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41화
모두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석덕조가 교지를 읽어 내려갔다.
“……이에 삼원 이청운과 금의위를 죽인 자들을 잡아들여 일벌백계하라!”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혁련종도의 고개가 확 들리며 중앙에 앉아 있는 청운을 노려보았다.
“네, 네놈은…? 그래,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했더니 네놈이었구나!”
비명처럼 외치는 혁련종도의 소리에 고개를 숙였던 자들이 일제히 머리를 들고 청운을 보았다.
청운을 모르는 이도 있겠지만 청운을 아는 이도 많았다.
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특유의 반듯함을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마, 맞네. 고아 이청운이잖아?”
“모습이 많이 변했어도 천향서원의 이청운 도령이 맞구만.”
“그런데 휘 도련님과 친우인데, 우리에게 왜 이러지?”
갖가지 말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웅성거림이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자, 웅천이 호통 치듯이 말했다.
“조용히 해라!”
우르릉.
절정의 무인답게 그의 사자후는 단번에 소란을 잠재웠다.
잠시의 침묵이 이어질 때 한 사내가 급히 달려왔다. 금의위 위사였다.
그가 청운 곁에 군례를 올리며 빠르게 말했다.
“대인, 혁련휘가 도망쳤습니다.”
“뭐라? 도망?”
청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폐관 수련 중인 혁련휘를 데리러 간 팔조 위사였다.
위사는 청운의 궁금증을 풀어주기라도 하듯이 빠르게 말했다.
“송구하옵니다. 놈이 조금 전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습니다. 설 백호와 금의위가 추격하고 있으니 곧 잡힐 것입니다.”
빠드득.
청운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흥! 놈이 도망쳐봐야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일 뿐이지.”
혁련휘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팔조장 설백호는 절정의 무인이다.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니 곧 잡힐 거라 생각했다.
분노를 삼킨 청운이 고개를 돌려서 혁련종도를 바라보았다.
“휘가 도망쳤다는군요. 놈이 도망치면 어디로 갈지 내 모를 줄 아시오? 아마 자룡궁으로 갔겠지.”
“닥쳐라, 이놈!”
“흥! 휘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걸 모르지 않을 거요.”
“무, 무슨 소리! 나는 모른다!”
“그럼…… 내 아버지를 당신이 죽인 것도 모르겠군.”
혁련종도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설마 저놈이 그것까지 알아냈단 말인가.
“나, 나는……. 네 아버지는 산적들에게 죽었다!”
청운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휘가 그러더군요. 내 아버지도 나처럼 고집을 피우다가 죽었다고. 친구의 부탁을 거절해서.”
“…….”
“아마 놈도 오늘 같은 날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거요.”
“네, 네가 뭘 잘못 알고 있다. 난 죽이지 않았느니라.”
혁련종도는 끝까지 부정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자신이 이청운의 아버지를 죽인 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청운이 일어나서 혁련종도에게 다가갔다. 혁련종도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청운이 혁련종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어머니는 당신이 아버지를 죽인 걸 알고 있었지요. 나까지 죽을까 봐 말씀하시지 않았을 뿐. 그런데…… 돌아가시기 직전에서야 말씀하셨지요. 아버지가… 당신에 의해 죽었다고.”
청운의 거짓말에 혁련종도의 몸이 잘게 떨렸다.
심신이 모두 흔들린 그가 악을 쓰듯 말했다.
“이, 이놈! 거짓말 마라! 나를 해치면 자룡궁이 네놈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흥. 만일 자룡궁도 이번 일과 관련이 있다면 내 그냥 두지 않을 것이오.”
혁련종도와 함께 잡힌 자룡궁 무인들이 눈을 부라렸지만 입을 앙다물 뿐 대꾸하지 않았다.
청운은 그 모습을 보고 조소를 지었다.
“안 그래도 자룡궁에 가서 알아볼 것이 있는데, 잘됐군.”
자룡궁은 천교의 무공과 관련된 곳이 분명했다. 그들이 천교의 후인인지, 아니면 천교를 멸망하게 만든 자들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어느 쪽이든 자신과 자룡궁, 둘 중 하나는 끝장이 날 것이다.
그때 혈황이 청운에게 말했다.
[청운아. 그런데 이상하지 않느냐?]
청운은 힐끔 혈황을 보았다.
[저놈들, 너무 평온한데?]
청운은 혈황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혁련장 핵심 인물들과 자룡궁 핵심 인물들이 모인 맨 앞줄이었다.
청운은 혈황에게 전음을 보냈다.
-흠. 그렇군요.
어쩌면 혁련세가마저 큰 문제가 될 수 있을 만큼 큰일이 터졌다. 그런데도 저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다.
‘무슨 흉계를 꾸미는 것이지?’
청운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변수가 없었다. 잘해야 정파의 무림명숙이 나서서 중재를 하는 게 고작일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고위직 관리거나…….
“아! 후후.”
청운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들이 누군가를 불렀음이 분명했다.
청운이 다시 혁련종도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소?”
청운의 말에 혁련종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청운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그대들이 기다리는 자가 누군지 나도 궁금하군.”
주위를 쓱 둘러본 청운은 혁련종도의 어깨를 지그시 누른 후 차디찬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어디 그 희망이 절망이 될지, 그대들을 살려줄 구명줄이 될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청운은 그대로 발걸음을 해서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포박당한 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청운이 기다리지 않고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간 걸 보면 당장 그럴 마음은 없는 듯했다.
그렇게 남겨진 자들은 절망과 희망을 두고 가슴을 졸였다.
하지만 혁련종도는 식은땀을 흘리며 이를 악다물었다.
청운이 어깨를 누를 때 묵직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이후 몸 전체가 이상할 정도로 떨렸다. 스며든 기운이 온몸 구석구석을 훑고 다니는 듯했다.
‘이, 이놈이… 설마……?’
* * *
점심이 다 되어갈 무렵, 일단의 병사들이 혁련장을 포위했다.
청운은 이미 병사들이 몰려왔음을 알았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혁련장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고 일단의 무리자 들이닥쳤다.
청운은 피식 웃음 지었다.
곁에 있던 혈황은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쯧쯧. 애들 교육 좀 시켜야겠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덜컹.
“대인!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금의위 위사 한 명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 청운에게 말했다.
청운은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서 한 모금 입에 물었다.
청운이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자 예의 위사가 다시 재촉했다.
“어서 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탁.
청운은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고는, 방금 말을 한 위사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네놈 정신이 있는 것이냐?”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황제 폐하께서라도 납신 것이냐?”
“그것이 아니 옵…….”
“닥쳐라! 네놈은 금의위에 있어서는 안 될 놈이구나!”
청운이 버럭 화를 내자 금의위 위사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인생이 더럽게 꼬였다는 말과 같았다.
그러나 정작 청운이 왜 화를 내는지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청운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눈치로구나. 되었다. 자중하고 있어라.”
청운은 그를 놔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을 지나서 밖으로 나설 때 기단을 오르는 일반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관복을 갖춰 입고 있어서 이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안찰사와 도지휘사사를 필두로 한 고위관리들이었다.
도지휘사사가 앞서 올라오다가 청운을 보고 막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이노……. 크흠.”
도지휘사사가 헛기침을 하며 멈춰 서자 뒤따르던 안찰사도 청운을 보았다. 이내 두 눈 가득 놀라움이 드리웠다가 빠르게 사라졌다.
청운이 입고 있는 비어복을 알아봤다. 결코, 자신들에 비해서 권력이 낮지 않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청운은 멈춰 선 이들을 보며 말했다.
“하남성의 안찰사님과 도사님이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사법, 재판, 감찰을 담당하는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의 제형안찰사와 군사를 담당하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의 도지휘사였다. 보통 사람들은 안찰사와 도사라고 약식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남성의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세 명 중 두 명이 온 것이다.
둘은 조심스럽게 청운에게 질문했다.
“그대는 누구이기에 비어복을 입고 있는 것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금의위에 변화가 있었나 보군.”
지방에 있어도 중앙 소식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놓고 살고 있었다. 누군가 고위직에 오른다면 그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이들이었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청운의 등장에 긴장했다. 이들의 반응에 청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청운이라고 하면 기억하시겠습니까?”
“응? 네가 이청운이라고?”
“신동으로 소문난 천향서원의 이청운 공자란 말인가?”
둘은 청운의 정체를 듣고 놀라워했다.
그들도 청운을 알고 있었다. 하남성 개봉의 자랑 중의 자랑이 청운이었고, 몇 차례 직접 보기도 했었다.
뚱뚱한 거구의 도지휘사가 먼저 이야기를 했다.
“자네 그동안 어디 있다가 이제 온 것인가? 그리고 그 관복은 무엇인가?”
“실종되었다고 들었는데, 무사하다니 다행이군.”
안찰사의 반응은 도지휘사와 약간 달랐다.
안찰사는 청운을 다시 본 것을 상당히 기뻐했지만, 도지휘사는 조금 탐탁지 않은 반응이 섞여 있었다.
청운만 느끼는 건 아니었다.
혈황 역시 같은 생각인지 한마디 했다.
[이놈들이 기다린 자가 돼지 놈이구나.]
-제 생각도 같습니다. 후후.
셋은 말없이 상대를 보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셋의 눈싸움에 장내에 있던 자들이 모두 긴장했다. 특히 혁련장과 자룡궁 인물들은 속이 타들어갔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안찰사였다.
“그런데 관직이 어떻게 되나?”
“진무사입니다. 북진무사.”
안찰사는 말없이 두 눈을 찔끔 감았다. 그 역시 법을 집행하는 이이기에 금의위의 북진무사라는 관직을 알고 있었다.
무소불위, 권력의 정점에 있는 고위관직이었다.
그가 확인차 다시 물었다.
“그럼 품계는 어떻게 되나?”
북진무사 중에서도 품계가 있다. 진무사라고 해서 모두가 고위직은 아니었다. 단지, 비어복을 입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청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황제 폐하의 황명으로 만든 특별직이라서 따로 품계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아!”
곁에 있던 도지휘사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굳어졌던 그의 얼굴에 어느새 화색이 돌았다.
정식 진무사가 아니라 한시적으로 받은 자리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권력의 힘이 그리 크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었다.
도지휘사는 고개를 돌려서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혁련종도를 보며 따스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혁련종도는 도지휘사의 미소에 굳었던 얼굴이 펴졌다.
‘됐어! 놈은 이제 끝장이다!’
혁련종도는 주먹을 움켜쥐며 좋아했다. 하남성의 병권을 쥐고 있는 도지휘사가 구명줄이 되어준다는 화답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도지휘사사는 다시 고개를 돌려서 청운을 보았다.
‘애송이 놈. 그럼 그렇지.’
한쪽 볼이 실룩 움직였다.
거구의 도지휘사가 볼 때 청운은 비리비리한 말라깽이일 뿐이었다.
평소 거만한 성격인 도지휘사는 짐짓 거드름을 피우며 툭 던지듯이 말했다.
“크흠. 그럼 이들 중 가장 품계가 높은 이는 누구냐?”
청운의 양쪽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예상대로의 반응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지휘사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기 있는 석덕조 천호장입니다.”
청운은 한쪽에 서 있는 석 천호장을 소개하듯이 알려주었다.
도지휘사사는 힐끔 석덕조를 보더니 이내 그가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얼굴은 처음 보지만 인상착의가 금의위 고수로 알려진 자였다. 제법 위명이 대단했기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오! 자네가 석 천호장이군. 자네의 위명은 내 익히 들었네.”
순간 석덕조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뭐라고?”
“응?”
도지휘사는 석덕조의 반응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