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33화
오늘 아침, 오랜만에 하남성의 명주로 꼽히는 두강주가 동냥질로 들어와서 혼자 홀짝이며 마시다가 잠을 잤다.
그 후 세 시진쯤 지났을 때,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남아 있는 두강주를 다시 한 모금하는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두강주인가? 하긴 하남성에서 가장 유명한 술이니 마실 만하겠군.”
고개를 돌려보니 풍운장의 주인이 서 있었다.
“꿀꺽. 여긴 웬일이슈?”
“그저 지나는 길에 들렸네.”
수상한 풍운장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거지 굴에 온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사자인 염악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 그렇지 않아도 숙취 때문에 머리 아픈데, 용건이나 말하시지?”
귀찮으니 어서 할 말만 하고 가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청운은 딴청을 피우며 시를 한 수 읊었다.
“조조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자네가 마시는 두강주를 마시며 시 한 수를 읊었다네. 주당가(酒當歌)라는 시의 일부분이 생각나는군.
대주당가 (對酒當歌) 인생기하 (人生幾何)
비여조로 (譬如朝露) 거일고다 (去日苦多)
개당이강 (慨當以慷) 우사난망 (憂思難忘)
하이해우 (何以解憂) 유유두강 (唯有杜康)이라.
어떤가? 좋지 않은가?”
청운이 낭랑하게 시 한 수를 읊었지만 염악은 시큰둥했다.
뭔 개소리를 아침 댓바람부터 하는 거야?
그래도 찾아온 손님이니 막 대할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황실에서 나온 인물이니 성질을 참으며 좋게 이야기했다.
“뭔 개소리요?”
“술을 들며 노래한다. 인생이 길어 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비교하자면 아침이슬 같으니, 지나간 날엔 괴로움만 많았다.
슬퍼하며 탄식해도, 근심 잊기 어렵다.
무엇으로 근심 풀까? 그건 오직 술뿐일세.
뭐, 대충 이런 뜻이라네.”
뜻까지 해석을 해주니 지끈거리는 머리가 더욱 아파 왔다.
염악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시발! 그러니까 그게 뭔 개소리냐고!”
버럭 화를 내며 염악이 바닥을 차며 튀어 나갔다. 청운을 향해서 무언가를 휘둘렀다.
후웅!
어느새 그의 손에는 뼈다귀가 들려 있었다.
단순히 성질나서 휘두른 게 아니었다. 이참에 한번 수상한 풍운장 주인 놈을 시험해볼 생각이었다.
청운은 가볍게 상체를 뒤로 물리며 첫 번째 공격을 피했다.
염악의 뼈다귀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흉기가 되어서 허리를 노렸다.
청운은 염악의 품으로 한 발 나아가며 거리를 좁혔다.
뼈다귀의 타격점을 흩트렸다.
염악은 서둘러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나 한번 잡힌 거리는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찡그렸던 염악의 표정이 점점 경악으로 바뀌었다.
취팔선보를 펼치는데도 청운을 떨쳐내지 못하니 놀랍기만 했다.
“이런, 니미럴.”
개방의 절학 중의 절학인 취팔선보가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것도 술까지 처마셨건만, 비틀거리는 움직임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붙고 있었다.
훙훙, 후웅!
뼈다귀가 허공에서 춤을 췄다.
취팔선보(醉八仙步)를 펼치며 개방의 비전인 백결신장(百結神掌)이라는 장법을 뼈다귀를 쥐고 펼쳤다.
그런데 펄럭이는 옷자락 하나 건들지 못했다.
‘이런 미꾸라지 같은 새끼가……!’
염악은 절로 욕지기가 올라왔다. 당장 걸쭉하게 뱉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팽팽하던 대결에 틈이 벌어진 건 찰나였다.
“어? 그…….”
퍽!
맑은 하늘에 별이 번쩍였다.
염악은 뒤로 날아가서 벌러덩 나자빠졌다.
고개를 세차게 흔든 그는 한쪽 눈을 껌벅였다.
청운의 주먹에 정통으로 맞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맞았다는 것이 아니었다.
벌떡 일어난 그가 청운을 보고 소리쳤다.
“그 신법, 어디서 익혔어?”
청운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천무영신법을 알아봐?’
이상한 일은 아니다. 천하제일 신법으로 이름 높은 신법이기에 알아보는 이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염악의 표정을 보니 그저 아는 수준이 아닌 듯했다.
“방금 펼친 무공, 무영신법이지? 아니 아니야! 그건 분명히 비천무영신법이야! 그렇지?”
아니나 다를까 청운의 신법을 정확히 알아봤다.
청운이 그런 염악에게 한마디 했다.
“그게 어떻다는 것이지?”
“맞네! 그거 내놔.”
“뭐?”
청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영신법이 어떤 무공인데 내놓으라 마라 하는 거야?
“그거 우리 선조 거야.”
청운은 염악의 말에 혈황을 보았다. 혈황은 고개를 저었다.
[무영신투가 미쳤느냐? 거지를 하게.]
천하제일대도로 이름이 높은 무영신투였다. 그의 재산이 얼마인데 거지생활을 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청운은 염악을 차갑게 보며 말했다.
“무영신투가 개방도라고?”
“그렇지 무영신투는 개방도였어. 그러니 그의 무공은 개방 거지.”
참 편리한 논리였다. 어떻게 보면 맞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래서 청운이 물었다.
“무영신투가 개방제자였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아! 그분의 제자가 개방에 입당하면서 비천무영신법을 전수했거든.”
피식.
청운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무영신투의 제자가 개방도였으니 무영신법을 내놓으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발상이냐? 그리고 무영신법을 개방에 바쳤으면 개방에도 그 무공이 남아 있을 거 아니냐?”
청운의 일침에 염악은 머뭇거렸다.
“그게 있기는 한데, 완성본이 아니라서. 아무튼, 우리 거니까 내놓아.”
“미친놈 같으니라고. 무영신투의 제자가 한둘이냐? 그리고 네놈 말을 들어보면 온전한 비천무영신법도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강짜를 부리는 거냐?”
“흥. 지랄하네. 사람들에게 다 물어봐라. 비천무영신법이 개방무공인지 아닌지?”
“하하하. 그럼 어디 펼쳐 보아라.”
청운의 한마디에 염악은 이를 앙다물었다. 펼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보물에 눈이 돌아간 개방 방주 염악은 두 눈에 불을 켰다.
“분명히 말하는데, 내놓는 게 좋을 거야.”
당장이라도 청운에게 달려들 기세였다. 주위에도 거지들이 개떼처럼 몰려나와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구경하는 모습도 보이고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자들도 보였다.
문제는 그들 각자 몽둥이를 들고 청운을 향해 서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개방도들의 모습을 쓱 둘러본 혈황이 감회가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호오……. 오랜만에 보는 대타구진이구나.]
수백 명이 펼치는 개방의 진법이었다.
허술한 듯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는데 그들의 위장 공격은 고도의 심리전을 포함하고 있었다. 소란스럽고 허술한 모습에 상대가 방심하는 순간 끝나는 진법이었다.
음양오행의 이치를 품고 있기에 변화가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청운은 겁을 먹지 않았다. 그저 욕심에 눈이 돌아간 염악을 향해서 전음을 보냈다.
-팔십만 금군과 한판 붙겠다는 거냐?
“헉 그…….”
염악은 순간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런 염악을 보며 청운이 다시 전음을 보냈다.
-이 무공은 황제 폐하께서 내게 하사하신 무공이다. 감히 네까짓 것이 욕심을 낼 물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염악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미, 처음부터 타구봉을 들고 싸웠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청운이 이런 고수인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최강의 무공인 타구봉법이나 강룡십팔장을 펼쳤을 것이다.
그런데 청운을 우습게 알고 상대하다가 당하고 말았다.
‘다시 한판 붙자고 할까?’
그러나 다시 붙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청운이 황제의 이름을 언급했으니 더 덤볐다가는 금군이 밀려올 지도 모르는 것이다.
개방 방주인 염악이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청운이 한마디 했다.
“개봉이 시끄러워질 것 같은데.”
“시발, 내 탓은 아니잖아.”
“누가 뭐랬나? 그저 더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다는 것이지.”
빙그레 웃으며 말하는 청운을 보며 염악은 침을 뱉었다.
“카악 퉤! 지미, 대개방이 아침부터 협박질이나 당하고.”
염악은 청운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자신이 일을 벌일 것이니 소문나지 않게 하라는 말이었다.
놈의 말속에는 자신의 말을 안 들어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도 숨어 있었다.
거기다 금군과 황제까지 들먹이지 않았는가. 아마 안 들어줬다가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그렇다고 그냥 들어줄 수도 없었다.
염악은 자신의 욱신거리는 한쪽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보이지? 공짜는 안 돼.”
“원하는 건?”
“무공이지. 이왕이면 비천무영신법이면 좋겠는데.”
씩, 웃으며 말하는 염악을 보며 청운은 마주 웃었다.
“불가.”
“시발, 그럼 그렇지. 그럼 뭐 줄 건데?”
“신법이 필요하다면 쓸 만한 거 하나쯤 줄 수도 있는데.”
“뭐?”
쓸 만한 무공이라는 말에 염악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런 염악의 되물음에 청운은 담담히 말했다.
“설마, 내가 아는 신법이 그거 하나겠는가?”
염악은 쪼르르 달려가서 청운 앞에 섰다. 그러고는 거지답게 양손을 비비며 말했다.
“어떤 신법을 주려는 건지……?”
“글쎄, 하는 거 봐서.”
“설마 저잣거리에서 굴러다니는 그런 건 아니겠지?”
“어허, 이 사람. 내가 아무 거나 주겠나? 그냥 믿게.”
“뭐… 믿지, 믿어. 역시 대인께서는…… 하하하하.”
조석지변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청운은 염악을 나무라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는 거지였고, 거지 중에서도 왕초였다.
* * *
혁련종도는 눈앞에 걸레가 된 조카를 보며 경악했다.
자신이 이각 전에 개방으로 보낸 인물이었다. 나름 똑똑하고 빠릿빠릿한 인물이어서 혁련장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기가 막혀서 되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개방 방주인 염악이 나를 보자고 했다고?”
“예, 당장 달려오지 않으면 박살을 내겠다고…….”
“허허, 이것 참.”
기도 차지 않는 일이었다.
현 개방 방주는 이제 겨우 삼십 대 초반이었다. 후기지수 중에서 발군의 실력을 갖춘 자로 한때 오룡 중 일좌를 차지할 만큼 대단한 실력이었다.
그러다 나이가 조금 더 들고 개방의 방주가 되면서 오룡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오만방자하고 개뼈다귀만 휘두르는 놈이, 죽고 싶지 않으면 냉큼 달려와서 머리를 조아리라고 했단 말이지?”
“그, 그렇습니다.”
쾅!
혁련종도가 탁자를 강하게 내려쳤다.
탁자가 박살이 났다.
탁자 위에 있던 찻잔과 서류들이 바닥에 흩어졌다.
“감히 거지새끼들이…!”
혁련종도는 부르르 몸을 떨며 분개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혁련종도를 말렸다.
“참으셔야 합니다, 장주.”
“놈이 개방의 방주라는 걸 잊지 마십시오.”
“끄응.”
혁련종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천하 거지들의 대장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놈의 나이나 평소 행실이 그를 대문파의 지존으로 인정하기 어려웠다.
“장주님. 무조건 만나보셔야 합니다. 그자가 아무리 개차반이라 할지라도 구파일방 중 일방의 주인 아닙니까?”
“맞습니다. 본가의 어른들도 놈의 심기를 건드는 걸 반기지 않을 것입니다.”
간부들의 말에 혁련종도는 길게 탄식했다.
“젠장! 이 중요한 시기에… 어찌 거지새끼들이 앞을 막는단 말인가!”
혁련종도는 당장 부하들의 원수부터 갚고 싶었다. 흑검방 정도는 한 시진이면 멸문시킬 힘이 있었다.
그런데 개방 방주 때문에 당장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개방 방주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하루아침에 혁련장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걸.
본가인 혁련세가에서 가주가 나선다고 해도 무마시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는 존재가 개방이었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그때 조용히 앉아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장주님, 염악의 성격상 평소에는 그냥 넘어갈 일인데 무언가 이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