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30화
혈황의 말에 청운의 두 눈이 커졌다.
“설마 그렇게 단순할까요.”
[하하. 내가 흑도는 좀 안다. 흑도 놈들은 본래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한 척하는 놈들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이었다.
사마외도는 대부분 강자가 모든 것을 취하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그에 반해서 정파는 힘의 강약보다 명분이 앞섰다.
[그놈들이 어떤 놈들이건 간에 철저하게 밟으면 꼼짝 못 할 거다. 그러니 이번 일은 그냥 힘으로 밟아라. 확실하게.]
혈황의 말에 청운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스승님이나 혈황이나 모두가 그들을 활용하라고 한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그까짓 삼류방파, 금의위만 보내도 한 끼 식사거리밖에 안 되는 자들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 * *
으스스한 밤이었다.
구름에 달이 살짝 가려 있었지만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달빛이 구름을 뚫고 대지에 떨어질 때 한 마리 야조가 달을 가로질렀다.
야조는 개봉성 내의 서북 방면에 위치한 장원의 건물 지붕 위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건물의 현판에는 흑검당(黑劍堂)이라 적혀 있었다.
그 장원이 개봉에 자리 잡은 사파 중 흑검방(黑劍幇)인 것이다.
복면인은 흑검당을 살펴보았다.
잠시 후, 그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지붕 위에서 사라졌다.
스르륵.
흑검당 입구를 지키고 있던 무인 둘이 힘없이 쓰러졌다.
흑검당의 문이 안으로 열리자, 안에서 회의를 하고 있던 십여 명의 시선이 일제히 열린 문으로 쏠렸다.
“뭐야?”
“응? 네놈은 누구냐?”
“자객?”
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문을 연 자는 전신에 검은 천으로 된 야행복을 입고 얼굴마저 두건으로 가린 상태였다.
그런데 자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당당했다.
더군다나 습격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했다. 십여 명이 모인 곳에 당당하게 문까지 열고 혼자 들어온 것이다.
중앙에 앉아 있는 덩치 큰 인물의 왼편에 있던 자가 호통 치듯이 말했다.
“웬 놈이냐고 묻지를 앉느냐?”
흑검방의 이인자인 쇄비수(碎碑手) 문인악이었다.
그는 이곳 개봉에서 제법 알려진 사파의 고수였다. 돌을 두부처럼 쪼개버리는 그의 수공은 절정고수도 한 수 양보할 만큼 패도적이었다.
과묵한 것인지 아니면 벙어리인지 모르지만, 실내에 난입한 복면인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결국 맨 바깥쪽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기세를 올리며 성큼성큼 다가가서 복면인의 어깨를 잡았다.
복면인이 어깨가 잡힐 때까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더욱 사납게 변했다.
두 사내가 복면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며 말했다.
“어디 달밤에 먼지 나게 맞아보자.”
“한 대라도 덜 맞으려면 순순히 따라와라.”
난입한 복면인이 한 수 있을 줄 알고 긴장했었다. 그런데 반항 한 번 못 하고 어깨를 잡혀서 끌려 나가자 관심이 시들해졌다.
쇄비수 문인악이 복면인에게 관심을 끊고 말했다.
“저놈은 알아서 처리하라 하고 우리는 회의를 마저 하지요”
다시 회의를 시작하려 할 때에 밖에서 무언가 투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다시 복면인이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회의를 시작도 못 하고 멀뚱멀뚱 복면인만 바라보았다.
“함께 간 애들은 어디 가고 네놈만 들어오는 것이냐?”
보통은 질질 끌려서 들어와야 정상이다.
그런데 끌려 나간 복면인이 멀쩡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복면인을 끌고 나간 부하들이 어찌 되었는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거 한 수 있는 친구로군.”
방주와 부방주는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스르릉.
그러고는 인상을 있는 대로 긁었다.
“요거 귀여운 놈이 들어왔네.”
“이유가 무엇이든 곱게 돌아갈 수는 없을 거다.”
“지금이라도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끌끌.”
복면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런 복면인이 못마땅했는지, 맨 앞에 있던 덩치 좋은 사내가 주먹을 휘둘렀다.
거력신패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녔지만, 겨우 이류에 든 자였다. 그래도 그가 펼친 나한권은 제법 매서웠다.
후웅.
턱.
거력신패의 주먹이 허공에 딱 멈췄다.
덩치로 보나 기세로 보나 거력신패가 월등했건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복면인이 거력신패의 주먹을 감싸 쥐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모습이었고, 잡힌 주먹을 빼내려는 거력신패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복면인이 감싸 쥔 주먹을 살짝 튕겼다.
거력신패의 몸이 허공에 살짝 뜨더니 바닥에 철퍼덕 나뒹굴었다.
콰당!
“이것 봐라?”
“장난 아닌데? 씨발, 쳐!”
앉아 있던 자들이 일어나서 일제히 복면인을 공격했다.
날카로운 병장기가 허공을 수놓으며 번쩍거렸다.
일류 무인이라도 피하기 힘들 만큼 완벽한 공격이었다.
퍼버버버벅.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한데 엉킨 자들이 일순간 그대로 멈췄다.
어떻게 움직였는지도 몰랐다. 눈 한 번 깜박일 시간도 안 걸린 것 같았다.
복면인을 공격했던 사내들이 일제히 허물어지며 바닥에 몸을 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쇄비수 문인악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새로운 식구가 들어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군.”
팟!
그는 곧장 탁자를 차며 경공을 펼쳤다. 그러고는 공중에서 몸을 눕히고 쌍장을 휘둘렀다.
허공을 찢어발기는 강맹한 공격이었다.
복면인은 움직이지 않고 한 손을 이용해서 문인악의 쌍장을 맞받아쳤다.
펑!
둘의 손이 부딪친 직후, 문인악이 허공에서 한 바퀴 회전하며 양발로 복면인의 가슴을 노렸다.
펑!
복면인의 손이 문인악의 양발을 쳐냈다.
문인악은 또다시 허공에서 몸을 회전시키며 바닥에 내려섰다.
그리고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복면인의 품으로 몸을 날렸다.
팟.
복면인은 몸을 뒤로 젖혀서 문인악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몸 위로 날아가는 문인악의 배를 올려 찼다.
퍽!
새우처럼 몸이 접힌 문인악의 몸이 뒤쪽으로 날아가서 문을 박살 냈다.
복면인은 방 안을 쓰윽, 둘러보았다.
모두가 당황한 듯 움직이지 못했다.
“네놈은 누구냐?”
누군가 복면인에게 물었다. 그러나 복면인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중앙에 앉아 있던 흑검방 방주, 흑무검(黑武劍) 장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면인의 실력이 가늠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길보다 흉이 많을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바로 꼬리를 내릴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개봉에서 한 가닥 하는 흑검방 아닌가.
“어젯밤 꿈자리가 사납더니, 저승사자가 왔군.”
흑검방 방주는 복면인을 향해서 터벅터벅 걸어갔다.
어려서부터 거지 굴을 전전하다가 흑도에 들어선 그였다.
해본 일보다 안 해본 일을 찾는 게 더 쉬울 만큼 밑바닥부터 올라온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상대가 좋지 않았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는 흑검방주의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복면인의 신형이 앞으로 쭉 치고 나갔다.
흑검방 방주의 두 눈이 휘둥그레짐과 동시에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퍽.
우당탕.
흑검방주의 몸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졌다.
두 눈만 깜박거리던 여섯 사내가 각자의 병장기를 치켜들고 복면인을 공격했다.
커다란 도끼가 복면인의 머리를 노리고 힘차게 휘둘러졌다.
길쭉한 창날이 복면인의 옆구리를 향해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다른 네 사람도 공격에 가담했다.
그때 복면인의 손이 스르르 움직였다.
반룡장(潘龍掌)
용이 회오리치듯이 공격하는 장법이 펼쳐졌다.
허공에 잔상을 남기며 한 바퀴 휘저어진 손바닥은 일순간 확 커지며 공격하는 사내들의 몸을 덮쳤다.
우지직. 쾅쾅.
병장기가 부서지며 사내들의 몸이 사방으로 튕겨나갔다.
복면인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대전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멀쩡한 집기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거나 크게 다친 이는 없었다.
복면인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서 그나마 다리가 멀쩡한 의자를 바로 세우고 털썩 앉았다.
“그만 끙끙거리고 모여라.”
복면인에게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내공을 이용해서 음성변조를 했다는 티가 역력했다.
흑검방 간부들은 몸을 일으켜서 복면인 앞으로 모였다.
어깨를 움츠리고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틈만 보이면 당장 달려들 자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함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절대 강자.
그들에게는 복면인이 그렇게 보였다.
복면인이 모인 자들에게 한마디 했다.
“눈에서 힘 빼.”
희번덕거리는 사내들의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내의 손이 허공을 휘갈겼다.
슈슈슈슉.
퍼벅.
앞에 있던 두 복면인의 반룡장에 맞고 다시 바닥을 굴렀다.
그나마 큰 충격은 없는지 벌떡 일어나서 다시 섰다.
“내가 왜 왔는지 아는 분?”
복면인의 질문에 사내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개 패듯이 패고는 뭐? 왜 왔는지 아냐고?
정말 웃기는 새끼였다.
그런데 방주인 흑검무 장준이 입을 열었다.
“시키실 일이 있으신지요.”
복면까지 쓰고 난입해서 절대적인 힘을 보여주었다. 뭔가 시킬 일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것도 자신이 했다고 알려지면 안 되는 더러운 일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복면인이 말했다.
“맞아. 시킬 일이 있다.”
장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밖에서 부하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눈치 빠른 문인악이 밖을 향해 호통 쳤다.
“아무 일도 아니니 돌아가서 주위를 철저하게 경계해라!”
몰려오던 자들이 되돌아간다.
그제야 복면인이 한쪽으로 고개를 젖히며 차갑게 말했다.
“너희들이 해줘야 할 일이 있다.”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장사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고, 말씀만 하십쇼.”
기다렸다는 듯 장준과 문인악이 대답했다.
어차피 안 들어 줬다가는 줄초상 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최대한 협조해서 도움을 주는 게 나았다.
잘하면 떡고물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
“마음에 드는군. 혁련장이라고 알지?”
“예.”
빠드득.
방주의 입에서 대답과 동시에 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에 맺힌 것이 많은 듯했다.
“그놈들이 자꾸 눈에 거슬려서 그러는데, 시키는 대로 한번 움직여줄 테냐?”
“물론입니다.”
방주는 일단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색이었다.
“놈들보다 실력이 떨어져서 불안한가 보군.”
“아, 아닙니다.”
방주는 정곡을 찔렸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복면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내들이 움찔하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사람을 보낼 것이니 그들과 함께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다른 이들을 보내준다면 해볼 만했다.
더군다나 복면인의 이어지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말만 잘 듣는다면 너희들이 얻는 것도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목숨만 건져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얻는 것까지 있다면 무조건 이득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복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휭하니 바람처럼 사라졌다.
흑검방 간부들은 복면인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서 꾸벅 절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허리를 숙인 채 한참 서 있던 사내들이 눈치를 살피며 허리를 폈다.
“갔냐?”
“네, 갔습니다요.”
“아이고 죽겠네.”
복면인에게 두들겨 맞은 자들이 신음을 흘렸다.
긴장이 풀리자 고통이 몰려왔다.
다행히 크게 다치거나 뼈가 부러진 사람은 없었다.
장준이 부방주인 문인악을 보며 말했다.
“언제 올 것 같냐?”
“사흘 안에 오지 않겠습니까?”
“사흘이라……. 사흘만 기다리면 혁련장 놈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단 말이지?”
“예. 그래도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그렇겠지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 경우도 있으니까.”
장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나마 복면인이 마지막으로 한 말에 희망이 있었다.
‘지미, 설마 일 시켜먹고 칼밥을 주겠다는 건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