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34화
모인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개봉에서 염악의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일반 개방도와 다름없었다. 아니, 성질머리 나쁘고 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파락호라 불려도 될 만큼 미친개였다.
그래서 그의 별호가 광견신개였다.
언제나 개뼈다귀만 들고 붙어 있지도 않은 살점을 뜯으며 동냥질을 했다. 누가 봐도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딱히 강호제일방파인 개방의 방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끔 실수를 저질렀다.
그렇다고 염악이 그런 실수를 딱히 트집 잡는 성격도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개봉에 사는 사람들은 개방 방주인 염악을 아랫사람 대하듯이 했다. 자신 역시 조금 전까지 실수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자신이 보낸 부하도 실수를 한 것이 있을지 몰랐다.
“어쩔 수 없지. 예물을 준비하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대기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장주.”
일각 후.
혁련종도는 간부들에게 뒤를 맡기고 서둘러서 개방 총단으로 향했다.
* * *
개방 총단으로 가는 대로변에 거지들이 쫙 깔려 있었다. 어딘가로 전쟁하러 가려는 것인지 흉흉한 안광을 뿌리며 갖가지 무기를 들고 있었다.
혁련종도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미친, 이놈들 정말 혁련장을 공격하려고 한 건가?’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왔다.
자신이 들어서자 거지들이 살기를 뿌려댔다. 철천지원수를 만나도 이보다는 더 부드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 아니 수천의 거지들이 병장기를 쥐고 있는데, 저 앞 건물의 기단에 방주가 앉아 있었다.
앞으로 나아간 혁련종도는 공손하게 포권하며 안부를 물었다.
“방주, 오랜만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일장에 때려죽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염악은 시큰둥한 소리로 말했다.
“시발, 평소에 우리 개방을 얼마나 X같이 얘기했으면 애들이 나한테 엉기는 거요? 애들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보쇼!”
염악의 말에 혁련종도는 마른침을 삼켰다.
염악이 함부로 말하건 욕을 하건 중요치 않았다. 자신은 일개 장원의 장주였고, 상대는 천하제일 방파인 개방의 방주였다.
혁련종도는 더욱 공손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당신도 내가 우스워?”
혁련종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염악의 차가운 한마디가 저승사자가 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재차 염악이 물으며 벌컥 화를 냈다.
“내가 우습냐고 묻잖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왜 설치는데? 내가 모른 척 놔두니까 무서워서 그런 줄 알아?”
“방주,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해입니다, 오해.”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부하가 잘못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염악이 살짝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해?”
“그렇습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헛소리를 하겠습니까?”
지옥의 야차 같은 모습이었다. 흉신악살이 따로 없었다. 놈은 여전히 판다가 된 얼굴을 하고 다그치듯이 말했다.
“그럼 당분간 봉문하듯이 꼼짝 말고 있으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런 니미럴! 한번 말하면 알아들어야 할 것 아뇨!”
“방주, 정말 무슨 말씀이신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 양반이 뒈지려고!”
한 마리 용이 염악의 왼손에서 뻗어 나와서 바닥을 강타했다.
슈웅 쾅!
후두두득.
혁련종도의 바로 옆에서 굉음과 함께 돌가루가 튀어 올랐다.
용이 돌바닥을 강타하면서 움푹 구덩이를 만들었다.
강룡실팔장 중 신룡파미(神龍擺尾)였다.
손을 뒤로 뻗어 내리쳐서 공격하는 초식.
돌가루를 뒤집어쓴 혁련종도는 온몸이 굳었다. 일류 무인인 그의 양손이 덜덜 떨렸다. 떨리는 손을 꽉 움켜쥐며 이를 앙다물었다.
절대무위, 결코 자신이 범접하지 못할 엄청난 신위에서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때 구원의 소리가 들렸다.
“방주. 혁련장주가 무얼 알겠습니까?”
“누구야? 감히 방주가 얘기하는…… 삼장로군. 그런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제가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그래도 혁련세가와 핏줄이 이어진 자이니 너무 막대하기도 조금 난처합니다.”
방주를 막아선 인물은 개방의 삼장로인 철산반(鐵算班) 안달이었다.
그는 쇠로 된 주판을 주무기로 사용했는데, 그의 철산은 강호일절로 알려져 있었다.
그나마 미친개인 염악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몇 안 되는 개방도 중 하나였다.
삼장로가 나섰지만 염악은 여전히 불만을 터트렸다.
“또 혁련세가야? 이번에 모임에 가서 확 밟아버려?”
“전대 방주님이 좋아하시지는 않으실 것 같은데요.”
“끄응. 그놈의 늙은이, 어디 가서 확 뒈지지도 않네.”
앓는 소리를 내며 염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혁련종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살았군.’
조금 전까지 죽을 뻔했다. 특히 염악의 손에서 펼쳐지는 강맹한 무공을 접하자, 자신이 그동안 염악을 너무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악이 자리를 뜨자, 삼장로가 사람 좋은 인상을 하고 혁련종도에게 다가왔다.
“장주. 어쩌자고 저 미친 개새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셨습니까?”
“그, 그게…….”
혁련종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천하제일 방파인 개방의 방주를 장로가 욕한다고 같이 욕할 수는 없었다.
그가 머뭇거리자 삼장로는 그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말했다.
“거지한테 거지라고 한다고 욕은 아닙니다. 개새끼에게 개새끼라고 한다고 욕할 자는 없습니다.”
“그래도…….”
“허허허. 천하의 혁련 장주께서 이리 담이 작아서야 되겠습니까? 저희도 가끔 방주 욕을 합니다. 사실 하는 짓이 방주와는 거리가 멀지 않습니까?”
“…….”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혁련종도는 맞장구를 칠 수는 없었다. 이럴 때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는 게 좋았다.
다행히 삼장로는 자신과 동조를 안 한다고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그건 그렇고, 조금 전에 방주가 한 이야기는 허투루 들으시면 안 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요즘 저희 개방을 업신여기는 자들이 많아졌습니다. 물론, 방주가 개새끼인 것이 문제지만요. 허허. 아무튼 사흘간은 움직이지 마시고 꼼짝달싹하지 마십시오. 방주가 개봉성 내를 쓸고 다닌다고 하니까요.”
삼장로는 턱짓으로 주위를 가리켰다.
흉흉한 살기를 뿌리는 개방도들이 보였다.
개봉성의 최대 문파가 개방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요즘 모두가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 역시 그랬으니 할 말은 없었다.
“제 말 명심하십시오. 이번에는 제가 어떻게든 막았지만, 경고를 무시했다가는 다음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거대 문파의 횡포였다. 그렇다고 딱히 자신들도 잘한 건 없었다. 평상시 거지를 거지답게 대했을 뿐이니 말이다.
‘흑검방을 치려 했건만.’
며칠 뒤로 물러야 했다. 이대로 싸움을 벌였다가는 개방에게 박살 날 것이 뻔했다.
혁련종도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빨리 장원으로 돌아갔다. 길거리에서 어물거리다가 염악을 만나는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 * *
이틀 후.
쾅!
“이런 죽일 놈들이!”
혁련종도가 악을 쓰며 화를 냈다.
붉게 변한 그의 얼굴이 홍시처럼 변했다.
“이번에는 어디라더냐! 어디!”
“적건방 놈들입니다.”
사파 놈들이 지난 이틀간 개봉성 내를 휘저으며 활개를 치고 있었다.
특히 혁련장이 벌이는 사업장마다 나타나서 박살을 내놓았다. 치우면 다시 나타나서 또 박살을 내고 유유히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혁련종도가 붉어진 얼굴로 총관에게 물었다.
“손해는? 손해는 얼마나 났다더냐?”
“천이백 냥이라 하옵니다.”
작은 돈이 아니었다. 반나절 만에 본 손해가 은자 천이백 냥이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문제는 개방 때문에 무사들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업장마다 무사들을 추가로 배치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배치할 수 있는 인원에 한계가 있었다.
“문제는 무사들이 대기할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근처에서 대기했다가 치려고 하면 개방도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훼방을 놓고 있습니다.”
“개방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게.”
“어서 말하지 못하겠느냐?”
“그런 것 모른답니다.”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혁련종도는 힘이 풀려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파가 공격당하는데 같은 정파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하다니.
그렇다고 막 나갈 수도 없었다. 경고를 받았으니 지켜야 했다. 안 지켰다가는 그 미친 개새끼가 정말로 자신들을 공격할지 몰랐다.
“어떻게 해서든 허락하지 않았어야 했거늘…….”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혁련세가에 도움을 받거나 소림사에라도 연락을 넣어서 중재를 부탁했어야 했다.
돈은 들겠지만 지금처럼 참담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이처럼 손 놓고 구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뒤늦은 후회를 할 때, 한쪽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침묵을 깼다.
“장주.”
혁련종도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의 눈에 들어온 자는 서른쯤으로 보이는 사내였다.
자룡궁에서 파견 나온 인물. 지금은 첫째 아들 혁련휘를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말씀하게.”
“재산은 다시 모으면 됩니다. 그러니 기다리시지요.”
딱 잘라 말하는 그의 말에 혁력장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 되었든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리하겠네.”
* * *
사흘.
딱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개봉성 내는 난장판이 되었다. 사파가 난리를 치고 다녔다.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면 어느새 나타난 개방도들이 시비를 붙였고, 조금 지나면 방주인 염악이 나타나서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덕분에 개봉성 내의 정파는 숨을 죽였다. 그들에게도 개방 방주의 엄중한 문책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일반 양민은 건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백의를 곱게 입은 청운은 금의위가 보낸 보고서를 펼쳐봤다.
“객잔 세 곳과 전장 두 곳이 박살 났군. 포목점과 염상마저 박살이 났으니 손해가 막심했겠는데?”
“예. 혁련장은 이번 일로 성내에서만 이만 냥 정도는 손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은자 이만 냥은 쉽게 만질 수 없는 거금이었다. 혁련장에서 일 년간 벌어드린 은자가 십오만 냥이었으니 타격이 제법 클 것이다.
청운은 십조장 윤석평(尹石平) 백호에게 물었다.
“잡아 온 자들에게서 정보는 얻었느냐?”
“예, 대인. 일부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정확하게 그자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알아낸 사항은?”
“이쪽 검은 실로 묶인 두루마리에 있습니다.”
청운은 수북이 쌓인 보고서에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쫘르륵.
두루마리를 펼치자 그에 대한 사항과 한 장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방갓을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의 반이 가려진 초상이었다.
‘놈이 맞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사내였다.
초상은 제법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잡힌 자들이 서로 대조했기 때문에 거의 비슷했다.
“놈의 목에 있는 문신이 무엇인지 알아냈나?”
“예, 다행히 한 사람이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자가 옷을 갈아입는 것을 봤다고 합니다. 등부터 이어진 전갈의 꼬리라고 합니다.”
청운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에게 한 발 더 다가갔다.
“협조를 구하기 어려웠을 텐데 용케 해냈군.”
“역모에 관련된 자라 하니까 앞다투어 정보를 알려왔습니다.”
“역모라……. 잊고 있었군. 우린 지금 역모를 조사하는 중이지.”
청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 백호에게 말했다.
“첫째 아들인 혁련휘는 여전히 폐관 중인가?”
“예, 대인. 그리고 혁련휘를 가르치고 있는 자를 알아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