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32화
평소에는 얼씬도 안 하던 자들이었다. 더욱이 단순한 시비라면 적당한 선에서 끝을 내야 했다.
그런데 작정하고 온 듯했다. 그렇다면 준비가 안 된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시간이 필요해. 앞으로 이각이면 무사들이 온다.’
서문에 자리 잡은 혁련장에서 무사들이 몰려올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주인의 기다림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야! 이거 우리가 사파라고 무시하는 거야?”
“그러게 말입니다요. 이거 안 되겠는데요.”
“주인 새끼 어딨어? 어서 안 나와!”
이층에서부터 시작된 고함이 객잔 안을 가득 메웠다. 이내 탁자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주변 손님들과 시비가 붙었다.
“아악!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밥 먹으러 온 손님입니다.”
“우리도 손님이야, 개새끼야!”
“어쭈? 꼴에 검을 차고 있네. 야, 찔러봐! 찔러봐, 이 새끼야!”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가며 난장판이 되었다.
객잔을 지키는 무사들이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멈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더냐!”
“참아! 멈추란 말이다!”
주인은 뛰쳐나가는 무사들을 제지하려고 했다. 수십 명이 몰려온 상황에서 고작 다섯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세 좋게 뛰쳐나간 무사 다섯이 객잔 바닥을 구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인은 두 눈을 찔끔 감았다 뜨고는, 앞으로 나서며 포권을 취했다.
“제가 일품객잔 주인입니다. 진정하시지요, 손님.”
주인이 나서서 말하자 시끄러웠던 객잔이 조용해졌다.
이층에서 짜증 석인 호통이 튀어나왔다.
“씨발! 우리가 사파라고 무시하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여기는 누구나 와서 식사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왜 지랄이야! 밥만 먹고 가려는데.”
주인은 속이 부글거렸다. 누가 봐도 시비를 걸려고 온 놈들이 분명했다. 그런데 뻔뻔하게 모든 걸 객잔 잘못으로 돌리다니.
“죄송합니다. 다시 음식을 올리라 하겠습니다.”
주인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혁련장에서 무사들이 오면 네놈들은 모조리 저승행이다.’
그런데 흑검방 무사가 말했다.
“지랄하네.”
“당주님, 저놈 혁련장 애들 기다리나 본데요.”
“낄낄낄. 병신 새끼들.”
여기저기서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마치 이렇게 될 거라는 것을 예상하였다는 소리로 들렸다.
주인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내 눈에서 불이 번쩍이더니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주인이 쓰러지자, 고성이 다시 터졌다.
“다 부숴!”
“오늘 일품향 문 닫는다!”
와장창창,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일품향의 집기가 여기저기서 산산조각 났다.
* * *
혁련장은 일품향에 흑검방 무사들이 나타나서 소란을 피운다는 소식을 듣고 무사대를 파견했다.
사파 놈들이 감히 혁련장의 영업장을 침범하다니.
본때를 보여줄 작정이었다.
아니 이 기회를 빌어서, 개봉에 독버섯처럼 존재하는 사파 놈들을 쓸어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했다.
그런데 무사를 파견하고 일각쯤 지났을 때였다.
수상하게 돌아가는 개봉성의 분위기 때문에 회의를 하고 있는데 한 사내가 문을 벌컥 열고 뛰어들었다.
“큰일 났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무엇이냐. 어서 말해 보거라.”
“일품향으로 가던 경천삼검대(驚天三劍袋)가 흑검방 놈들과 싸우던 중에 복면인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뭐라? 복면인?”
“예! 북문 대로로 들어서는 곳에서 흑검방 놈들이 길을 막았습니다. 곧장 싸움이 벌어졌는데 골목 안에서 복면을 쓴 자들이 튀어나와서 순식간에 당했다고 합니다.”
“놈들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느냐?”
“너무 갑작스럽게 당해서…….”
“피해 규모는?”
“경천삼검대 서른여섯 명 가운데 다섯이 죽고 나머지가 부상을 당했습니다. 무엇보다 검대주와 몇몇이 놈들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모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경천검대는 모두 오검대까지 있다.
최근 심혈을 기울여서 키우는 자들이기에 개중에는 일류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한 자들도 몇 있었다. 그런데 모두 당했다고 하니 놀랄 수밖에.
모두가 중앙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혁련장의 장주인 단천비검(斷天秘劍) 혁련종도가 중앙의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다시 지원을 보낼까요?”
곁에 있던 사내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중앙에 앉아 있는 혁련종도는 고개를 저었다.
“순식간에 당했다면 보내봤자야. 이미 일품향도 당했을 거다. 뒷수습하고 흑검방에 연락을 넣어라. 복수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
“알겠습니다.”
보고하던 사내가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실내에는 혁련장 핵심인물들이 앉아 있었다. 장주인 혁련종도가 그들을 한 번 슥 둘러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몇 사람이 각자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예. 흑검방이 미치지 않고서야 우리와 정면에서 붙지는 않을 테니까요.”
“형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지난번에도 덤비기는 했지만 꼬리를 말고 물러섰지 않습니까?”
“확실히 이상합니다. 특히 복면인이 나타났다고 하는 부분이 더 이상합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혁련종도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그 역시 그 부분이 가장 의심되고 우려스러웠다.
그가 잠시 고뇌하더니 입을 열었다.
“놈들의 뒤를 봐주는 자들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놈들이 고수들을 끌어들였는지 알아봐라.”
“개방에 연락할까요?”
“그래. 서둘러라.”
정보가 필요했다.
흑검방 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혁련종도다.
놈들이 사악하긴 해도 함부로 미친 짓을 할 놈들이 아니었다. 전면전이 벌어지면 멸문을 당할 것이 뻔한데도 덤볐다는 것은 그만한 힘이 생겼다는 말이었다.
“경천일검대와 오검대를 대기시켜라. 그리고 섬전창과 쌍혈단악을 불러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추강원은 향월루에서 술을 마시고 있습니다.”
혁련종도의 눈에서 빛이 번쩍였다.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며 으르렁거렸다.
“이런 개새끼가 대낮부터 기루에서 술을 퍼마시고 있어?”
빠드득.
이가 갈렸다.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절정의 무인만 아니었어도 받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쌍혈단악 추강원은 섬서지방에서 활동하던 사파인이었다.
호전적이고 여자를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문제를 많이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다행히 혁력장에 들어와서는 일반인을 상대로 패악질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루에서 온갖 짓거리를 벌여서 여간 골치 아픈 인물이 아니었다.
“불러라. 놈에게 술값은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끝에 앉아 있던 사내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화가 풀리지 않은 장주를 보며 곁에 있던 사내가 말했다.
“장주. 좋은 기회입니다.”
“무슨 말이냐?”
“이번 기회에 사파 놈들을 쓸어버리지요.”
혁련종도도 생각하고 있던 바였다.
“확실한 명분이 필요해.”
“놈들이 앞뒤 안 가리고 습격했습니다. 게다가 일반인들이 식사를 하는 객잔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니 명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충분한 힘도 있었다. 장원에 속한 절정무인만 해도 벌써 몇 명이던가.
더욱이 명분에서 앞서니 개봉 정파들의 힘도 끌어낼 수 있는 좋은 상황이었다.
혁련종도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들 동조하는 눈치였다.
그는 조금 찜찜한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결단을 내렸다.
“좋다. 신수귀검과 염라수도 불러라.”
“예, 알겠습니다.”
외부에서 혁련장으로 흘러들어온 네 명의 절정무인을 모두 불렀다.
혁련장이 급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자들. 그들을 이용한다면 흑검방을 쓸어버리는 정도는 어렵지 않을 듯했다.
‘하긴 너무 오래 놔뒀어. 놈들을 쓸어버리면 우리 혁련장이 개봉 제일세력이 될 거다. 후후후후.’
* * *
개봉에서 가장 유명한 것을 뽑으라면 개방 총단은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내가 개방 총단에 들어섰다.
다른 때와 다르게 거지들이 보이지 않았다. 항상 거지들이 북적거리는 곳이 개방 총단이거늘.
‘다들 어디 갔지?’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중앙 건물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한 거지가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톡, 토톡…….
그 거지는 자신이 깔고 있는 거적때기에서 빈대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거지의 한쪽 눈덩이가 시퍼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어디에서 맞은 것이 분명한데, 억울해서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사내는 성큼 걸어가서 그 거지에게 인사를 했다. 모습이야 어떻든 간에 그 거지가 바로 개방의 방주 염악인 것이다.
“혁련장에서 온 혁련위상입니다. 이렇게 개방 방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사를 마친 혁련위상은 반응 없는 염악을 보며 엉거주춤했다.
천천히 열을 셀 때쯤, 입이 열릴 것 같지 않던 염악이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왜 왔어?”
“예, 그러니까,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혁련위상은 자신이 온 이유를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던 도중에 염악이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정보를 달라, 이 말이냐?”
“그렇습니다.”
염악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거적을 이리저리 뒤졌다. 그런 그의 모습에 화가 날 만도 했지만 혁련위상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방주, 저희 혁련장이 사파 놈들의 급습을 받았사옵니다. 이대로 넘겼다가는 놈들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
“이번 기회에 개봉에서 사파 놈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이번 일을 도와주신다면 저희 혁련장에서 섭섭지 않게 대우해 드릴 것입니다.”
“뭐?”
순간, 염악이 빈대를 잡던 일을 멈추고 더벅머리를 움켜쥐었다.
만일 그가 머리카락을 움켜쥔 것을 다른 개방도가 봤다면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혁련위상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너 지금 뭐랬어?”
“네?”
혁련위상은 갑작스러운 하대와 염악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딱히 자신이 잘못한 일은 없었다. 같은 정파끼리 도와달라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더군다나 사례도 충분히 한다고 했으니 오히려 개방에 좋은 일이 아니던가.
그러나 염악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개X끼들이 감히 개방을 어떻게 알고!”
퍼버버벅. 퍽퍽.
어느새 염악의 손에는 누구의 뼈인지 모를 뼈다귀가 들려 있었다.
그 뼈다귀가 허공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사내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염악이 한참을 패다가 씩씩거리며 잠시 숨을 골랐다.
“이 개X끼야! 혁련세가에서 그렇게 가르치던? 개방이 거지새끼들이 모인 곳이니 마음껏 가서 은자로 지랄 떨어도 된다고!”
“아이고 방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
“조용히 해 새끼야! 이 새끼가 아직 덜 맞았구만!”
퍽퍽퍽!
염악은 사정 봐주지 않고 다시 사내를 복날 개 패듯이 타작했다.
사내는 비명 하나 뱉지 못하고 연신 두들겨 맞았다. 이대로 계속 맞았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쯤 염악이 손을 멈췄다.
“시발 새끼들, 같은 정파?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방계 새끼들이 지랄이야!”
문제는 그것이었다.
개방은 정파의 대표라는 구파일방 중 일방을 차지할 만큼 강력한 단체.
오대세가에도 들지 못하는 혁련세가의 방계가 만든 혁련장이 평대를 할 만큼 배분이 낮은 곳이 아니었다.
“너 이 새끼, 당장 가서 혁련장주 오라고 해. 확 다 죽여버리기 전에.”
버럭 화를 내는 염악 때문에 사내는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염악이 머리는 때리지 않았다는 것과 내공을 실어서 타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내는 끙끙 앓으며 기어서 밖으로 나갔다.
뒤에서 들려오는 염악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애들 불러! 혁련장 새끼들, 지랄하면 오늘 다 때려잡는다!”
“예 방주님!”
한 명도 보이지 않았는데 사방에서 거지 떼가 우르르 몰려나왔다. 아무래도 방주를 피해서 숨어 있었던 것 같았다.
염악이 버럭 화를 내며 거지들에게 말했다.
“요즘 개나 소나 다 개방이 우습지! 이 새끼들, 오늘 다 죽었어.”
염악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그가 평소보다 더 미친 듯이 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