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50화
무림에 대해서 배워가는 중인 청운은 아직 인물이나 문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혈황 역시 삼백 년이라는 시간 차이가 있기에 모르는 게 많았다.
요리가 나온 뒤에도 묘청청은 밝게 웃으며 청운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건 오장육인데 집에서 먹던 것보다 맛이 좋아요. 이 공자님께서도 드셔보세요.”
“감사합니다. 이곳 숙수가 음식 솜씨가 좋군요.”
“그런 것 같아요. 어쩜 이렇게 맛깔나게 음식을 하는지. 흥흥”
묘청청은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저것 조금씩 골고루 먹었다.
청운은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즐거웠다.
식사가 끝나고 그릇이 치워진 뒤에 차가 나왔다. 극상품의 차는 아니지만 그래도 식당에서 공짜로 내놓기에는 아까운 보이차였다.
호로록.
청운은 뜨거운 차를 위에서부터 호로록 마시며 차 맛을 음미했다.
떫은맛에 단맛이 살짝 배어 있어서 음식으로 텁텁해진 입을 헹굴 수 있었다.
묘청청은 청운의 차 마시는 모습을 찻잔을 입에 가져간 채 지켜봤다. 여전히 얼굴을 살짝 붉힌 상태였다.
“이 공자님께서는 학사신가요?”
어딘지 모르게 살짝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청운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묘청청을 보았다.
“맞습니다. 입신양명의 꿈을 꾸고 있는 학사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묘청청이 조금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할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었다.
“소저, 이곳에 계셨구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섭선을 든 귀공자가 거침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이십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피부가 희고 이목구비가 뚜렷했다. 흠잡을 때 없이 잘생긴 외모였다. 굳이 흠을 잡자면 입술이 조금 얇아 보였다.
청운은 귀공자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서 묘청청을 보았다.
무언가 입을 오물거리는 것이 전음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청운은 모른 척했다.
잠시 뜸을 들인 귀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습니까? 이곳에서 식사를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왔는데도 늦었구려.”
“아니에요. 구 공자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그래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엄연히 자룡궁 손님이신데 제가 대접을 해야지요.”
청운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내가 구호량의 넷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자를 상당히 밝힌다는 망나니가 이놈이군.’
자룡궁에 대한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파락호로 알려진 넷째 아들 구용평이 이자였다.
그런데 둘의 관계가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구용평은 어떻게 해서든지 묘청청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묘청청은 반대로 구용평과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묘청청은 청운에게 대하던 태도와 말투가 아닌 딱딱한 말투로 구용평에게 말했다.
“저희가 접대를 받자고 자룡궁에 온 것은 아니에요. 그저 근처를 지나다가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온 것이니 따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하하하. 그래도 그럴 수 있나요. 다른 곳도 아니고 강서…….”
“구 공자! 부탁드린 말을 벌써 잊었나요?”
묘청청이 구용평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청운은 뒷말이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둘 사이에 끼어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묘청청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구용평은 싸늘한 묘청청의 눈빛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운은 슬쩍 구용평의 얼굴을 보았다. 화가 나는데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거 나설 수도 없고, 그만 간다고 할 수도 없고….’
진퇴양난이었다. 눈치 없이 움직이기에는 자리가 좋지 않았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움직이면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그래서 얌전히 있었는데, 세상일이 만만하지 않았다.
구용평이 힐끔 청운을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청운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도 않고 묘청청에게 물었다.
“소저, 설마 이 비리비리하게 생긴 놈 때문이오?”
“무슨 말씀이세요? 이 공자님과는 아무 상관없어요.”
“이 공자님? 크크, 설마 이자가 마음에 들어서 나를 멀리 하려는 거요? 소저가 자룡궁주의 아들인 나를 두고 무공 한 자락 익히지 않은 백면서생을 선택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려.”
“선택이라니요? 나와 구 공자 사이에 무슨 언약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고작 한 번 마주한 게 다인데.”
“그대를 처음 본 순간 이미 내 마음은 그대뿐이오. 이 심장에 오직 그대만이 가득 차 있다오.”
구용평의 말에 묘청청이 한 차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런 묘청청의 반응에 구용평은 화사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하는 남자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묘청청의 생각은 달랐다.
“당신, 소문대로 미쳤군요?”
불쾌함이 잔뜩 묻어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동안 만났던 숱한 여인들이 보였던 반응이었고, 그녀들은 결국 자신의 품속에서 좋다고 꿈틀거렸었다.
한 줄기 욕망이 구용평의 두 눈에 스쳐 지나갔다.
“소저, 내 마음을 그리 모르시오? 내 손을 잡는다면 그대 가문은 강서성을 넘어서 천하를 질타할 수 있소.”
묘청청은 사내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도저히 더는 못 들어주겠군요. 그만 돌아가 주세요.”
결국 그녀는 고개마저 돌리며 축객령을 내렸다.
쌀이 익어서 밥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구용평은 닭 쫓던 개가 되었다.
순간 사방에서 끽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켜보던 손님들이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키득거리고 있었다.
구용평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순간, 구용평은 멀뚱히 자신을 보고 있는 청운을 보더니 고개를 홱 돌려서 묘청청에게 으르렁거렸다.
“역시 이 개자식 때문이었구려.”
착하게 생겼던 구용평의 얼굴이 발에 걷어차인 짐승처럼 일그러졌다. 왜 화를 내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극도로 분노하는 모습이었다.
묘청청의 목소리도 살짝 높아졌다.
“말씀 가려서 하세요! 분명히 이 공자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했잖아요.”
“뭐요? 내가 두 눈으로 둘이 오붓하게 앉아있는 것을 보고 있는데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요? 내가 눈뜬 장님이라도 된단 말이오?”
우르릉.
구용평이 버럭 화를 내며 내공을 뿜어냈다.
청운은 구용평이 화를 내건 말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남녀 간의 사랑싸움에서 내공까지 끌어올리는 구용평을 이해할 수 없을 뿐이었다.
“공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만 내공을 갈무리하시지요.”
묘청청의 곁에 있던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구용평의 기세를 막아냈다.
사내에 의해 자신의 기세가 막히자 구용평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그는 살면서 이렇게 무시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객잔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서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거다. 아니, 그냥 물러선다고 할지라도 이 자식만큼은 그냥 둘 수 없어.’
빠드득.
구용평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앞을 막아선 사내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망나니로 알려졌지만 구용평은 자신에 비해서 떨어지지 않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이곳은 자룡궁 영역이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구용평이 한발 물러섰다.
“좋소. 내 소저 가문을 생각해서 물러서겠소. 그러나 이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놈은 그냥 둘 수 없소.”
“뭐라고요? 그랬단 봐요.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이 일은 소저와 관련이 없는 일이오.”
“왜 관련이 없어요? 지금 이 공자님께 화풀이하시겠다는 거잖아요. 만일 그랬다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는 묘청청이 발끈해서 기세를 끌어올렸다. 하지만 구용평은 괘념치 않고 청운을 노려보았다.
“이봐, 언제까지 여자 치마폭에 숨어 있을 생각인가?”
난데없이 불똥이 튀자 청운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한 말이냐?”
“하하하, 그럼 여기 네놈 말고 누가 있더냐?”
“그렇군.”
“그, 그렇군? 하하하 이거 이거, 내가 누군지 모르는 촌뜨기가 있었네.”
씨익, 웃음 지은 구용평이 사악한 표정으로 청운을 바라보았다.
청운도 물러서지 않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구용평을 보며 말했다.
“네놈보다 더 큰 성에서 살았다. 할 말이 있다면 어서 해봐라.”
“백면서생 놈이 죽고 싶은 것이더냐?”
“하아…….”
청운은 기가 막혀 한숨이 다 나왔다.
망나니로 소문난 놈이기에 여자 꽁무니나 쫓아다니는 덜떨어진 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정신줄을 놓고 사는 미친놈이었다.
차가운 청운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구용평이 손에 쥐고 있는 섭선을 휘둘렀다.
쉐엑.
“안 돼!”
지켜보던 묘청청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어서 청운에게 가해지는 공격을 막아주지 못했다.
구용평이 가볍게 휘두른 것 같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이 맞으면 어디 한군데 부러지거나 큰 상처를 입을 위력이 담겨 있었다.
턱!
턱? 팍이 아니고?
보지도 않고 휘두른 섭선이지만 평소 들리던 소리와 달랐다. 구용평의 고개가 천천히 섭선 쪽으로 향했다.
비리비리하게 생긴 기생오라비라고 생각했던 청운의 손에 섭선이 잡혀 있었다.
섭선을 잡은 청운이 눈썹을 찡그렸다.
“정파의 수호자라고 떠드는 구호량의 아들이라면서 선량한 사람을 이렇게 대하느냐?”
“호, 제법인데?”
청운의 말은 안중에 없었다. 구용평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섭선이 막혔다는 것뿐이었다.
후아악.
구용평이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 기세에 주변 사람들이 주춤 물러섰다.
“아가씨, 물러서십시오.”
“비켜요. 이 공자님이 위험해요.”
묘청청이 위험을 감지하고 청운을 도우려고 했지만 호위 둘은 그런 묘청청을 잡고 뒤로 물렸다.
객점 안이 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무언가 큰 사고를 칠 것 같았던 구용평의 행동이 이상했다.
“이, 이놈이!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청운에게 잡힌 섭선을 빼내서 재차 공격하려던 구용평은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달았다. 청운 손에 잡힌 섭선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스륵.
청운은 잡고 있던 섭선을 살짝 놓았다.
힘껏 당기고 있던 구용평이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나뒹구는 창피는 당하지 않았지만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다.
구용평이 이를 갈며 호통 쳤다.
“이런 개자식이!”
촤락!
구용평이 청운을 경시하던 모습을 지우고 섭선을 착 펼쳤다.
“백면서생인 줄 알았더니 한 수 있는 놈이구나. 나의 조화풍운선을 맨손으로 잡다니.”
그가 기수식을 취하며 으르렁거렸다.
그가 무기로 사용하는 섭선은 조화풍운선(造化風雲扇)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백여 년 전 풍운공자라는 무림의 절정고수가 사용한 부채였다.
신병이기와 부딪쳐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서 부채를 이용한 무공을 익힌 무인에게는 최고의 병기였다.
청운도 부채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고는 한마디 했다.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더니, 딱 네놈을 두고 하는 말이군.”
“뭣이라? 이놈! 잔말 말고 어서 일어나서 덤벼라!”
구용평은 큰 인심이라도 쓰듯이 곧장 공격하지 않았다.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던 청운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역시 자룡궁 놈들은 안 되겠군.’
몸을 돌려서 구용평과 그를 호위하듯 함께 온 자들을 훑어보았다.
그런 여유로운 청운의 모습에 구용평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놈의 사지를 모조리 분지르고 개처럼 탕산을 끌고 다닐 것이다!”
“하하하. 그럴듯한 계획을 가지고 있구나.”
“머, 뭣? 오냐! 네놈이 울며불며 살려달라고 하는 꼴을 꼭 보고야 말 것이다. 뭣들 하느냐, 쳐라!”
버럭 화를 내며 호위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서 명령을 내렸다.
“우리를 원망하지 마라.”
“모두가 네놈이 자초한 일이다.”
호위들이 한마디씩 하며 몸을 날렸다.
호위 중 선두의 사내가 청운의 얼굴에 커다란 주먹을 찔렀다.
“멈춰요!”
지켜보던 묘청청이 놀라서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