 없었다.

청운이 청강석 기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기둥에 적힌 무공들은 천교의 독문무공이다. 이것은 어찌 설명할 것이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저 무공들이 어찌 혈사천교의 무공이란 말이냐?”

강하게 부정했지만 청운의 귀에는 부정이 아닌 긍정의 답으로 들렸다.

어떤 식으로든 천교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었다.

청운은 마지막으로 확인할 일이 있었다.

“그럼 하나만 묻자,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대답 잘해라. 네놈들 목숨이 달린 일이니 말이다.”

“목숨? 네놈이야말로 이곳에서 살아 나가고 싶다면 배후를 불어야 할 것이다.”

구호량은 말과 동시에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그그긍.

쿵!

청운이 들어온 계단 입구의 천장이 내려앉았다. 청강석으로 된 커다란 돌덩어리가 입구를 막았다.

청운이 도주할 것을 염려하고 입구를 원천봉쇄한 것이다.

그러나 청운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 알아봐야 할 것이 있었다. 입구가 막혔으니 구호량도 바로 빠져나가지는 못할 터. 그다지 나쁠 것도 없었다.

“네놈들은 천교의 후예냐? 아니면 천교를 멸망시킨 자들이냐?”

청운의 말에 구호량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헛소리 그만해라! 모두 저놈을 죽여라!”

구호량의 명령이 떨어지자, 포위하고 있는 자들이 공격을 시작했다.

스르르륵.

청운도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반격을 가했다.

몸을 날린 그는 선두에서 다가오던 자들을 연속으로 베었다.

투캉. 타다다당!

제법 실력이 있는 자들이어서 청운이 날린 검기를 막아냈다. 그러나 그 위력까지 온전히 막아내지는 못하고 뒤로 주르륵 밀렸다.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이 있다 보니 놈들의 움직임에 제약이 걸렸다. 청운도 그 점을 노리고 처음부터 힘으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자룡궁 무사들도 물러서지 않고 더욱 강하게 달려들었다.

절정 경지를 오가는 고수 이십여 명이 펼치는 연합공격은 그 기세부터가 달랐다.

슈슈슈슉.

쉐에에엑.

단순하게 상대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 위력이었다.

청운은 빠르게 신법을 펼치며 공격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갔다.

‘아차 하면 내가 당하겠군.’

며칠 전에도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낭패를 당했지 않은가.

청운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기로 했다.

그는 정면에서 재차 공격하려는 자들을 향해서 강한 일격을 날렸다. 그러고는 틈이 살짝 벌어지자 그 사이로 뛰어들었다.

청운은 자신이 익힌 무공 중 최고의 검공을 꺼내 들었다. 상대가 자신을 얕보고 있는 지금이 가장 좋은 공격 시기였다.

환우구검 일 초식인 환우일섬을 시작으로 삼 초식인 환우붕괴까지 연달아 삼 초를 쏟아부었다.

콰과과쾅!

사정없이 뻗어 나간 검기의 회오리가 주변을 처참하게 뭉개버렸다.

후두두둑.

뿌연 돌가루가 시야를 가리며 떨어져 내렸다. 지하 공간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하려는지 심하게 흔들렸다.

청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비천무영신법을 극성으로 펼치며 석실 안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워낙 빠른 신법과 좁은 실내, 그리고 뿌옇게 흐려진 시야는 청운이 적을 상대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환경을 만들었다.

어차피 이 안의 숨 쉬는 모든 인물이 적이었다. 그는 피아식별 없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펼쳤다.

반대로 자룡궁의 고수들은 마음껏 무기를 휘두를 수 없었다. 자칫하면 자신들의 공격이 동료를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잠깐의 망설임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이십여 초식의 공방이 지났을 무렵.

“콜록, 콜록.”

누군가 돌가루를 마셨는지 마른기침을 터트렸다.

뿌연 연기 사이로 팔을 휘두르는 형상이 희미하게 보였다.

청운은 오른손을 좌에서 우로 휘둘렀다.

후우웅.

석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희뿌연 먼지가 일거에 한쪽으로 밀려났다. 덕분에 시야가 다시 트였다.

드러난 공간에는 오직 한 명만이 우뚝 서 있었다.

곤룡포를 입은 구호량이었다.

“이, 이런…….”

주변을 둘러본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적을 공격한 사람은 모두 스물여덟 명. 개중에는 절정고수인 장로만 해도 다섯 명이나 되었다.

그들 정도면 천하의 누구라도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 하나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모두가 잠깐 사이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 것이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어이없는 상황.

구호량은 경악한 눈으로 청운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결과였다.

청운이 차가운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후회할 거라고 했지?”

“미, 미친…….”

덜덜덜.

구호량의 몸이 극한의 분노로 사시나무 떨리듯이 파르르 떨렸다.

청운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다시 물었다.

“다시 묻겠다. 천교와는 무슨 사이냐?”

착 가라앉은 청운의 목소리가 음부에서 들려오는 귀곡성처럼 울렸다.

“살고 싶다면 말해라. 두 번은 없으니…….”

청운의 차가운 눈빛에 구호량은 이를 앙다물었다.

움켜쥐고 있는 검을 강하게 쥔 그가 내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건방진 놈!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느새 정신을 수습한 그는 곧장 자신을 탕마대협이라는 별호가 붙게 만든 독문무공을 펼쳤다.

탕마사인검(蕩魔死引劍)

십육 초식으로 이뤄진 사인검법은 복잡함보다 일격필살의 묘를 담고 있었다.

쉐에엑.

청운은 목을 향해서 곧장 달려드는 검기의 폭풍을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쳤다.

챙.

구호량은 검을 회수하며 동시에 빠른 연격을 날렸다.

채쟁.

이미 예상한 공격이었다.

청운은 검을 좌우로 휘둘러서 구호량의 쾌검을 막았다.

탕마사인검법의 숨어 있는 한 수는 강한 일격 후에 오는 빠른 공격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탕마사인검을 중검이며 쾌검으로 분류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상대를 격살하는 데 최고의 검법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구호량은 자신의 독문검법을 청운이 가볍게 받아내자 인상을 찡그렸다.

이미 화가 날 대로 났기에 망설이지 않고 연이어 검법을 펼쳤다.

쉬쉬쉭.

차자장.

청운은 공격 대신 방어에 치중했다. 될 수 있으면 구호량을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신 요혈을 노리고 들어오는 구호량의 검은 매서웠다. 반격하지 않고 오직 수비에만 집중하다 보니 아슬아슬한 경우도 생겼다.

쉬익.

구호량의 검을 허리를 틀어서 피했는데 기이한 각도로 꺾인 검이 재차 목을 노리고 허공을 갈랐다.

청운은 손목을 틀어서 구호량의 검을 겨우 쳐냈다.

챙!

청운의 등줄기에 한 줄기 땀이 흘러내렸다.

차자자장.

강한 일격 후에 오는 빠른 연타는 여전히 청운의 눈을 어지럽혔다.

적응이 쉽지 않은 검법이었다. 초식이 거듭될수록 구호량의 검은 더욱 빨라졌으며 무거워졌다.

십이 초가 넘어갈 때 청운은 방어만으로 안 됨을 느끼고 환우일섬으로 반격했다.

챙!

서걱.

방어만 하다던 청운이 반격하자 구호량이 뒤로 훌쩍 물러섰다.

청운과 삼 장의 거리를 둔 구호량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길게 베어진 옷섶이 보였다.

꿈틀.

구호량의 한쪽 얼굴이 씰룩거렸다.

“제법이구나. 천잠사로 만든 곤룡포를 베다니.”

청운 역시 놀랐다. 환우구검을 펼쳐서 가슴을 베었는데 고작 옷섶만 갈라지다니.

청운은 혈황에게 물어보았다.

-천잠사가 뭡니까?

[천잠이라는 영물이 뿜어낸 실이다. 그 실로 만든 비단이 도검불침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아, 그래서 살짝 베어지기만 했군요.

[비록 살은 베어지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거다.]

어쨌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강한 일격이었다.

비록 창졸지간에 펼쳤지만 환우구검을 정면으로 맞고도 멀쩡하다니.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어.’

언제까지 구호량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순간에는 결판을 내야 한다. 만일 천잠사의 효능을 모르고 있었다면 큰 낭패를 당할 뻔했다.

‘한순간도 방심하면 안 되겠어.’

청운은 환우구검의 기수식을 취하며 구호량을 노려보았다.

구호량 역시 탕마사인검 최후의 삼 초식을 준비했다.

“건방진 놈! 명년 오늘이 네놈 제삿날이 될 것이다.”

먼저 움직인 건 구호량이었다.

그는 비호처럼 몸을 날리며 검을 쭉 뻗었다.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그의 몸 주위에서 갑자기 검기 다발이 솟구쳤다.

청운은 다시 환우일섬을 펼치려다가 급히 이 초식인 환우번천으로 전환했다.

차자자자장!

둘 사이의 공간에서 수십 개의 불꽃이 튀었다.

눈으로 따라잡기 힘든 공방이었다.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았다.

퍼버벅! 서걱!

양쪽 다 서로의 몸을 베었다.

구호량의 잘 동여맨 머리가 풀어헤쳐졌다. 그의 천잠사로 만든 곤룡포는 넝마처럼 여기저기 찢기고 베어져서 너덜너덜해졌다.

청운도 무사하지 못했다.

물러서지 않고 맞서다 보니 허리와 다리의 무복이 길게 베어져 있었다.

구호량은 산발한 머리카락 사이로 흉흉한 안광을 뿌렸다.

그는 이미 중상을 입어서 기혈이 들끓고 있었다.

‘이런 어이 없는 일이…….’

어쩌면 여기서 생을 달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저놈과 함께 죽는다면 큰 손해는 아닐 듯했다.

그는 자신이 베어낸 청운의 허리와 다리를 보며 득의의 웃음을 흘렸다.

“크크크, 네놈도 이곳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그런데 이상했다. 놈에게서 흘러나와야 할 피가 보이지 않았다.

의아함도 잠시, 청운이 구호량의 생각을 읽고 조소를 지었다.

“아! 내가 말 안 했나?”

천천히 구호량 코앞까지 다가간 그가 씨익 웃어주며 말했다.

“내 몸은 네놈이 걸친 천잠사보다 더 질기지.”

그러고는 복부에 일장을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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