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36화
혁련장 무인 중 서른여섯 명씩 짝을 이뤄서 청운을 앞뒤로 에워쌌다. 남은 무인들은 둥글게 원진을 만들었다.
그런데 상황을 지켜보며 조언을 해주던 혈황이 갑자기 청운 앞을 막아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놈들 봐라?]
혈황의 두 눈에 혁련장 무인들의 움직이는 모습이 들어오자 차갑다 못해 싸늘한 살기를 뿜어냈다.
청운은 갑자기 변한 혈황의 태도에 무언가 깨닫고는 전음으로 물었다.
-아시는 진법입니까?
[그래, 아무래도 내가 아는 진법 같다.]
-천교의 진법입니까?
[맞아. 탈혼무정검진이라고, 천교의 무사들이 익히는 진법이다.]
탈혼무정검진(奪魂無情劍陳)은 혈사천교의 진법 중 하나였다. 상대의 혼을 빼앗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검진이었다.
-잘됐네요. 탈탈 털어야겠어요.
웅, 우웅, 웅웅!
그사이 탈혼무정검진이 발동됐다. 어지럽게 무사들이 움직이며 서로의 내공을 한데 모았다.
검진은 점점 위력을 더해갔지만, 청운은 그저 지켜보며 혈황에게 검진에 관해서 설명을 들었다.
[구궁의 순환은 감곤진손으로 시작해서 중궁에 머물렀다가 건태간이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 순리다. 후천팔괘가 진법의 핵심인데 동쪽 진궁에서 번개처럼 빠른 공격이 시작된다. 지금처럼.]
챙! 채재쟁!
청운은 빠르게 자신을 공격하는 검들을 연환으로 쳐냈다.
[감궁은 잔잔한데 이곳을 공격하면 땅의 자리인 곤궁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 어미를 먼저 처리하면 새끼들은 줄줄 따라오지.]
파방!
청운의 검기가 감궁을 맡은 자들을 후려쳤다.
이내 혈황의 말대로 곤궁의 무인 네 명이 청운의 뒤를 노리고 공격해왔다.
청운의 신형이 빙글 돌며 사내들의 검을 쳐내고 파고들면서 빛을 뿌렸다.
차자자자장.
서걱.
청운은 멈추지 않고 각 방향의 무인들을 공격했다. 방향마다 네 명씩 짝을 이루고 있었기에 한 번에 상대할 무인은 네 명이었다.
청운의 일검이 번쩍일 때마다 네 명의 몸에 가느다란 선이 그어졌다.
회풍구류검(廻風九流劍).
황궁무고에서 얻은 백팔무공 중 하나였다.
바람처럼 자유롭고 물처럼 부드럽게 펼쳐지는 아홉 초식의 검법은 다수를 상대할 때 좋은 검법이다.
황실무고에서 발견할 당시에 혈황은 청운에게 꼭 필요한 무공인데 잘됐다며 좋아했었다.
혈황은 산보하듯이 검진을 돌아다니는 청운을 보며 조언을 했다.
[무공이라는 것이 꼭 뛰어나다고 좋은 게 아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회풍구류검이 천세검존의 환우구검보다 좋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환우구검이 회풍구류검보다 훨씬 강력하지 않습니까?
청운이 익히고 있는 최강 검법 중 하나가 환우구검이기에 의아했다. 그런 청운의 궁금증을 혈황이 풀어주었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네 실력으로 이 상황에서 환우구검을 펼치는 건 낭비다. 네 화후가 좀 더 깊어지고 실력이 향상된다면 상관없겠지만, 지금 네 실력으로는 회풍구류검이 훨씬 좋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상황과 상대에 따라서, 그리고 현재의 역량에 따라서 맞는 무공이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래. 잘 이해했구나. 이놈들 상대하고 차분히 생각을 해봐라. 과연 환우구검으로 상대하는 게 나았는지, 아니면 회풍구류검을 펼친 것이 나았는지.]
-알겠습니다.
그 와중에도 검진의 위력이 청운을 압박했다.
“물러서지 마라! 무너진 검진을 유지하라!”
“예!”
혁련장 무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검진을 익힌 후 누구도 경천검대를 얕잡아보지 못했다. 그런 자들은 모두 탈혼무정검진을 펼쳐서 제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 자부심에 금이 가고 있었다. 절로 이가 갈렸지만, 물처럼 막힘없이 움직이는 청운을 잡을 수는 없었다.
서걱, 푸하악!
다시 피분수가 허공을 수놓았다.
청운이 지나가는 곳마다 하늘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
쓰러지는 무인들이 피워 낸 꽃은 아름다웠지만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다.
이윽고 검진을 유지하던 중궁의 무인 넷이 쓰러지면서 연결이 끊어졌다.
서걱 쿵!
명령을 내리던 사내가 죽임을 당하자 한순간에 검진이 와해되었다.
검진을 펼치던 자들과 뒤쪽에서 자리하던 무인들이 엉거주춤 멈춰 섰다.
살아남은 혁련장 무인들을 보며 청운은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더 덤빌 자는 없나?”
“…….”
“불필요한 피는 보고 싶지 않다. 칼을 버리고 항복하라.”
청운의 항복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흑검방을 두르고 있는 담에 방갓을 쓰고 검은 피풍의를 두른 자들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기도가 범상치 않았다.
살아남은 혁련장 무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들이 패배할지 몰랐다가 압도적인 무력으로 당했으니 정신적인 충격이 컸다.
쨍그랑.
누군가가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던졌다.
한번 시작된 소리는 역병처럼 다른 이들을 전염시켰다.
결국 살아남은 혁련장 무인들은 모두 항복했다.
이로써 혁련장의 무력 중 절반이 사라졌다.
* * *
개봉성이 발칵 뒤집혔다. 정오 무렵에 있었던 혁련장과 사파의 싸움 때문이었다.
내일이면 하남성 전체에 소문이 날 것이다. 혁련장이 사파에게 철저하게 당했다고.
“총관! 정녕 사실이란 말이냐? 출동한 무사들이 전부 죽거나 사로잡혔다는 것이 사실이냔 말이다!”
혁련종도가 얼굴을 붉히며 노성을 내질렀다.
총관이 혁련종도에게 읍하며 보고했다.
“외부에서 영입한 네 명의 절정무인과 경천검대 사대를 동시에 잃었습니다. 남은 건 경천검대 일대와 가문의 무사들입니다.”
“끄응.”
혁련종도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난 일 년간 준비했던 혁련장의 힘을 모두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상황 파악을 위해서 혁련종도가 다시 총관에게 물었다.
“놈들에게 잡힌 무인들은 몇이나 되느냐?”
“현재 파악 중입니다. 섬전창 예내추 님과 신수귀검 제천 님은 부상을 입고 잡혔습니다. 경천검대 백이십 명 네 개 검대 중 살아남은 이는 오십 명 정도라 합니다.”
“칠칠치 못한 놈들 같으니라고.”
혁련종도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혁련장 무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전력이 통째로 날아갔다. 어떻게 싸웠기에 그 전력을 가지고 패해서 사로잡힐 수 있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문득 들었다. 그래서 총관에게 묻는 혁련종도였다.
“총관, 개방에서는 여전히 정보를 주지 않나?”
“예, 방주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미 개방으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냈다. 이번 일의 전말(顚末)을 알려면 개방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개방이 요청을 외면하고 있었다.
혁련종도는 이글거리는 눈빛을 하고 총관에게 다시 말했다.
“대가를 준다고 말했느냐?”
“예, 은자 일만 냥을 정보비로 준다고 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이런…! 그 미친 새끼들이 우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것이야!”
빠드득.
혁련종도의 입에서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은자 일만 냥을, 다른 곳도 아니고 개방이 거부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가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고 있을 때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장주님.”
한쪽에서 가만히 회의를 지켜보던 서른쯤 보이는 사내였다. 혁련휘를 지도하는 선생이었다.
사내가 혁련종도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자들이 개입한 것 같습니다.”
“공자, 다른 자라니?”
“장주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흑검방이나 적건방의 힘으로 혁련장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예상이 모두 빗나가서 이러고 있는 것 아닌가 말이다.
혁련종도가 사내를 보며 힘없이 말했다.
“심증은 있네만…….”
“심증요? 하하하.”
사내는 혁련종도의 말에 크게 웃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이 안에 모인 사람 중 누구도 사내의 웃음을 나무라거나 멈추게 하지 않았다. 그만큼 사내의 영향력은 혁련장에서 대단했다.
사내는 웃음을 뚝 그치며 모든 이가 들으라는 듯이 차갑게 말했다.
“장주님, 탈혼무정검진을 익힌 검대가 넷입니다. 초절정무인도 상대할 수 있는 검진입니다. 거기에 절정무인 넷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흑검방이나 적건방의 누구도 그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고수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거대 문파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물며 그자들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꿀꺽…….
혁련종도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내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경천검대에게 탈혼무정검진을 전수한 장본인이 눈앞의 사내였다. 지금의 혁련장을 만들어준 사람.
사내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분명히 누군가가 뒤에 있습니다. 그것도 개방과 거래할 만큼 대단한 자가요.”
“그럼 어찌하면 좋겠나?”
장주의 되물음에 사내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한번 가보겠습니다.”
“정말인가?”
“본가인 혁련세가에는 연락을 하지 마십시오.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끄응. 그렇겠지. 자신들이 아니라 자룡궁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니……. 어쨌든 고맙네.”
혁련종도는 사내에게 포권을 하며 감사를 전했다.
사내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한마디 하며 밖으로 나섰다.
“혹시 모르니 자룡궁에 연락을 넣어주십시오.”
“알겠네. 걱정하지 말게.”
사내의 모습이 사라지자, 혁련종도가 명령을 내렸다.
“서둘러 자룡궁에 전서응을 띄워라. 세가에서 혹시 연락이 오면 잘 얼버무려라. 괜히 돈만 뜯어갔지 실질적으로는 도움도 안 되는 곳이다.”
“알겠습니다.”
* * *
적건방은 축제 분위기였다.
장원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다.
지난 사흘간 개봉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혁련장을 탈탈 털었다. 여기에 오늘 점심때 쳐들어온 혁련장 고수들을 모조리 죽이고 사로잡았다.
이 때문에 부하들도 많이 죽었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게 훨씬 많았으니까.
적건방의 핵심인물들이 앉아 있는 상석에서는 오늘의 일과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이야기가 오갔다.
적건방주는 이번 싸움으로 누수가 생긴 전력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죽은 부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슬퍼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맞습니다, 방주님! 그놈들이 칠칠치 못해서 죽은 것이지 않습니까.”
“껄껄껄.”
왁자지껄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눈살을 찌푸릴 이야기였지만 이들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었다.
이들은 사파였고 사파 중에서도 악랄하다고 알려진 자들이었다. 어제의 친우가 죽는다고 해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그 친우의 물건에 손댈 위인들이었다.
적건방주 적건사자(赤巾使者) 육장홍(陸長虹)은 그런 자였다.
자신이 홍건적의 장량이라도 되는 양 머리에 푸른 두건 대신에 붉은 두건을 쓰고 온갖 패악질을 저지르고 다니는 자였다.
“그놈들은 다 갔나?”
“예, 이미 떠난 지 오래입니다.”
“끌끌, 어리석은 놈들.”
육장홍 방주는 자신들을 도와서 적건방을 습격한 복면인들을 비웃었다.
방주가 흐뭇해하자 부방주가 신이 나서 입을 놀렸다.
“재물을 하나도 가져가지 않고 붙잡은 놈들만 포승줄로 엮어서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그자들이 미쳤다는 거야. 제 놈들도 여럿 죽었으면 한밑천 잡아야지, 그냥 가?”
자신들이라면 바락바락 우겨서라도 한밑천 챙겼을 것이다. 부방주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방실방실 웃으며 이야기했다.
“헤헤. 방주님의 위명에 놈들이 기를 못 펴서 그럴 것입니다.”
“크하하하. 사실 그 복면 쓴 놈 빼고 다른 놈들이야 내 적수가 아니지.”
“맞습니다요.”
싸워서 승리했고 재물을 얻었으니 기뻤다.
그렇게 승리를 자축하며 밤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러한 즐거움도 오래 가지 않았다.
“으아악!”
비명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