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49화
구호량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곳은 자신의 허락이 없으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다.
불길한 생각을 떨쳐낸 그가 다시 물었다.
“인명 피해는?”
“예, 일반 궁도 칠십오 명이 진법에 휘말려서 죽었고, 타격대 이백이 죽었습니다. 부상자는 오십이 명으로, 현현미리말살진을 펼치기 전에 침입자에게 부상당한 자들입니다. 또….”
빠드득.
구호량이 강하게 이를 갈았다. 자그마치 삼백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삼천 자룡궁도 중 삼백여 명이 일순간에 사라졌으니 엄청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정예들의 피해가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궁주는 혹시 몰라 사내에게 다시 물었다.
“진법 속에서 살아남은 자는 없느냐?”
“예,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구호량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예상한 일이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상대가 이렇게 강할 줄 몰랐다. 자신이 직접 나섰다고 해도 장담하지 못할 강자였다.
자리에서 일어선 구호량은 밖으로 나가며 차갑게 말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이 누구인지 알아내라. 사흘 안에 알아내지 못한다면… 네놈들의 목숨으로 대신할 것이다.”
“존명!”
쿵!
간부들이 일제히 대전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그렇게 자룡궁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 * *
탕산은 여전히 분주했다.
교통의 요지답게 수많은 사람이 오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모습. 간밤에 있었던 자룡궁 혈사가 있었는지 의심될 정도였다.
탕산에 있는 한 장원은 작지만 아름다운 정원과 작은 연못이 딸린 전각이 있었다.
별채에 딸린 이 전각은 장원의 자랑거리 일만큼 인근에서 소문이 자자한 장소였다.
연못의 중앙에 자리한 전각 위에 백의를 입은 사내가 서서 물속을 바라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었다.
청운이었다. 간밤에 그 고생을 했는데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정파라는 자룡궁이 그처럼 악독한 진법을 사용할지는 몰랐습니다.”
청운은 연못가에 노니는 비단잉어를 보았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툭 던지듯이 말했다.
“제 실력이 아직은 부족한가 봅니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토록 노력해서 이제는 자신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혈황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죽거나 큰 부상을 당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 청운을 보며 혈황이 담담하게 말했다.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자책할 필요 없다. 이미 무공은 익힐 만큼 익혔다. 다시 말하지만 네게 필요한 건 무공이 아니라 경험이다.]
“그럴까요?”
[강호를 활보하다 보면 별의별 기이한 일을 다 겪는다. 어제 일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른다. 그 위기의 순간을 잘 넘겨야 우뚝 설 수 있느니라.]
청운은 흐트러지려던 마음을 다시 한번 움켜쥐었다.
혈황의 말대로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결코 쉽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피를 봐야 하나?’
그래도 명색이 정파여서 검을 뽑지 않았다. 하지만 어설프게 상대했다가는 자신이 죽을 판이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청운은 결론을 내리고 혈황을 보았다.
“오늘 밤에 갈까 합니다.”
[오늘도?]
청운이 연못가의 잉어를 보며 말했다.
“대어 한번 낚아보죠.”
* * *
자룡궁은 사흘째 알 수 없는 적의 침입을 받아야만 했다.
치고 빠지는 노련한 습격에 수백 궁도들이 또 쓰러졌다. 대부분 죽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부상을 당해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다고 현현미리말살진을 다시 발동할 수는 없었다.
자룡궁을 돕겠다고 몰려온 무림인들의 눈이 너무 많았다.
준비하는 데 제약이 많았고, 진법을 다시 펼친다 해서 놈을 잡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피해에 구호량이 드디어 폭발했다.
쉬익, 퍽.
한 사내가 뒤로 날아갔다.
“내 분명히 사흘의 시간을 줬건만 아직 놈의 정체조차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송구하옵니다.”
수십 명이 엎드린 채 숨을 죽였다.
구호량의 일장을 맞고 날아간 자는 외궁을 경비하는 경비대장이었다.
눈앞에서 놈을 잡지도 못하고 끌려만 다니다가 결국 놓치고 말았다. 놈을 포위해서 몰아넣어야 하는데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니 그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궁주님.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사옵니다.”
간부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나섰다.
구호량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다른 자들에 비해서 마른 체형의 사내였다. 옷 역시 무사복이 아닌 학창의였다. 자룡궁의 책사 중 한 명이었다.
“이상한 점이라니?”
“예, 놈이 침입한 곳에서는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놈이 습격한 곳이 아닌 다른 곳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다는 보고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소상히 이야기 해봐라?”
구호량의 흥미를 끌었다.
“혹시 몰라서 자료를 보관하는 곳에 몇 가지 장치를 해뒀었습니다.”
자룡궁 깊은 곳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무언가를 찾은 흔적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평소라면 그냥 넘길 일이었지만 침입자가 발생한 상황이었기에 유심히 살폈고 무언가 흐트러진 흔적을 발견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호, 놈이 성동격서의 계략을 펼쳤다는 말이군.”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에서 습격한다는 성동격서를 펼쳤다면 지금의 소란은 이목을 끌기 위한 계략이라는 말이었다.
구호량은 예의 책사에게 물었다.
“놈이 원하는 것이 무어라 생각하느냐?”
“아직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단지 이를 잘 이용한다면 놈을 함정에 빠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상만 쓰고 있던 구호량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어렸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책사에게 말했다.
“네게 전권을 줄 것이니 계략을 짜라. 함정을 만들어서 놈을 유인해 봐라. 내 직접 나서서 그놈의 목을 벨 것이다!”
“명을 받드옵니다.”
* * *
며칠째 계속된 자룡궁 흔들기로 피로해진 청운은 장원에서 나와서 읍성의 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아직 자신의 이름은 알아도 얼굴은 안 알려졌기에 따로 변장하지는 않았다.
이 층으로 된 객잔은 제법 규모가 큰 곳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인근에서 이곳이 가장 요리를 잘하는 곳이라고 소문난 곳이었다.
그래서 청운은 점심이 다 되어 객잔을 찾았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탕산에 자리 잡아서인지 객잔은 각양각색의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점심을 먹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행히 청운은 이층 창가 쪽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모두가 입구에서 점소이에게 철전 몇 문을 쥐여 줬기 때문이었다.
“공자님 이곳에 앉으십시오. 이곳이 풍경도 좋고 음식을 드시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기에도 좋은 명당입니다.”
“고맙구나. 네 덕에 좋은 곳에서 식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음식이 마음에 든다면 내 그냥 가지는 않으마.”
“헤헤, 감사합니다.”
청운은 싱글거리는 점소이에게 잘하는 음식으로 몇 가지 가져오라고 시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점소이의 말대로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모두가 열심히 사는구나. 나 역시 저들처럼 열심히 노력했었지.’
성공했다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은원이 걸려서 지금은 복수를 위해서 움직이고 있지만, 그 부분을 뺀다면 남들보다 빠르게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더욱이 황제의 총애를 받아서 권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진무사에 오르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직 안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점심 한 끼는 편하게 먹고 싶었다.
청운이 망중한을 즐기고 있을 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리로 오십시오. 자리를 비워뒀으니 어서 이층으로 오르시지요.”
점소이 중 쥐상의 얍삽하게 생긴 자가 이남일녀를 보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라선 점소이가 청운을 보더니 낭패한 기색을 띠었다.
“앵? 분명히 자리를 비워두라 했거늘.”
점소이가 안내한 자들을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아무래도 청운이 앉은 자리가 저들이 예약한 자리인 듯했다.
‘이 자리가 예약된 자리인가 보군.’
청운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일층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사색이 된 어린 점소이가 보였다. 자신을 안내해줬던 점소이였다.
청운은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자신 때문에 어린 점소이가 혼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이 예약석인지 모르고 앉았군. 다른 곳에 앉겠네.”
청운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점소이를 향해서 화를 내려던 사내가 청운을 돌아보았다.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빈자리가 없었다. 손님이 몰리는 시간이다 보니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여기는 다음에 와야겠군.’
식사 한 끼를 하자고 기다리면서까지 먹을 마음은 없었다.
청운이 그냥 돌아가려는데 뜻밖의 소리가 들렸다.
“공자, 괜찮으시다면 저희와 함께 식사하시겠어요?”
청운은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 둘과 함께 온 묘령의 여자였다.
여인은 청운보다 한두 살 많아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던 청운은 그녀의 청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괜히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한 자리가 남네요. 이것도 인연인데 함께해요.”
“감사합니다. 그럼 염치불구하고 동석하겠습니다.”
청운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서 고마움을 표했다.
반듯한 외모에 청아한 목소리까지 갖춘 예의 바른 모습에 여인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함께 온 청년들의 얼굴도 붉어졌다. 의미는 조금 달랐지만.
여인과 함께 온 일행이 자리에 앉자 청운도 빈자리에 앉았다. 공교롭게도 여인이 청운의 앞자리였다.
묘령의 여인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청운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저는 묘청청이라고 해요.”
“묘 소저였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이삼원이라고 합니다.”
“이 공자, 여기 두 분은 저를 지키기 위해 따라 와주신 집안 분이에요.”
“반갑습니다. 이삼원입니다.”
호위들은 청운에게 이름을 밝히지 않고 고개만 살짝 숙였다. 무언가 불만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청운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호위하는 입장에서 생전 처음 보는 자가 눈앞에 떡하니 앉아있으니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위 중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자가 요리를 시켰다. 청운이 따로 시켰다고 하자 굳이 더 시키지는 않았다.
이후 이런저런 대화가 이어졌다. 대부분 묘청청이 대화를 주도했다.
‘묘 소저는 정말 밝은 성격이군.’
묘청청은 밝은 성격인지 웃는 모습이 싱그러웠다. 지켜보는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여기 사세요?”
“아닙니다. 잠시 일이 있어서 오게 되었습니다.”
“설마 자룡궁에 볼일이 있으신 건가요? 저는 자룡궁에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그런데 음……. 이 공자님은 무림인이 아니신 것 같으니… 다른 볼일이 있으신가 보네요.”
무언가 아쉬운지 말끝을 흐렸다.
청운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원래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것인지 몰라도 그녀는 음식이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여러 가지 질문을 쏟아냈다.
그럼에도 목소리가 청아하고 밝아서 청운 역시 싫지는 않았다.
“예,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닙니다. 그보다 소저께서는 무림인이신가보군요.”
“네, 그렇다고 강하지는 않아요. 여기 두 분 아저씨들이 강하시죠.”
청운은 자연스럽게 두 호위에게 시선을 주었다.
묘청청의 말대로 두 사람은 절정급에 이른 고수였다.
‘이런 무인이 두 명씩이나 호위를 하다니. 주위에 몸을 숨긴 자들도 모두 절정급이고……. 도대체 이 여인의 정체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