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29화
“어이쿠, 나 죽네.”
“야이, 거지새끼야! 어디서 동냥질이야!”
아니, 거지새끼가 동냥질하는 게 뭐 잘못됐다는 말인가?
벌떡 일어나서 개방도의 위엄을 보여주려는데 염악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
눈이 돌아간 걸 보니 오늘 여럿 초상 치르게 생겼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조금 전 자신을 걷어찬 인간도 염악인 듯했다.
“X벌,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카악, 퉤!”
취개는 걸쭉하게 침을 뱉었다.
그렇다고 염악에게 덤비지는 않았다. 그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뒷걸음질하는 게 다였다.
염악은 취개를 노려보다가 멀뚱히 서 있는 청운에게 말했다.
“주인 계쇼?”
“내가 주인이네. 동냥 말고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청운은 거지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이곳 개봉에서 거지들이 어떤 힘을 지녔는지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눈앞의 거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일전에는 여러 차례 마주하기도 했었다.
“당신이 황실에서 나온 분이오?”
“…….”
청운은 말없이 웃음 지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이미 정체가 탄로 났다는 말이었다. 자신의 신분까지는 모르겠지만.
카악, 퉤!
염악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청운이 관리라는 것을 알지만 비루먹은 개새끼처럼 꼬리를 말 수는 없었다. 최소한 개방 방주라면 웬만한 관리들보다 권력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속에 있는 말을 걸쭉하게 했다.
“거 웬만하면 살살 합시다. 어디 남의 집 안방에서 적선도 없이 활개를 치고 다니시오?”
“활개라…. 우리가 개방에 피해를 준 일은 없는 것 같은데.”
“허허, 이 양반 이거, 세상 물정 모르네.”
염악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청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젊은 놈이 관리라고 삐딱하게 나오는 것 같아서 배알이 뒤틀렸다.
“어이, 이 양반아. 우리가 아무리 거지새끼들이라지만 그러면 안 되지. 그것도 천하 개방의 안방에서 활동하려면 말이…….”
“이거면 되겠나?”
청운은 불쑥 방주의 말을 끊고 눈앞에 전표를 꺼내서 흔들었다.
살랑살랑 염악의 눈앞에서 전표가 왔다 갔다 했다.
염악의 머리도 흔들리는 전표에 맞춰서 흔들렸다.
이미 두 눈에서 힘은 빠진 뒤였다.
“거, 그 뭣이냐……. 그거 얼마요?”
“은자 백 냥.”
“흠…….”
순간 염악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금액이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이대로 전표를 받고 물러서도 되고, 조금 더 강짜를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받을 거라면…….’
막 염악이 부족하다고 말을 하려는데, 청운이 전표를 흔들던 손을 내리며 한마디 했다.
“싫으면 말고.”
덥석.
“싫기는, 충분해! 충분하고말고. 내가 개방 방주야! 이거면 충분해.”
염악은 청운의 손에서 전표를 빼앗듯이 낚아챘다.
청운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언제 찾아오게. 내 기다릴 것이니.”
청운의 말에 염악은 힐끔 청운을 보더니, 대답 대신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 어디서 봤소?”
“글쎄, 초면인 것 같소만.”
“이상하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염악 역시 청운을 알고 있었다.
천하제일기재로 소문난 청운을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같은 개봉부였으니 여러 차례 마주했었다.
그러나 청운의 달라진 모습을 알아보지 못했다. 근골부터 얼굴 형태까지 바뀌었으니 몰라보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염악도 귀찮은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흘리듯이 말했다.
“뭐, 좋수다. 그건 그렇고… 혁련장 말이오. 그렇게 대놓고 감시하면 그들이 알아차릴 거요. 차라리 우리에게 의뢰하시오.”
“생각해보겠네.”
“싸게 해줄 테니 잘 생각해보시구려. 그동안에는 청운 공자 때문인 것 같아서 내가 모른 척하고 도와줬는데… 놈들이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요.”
“그런가?”
“아니, 이 양반이, 개방 방주가 얘기하는데…. 안 믿으려면 마시구려.”
염악은 말을 하면서 연신 청운의 표정을 살폈다. 이런저런 질문과 답을 하면서 황실에서 무슨 일로 왔는지 살폈다.
그러나 청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쩝.”
염악은 입맛을 다셨다.
힘으로 하자니 무언가 꺼림칙했다.
백면서생같이 생긴 청운이건만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몸이 절로 숙여지는 것이 숨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 오늘 불쑥 찾아온 이유는 풍운장의 주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황실에서 보낸 관리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그가 무슨 이유로 이곳에서 이러는지도 알아볼 작정이었다.
자신은 천하 개방의 방주고, 이곳 개봉은 자신들의 안방 아닌가 말이다.
물론 무슨 일 때문에 온 것인지 대충 짐작은 갔다. 그래도 확인이 필요했다.
‘이놈, 쉽지 않네.’
결국 청운이 예사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 알게 되었다.
볼일을 봤으니 더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개 값도 백 냥이나 받았으니 오늘은 푸짐하게 먹을 수 있으리라.
“아무튼 가오.”
“잘 가시게.”
청운은 휘적거리면서 돌아가는 개방 방주와 취개를 바라보았다.
곁에서 혈황이 흥미로운 시선으로 말했다.
[저놈 저거, 보통 놈 아니구나.]
“예, 예전부터 기재라고 소문이 자자했었습니다. 양자로 들이겠다는 사람들도 많았었다고 합니다.”
[허허. 젊은 나이에 개방 방주를 하는 것을 보면 시끄러웠겠어.]
혈황의 말대로였다. 개방의 방주는 보통 사오십 대에 방주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염악은 이제 삼십 대 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만큼 뛰어나기에 장로들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개방에서 이미 금의위와 동창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것 같습니다.”
[개방이 모를 리가 없지.]
“제 정체를 알려고 얼굴을 그려서 황도로 보낼지도 모릅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활동하고 있는 금의위들의 얼굴도 그려서 함께 알아볼지도 모른다.
“당장 금의위들을 불러들여야겠습니다.”
* * *
개방 방주가 다녀갔지만, 개봉 어디에도 금의위나 황실에 대한 소문은 없었다.
풍운장 대문에서 개방 방주를 만난 것도 소문나지 않았다.
모두 개방에서 입을 닫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청운은 금의위를 모두 풍운장으로 불러들였다.
풍운장에 백 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지만 기거할 방은 많았다.
규모가 작지 않은 장원이기에 백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후 청운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스승에게 받은 청마룡을 혈황과 함께 연구하고 무공수련을 하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금의위 역시 수련에 집중했다.
청운은 금의위들의 수련을 보며 하루에 한 시진씩 도움을 줬다. 그들의 무공이 깊어질수록 자신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그 와중에도 금의위 몇 명에게 다른 명령을 내렸다.
“개봉성 내의 세력과 인근의 세력을 알아오게.”
“예, 대인!”
스승의 조언대로 혁련장을 압박할 세력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반나절이 되지 않아서 천호장 석덕조가 정보를 가져왔다.
“대인. 개봉 인근에 제법 큰 세력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혁련장과 사이가 안 좋은 곳도 몇 군데 있습니다.”
석덕조는 조사 내용이 적힌 보고서를 청운에게 건넸다.
청운은 보고서를 살펴보았다.
보고서에는 여섯 개의 세력이 적혀 있었다. 그들의 인원과 규모도 대략적으로 파악된 상태였다.
상단 세 곳과 사파 두 곳. 거기다 정파도 한 곳 있었다.
만상보(萬商堡)
신화상회(神花商會)
유화상단(劉華商團)
흑검방(黑劍幇)
적건방(赤巾幇)
은현세가(殷賢世家)
석덕조는 청운이 보고서를 살필 때 말을 건넸다.
“그들 모두 혁련장 때문에 근래에 손해를 입은 곳입니다. 상단은 무력에서 밀리고, 사파 두 곳은 혁련세가라는 후광에 밀리고 있습니다.”
“정파인 은현세가는 어떤가?”
“그들은 혁련장과 시비가 붙어서 싸움이 있었는데, 여럿이 죽고 수십 명이 크게 다쳤다고 합니다. 자룡궁이라는 곳에서 때마침 중재해서 더 악화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청운은 보고서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자룡궁은?”
“무림에서 제법 알려진 정파입니다. 안휘성 북쪽 끝자락에 있는 탕산에 총단이 있습지요. 궁주인 탕마대협 구호량은 절정의 무인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독문무공인 현류십삼검(玄流十三劍)은 강호일절로 분류되고 있습니다.”
자룡궁의 궁주인 탕마대협(蕩魔大俠) 구호량.
그는 사마외도를 극도로 싫어해서,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한 사파의 인물만 백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청운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혁련장과 은현세가, 그리고 자룡궁이 어떤 관계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했다.
“안휘성 치소에 연락하게. 자룡궁에 대해서 알아보고 사람을 붙이라 이르게.”
“예, 대인.”
청운은 품에서 진무사 신분을 나타내는 황금패를 꺼냈다.
황제가 직접 임명하고 중원 전역의 치소에서 병사를 마음껏 쓸 수 있는 황금패였다.
보통 진무사는 임무를 맡은 지역의 금의위들을 동원하거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하남성이 아닌 안휘성의 치소에 직접적으로 명령을 내릴 권한은 없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청운은 금의위 대영반이 임명한 진무사와 다른 권력을 쥐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임명했기에 그에게는 대영반에 버금가는 권한이 있는 것이다.
청운이 그 무소불위의 권력을 꺼내 들었다.
“석 천호장,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니 실력 있는 자들로 가려 뽑으라 하게, 만일 일이 잘못되면 각오하라고 단단히 이르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석덕조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청운은 생각에 잠겼다.
‘작은 것 하나도 놓치면 안 돼.’
혁련장과 관련된 일이라면 하나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더욱이 자신을 해치려 한 사건은 지난 일 년간 혁련장에서 벌인 일 가운데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외부의 도움을 받은 유일한 사건이었다.
청운은 다시 보고서를 살폈다.
‘흑검방과 적건방이 적격이긴 한데…….’
정파로 분류되는 혁련장과 싸움을 붙이려면 사파가 나았다.
시비를 걸고 막무가내로 으름장을 놓기에는 사파가 적격이었다.
규모나 힘을 생각한다면야 은현세가가 낫겠지만, 그들은 같은 정파였다. 게다가 다른 이들이 한번 개입을 했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흠…….”
청운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자 지켜보던 혈황이 입을 열었다.
[뭘 그리 고민하느냐?]
“흑검방과 적건방 중에서 누가 더 좋을지 생각 중이었습니다.”
[뭐가 문제인데?]
“흑검방은 적건방에 비해서 실력은 떨어지는데 근성이 있어서 악바리로 소문난 놈들입니다. 적건방은 규모는 있는데, 하는 행실이 너무 안 좋습니다.”
청운의 말에 혈황은 피식 웃음 지었다.
[난 또 뭐라고. 별거 아니지 않느냐.]
“네?”
[쯧쯧. 네 녀석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는 알겠다마는, 네가 지금 부하들 만드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놈들 행실이 어떻건, 실력이 있건 없건,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그냥 혁련장 놈들 견제하고, 숨어 있는 놈들을 기어 나오게만 만들면 되지 않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청운은 못내 껄끄러웠다.
하나는 실력이 부족했고, 다른 하나는 실력은 되는데 평판이 너무 안 좋았다.
그렇다고 그냥 쓰자니 어딘지 찜찜했다.
그런 청운을 보며 혈황이 다시 말을 했다.
[쯧쯧. 하나만 고르지 말고 그냥 둘 다 써라.]
“둘 다 쓰다니요?”
아는 사람이 많을수록 정보가 샐 가능성도 높아진다.
더구나 그들은 사파 아닌가. 이익에 목숨을 거는 자들.
그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면 이제까지의 노력이 수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청운의 고민을 아는지 혈황이 말했다.
[너는 흑도가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구나.]
“…….”
[흑도는 말이다. 힘으로 모든 게 결정되는 단순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