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28화 (28/257)

# 28

28화

개봉에 온 지 열흘이 흘렀다.

혁련장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음에도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군.’

복수를 생각하면 당장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놈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자칫하면 그자 때문에 일이 틀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혁련장 사람들을 납치해서 고문할 수도 없고.’

더욱이 요즘 혁련장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이었다.

놈들에게 복수를 철저히 하려면 그 부분을 확실하게 밝혀야 할 듯했다.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네요.”

[정 안 되면 쳐들어가는 수밖에.]

“어쩌면 그 방법이 가장 나을 수도 있겠지요.”

청운은 답답했다.

혈황 역시 답답한 건 마찬가지였다.

생각 같아서는 모조리 목을 비틀고 싶었다. 혁련휘가 말한 숙부라는 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혁령장주의 목을 비틀거나 협박을 하면 손쉽게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자신 생각과 청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청운은 지나치게 신중했다.

그렇다고 결단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일단 결정을 내리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일처리를 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믿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만.

혈황은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학문만 익혔던 네가 권모술수를 얼마나 알겠느냐. 너무 자책하지 말고…… 아! 그래.]

혈황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네 녀석 스승을 찾아가서 상의를 해보지 그러느냐. 안 찾아뵌 지도 며칠 되었으니.]

그가 본 위진천은 정말 사악한(?) 자였다.

“그게 좋겠네요. 스승님이시라면 좋은 방책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운 역시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밤이 되면 스승인 위진천을 찾아뵙기로 했다.

* * *

달빛이 구름에 잠겨서 어두운 밤.

천향서원의 내원 깊숙이 자리한 학현각(學炫覺)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천향서원의 주인이며 청운의 스승인 묘청 선생 위진천의 집무실이었다.

그 안에서는 해시 초에 나타난 청운이 스승 위진천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청운은 스승 위진천에게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위진천은 일단 찻잔을 들어서 목을 축였다.

그러고는 찻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고 청운을 보며 말했다.

“어렵지 않은 일이구나.”

“…….”

“예로부터 이이제이야말로 상책 중 상책이라 했다.”

청운은 스승을 봤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자신의 힘은 쓰지 않고 다른 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또 다른 적국을 제어한다는 말이었다.

“다른 자들을 끌어들여서 혁련장을 압박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청운은 머리가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놈들의 세력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으니 불만을 가진 자들이 많을 것이다.”

“예, 보고에 의하면 혁련장의 팽창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고, 그들에게 밀려서 규모가 작아진 곳도 여럿입니다.”

“그들을 활용하면 방법이 생길 것이다.”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혁련장을 압박하면 숨겨진 힘이 드러나겠군요.”

혈황도 옳거니!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지! 어떤 형태로든 놈들은 힘을 드러낼 거다. 압박을 강하게 하면 강하게 할수록 더 확실하게.]

청운은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동안 그저 지켜보기만 할 것이 아니었는데.

‘진작에 스승님께 상의할 걸 그랬군.’

역시 스승님이시다.

청운이 흐뭇해할 때, 위진천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나랑 갈 곳이 있다. 일어나라.”

“예, 스승님.”

청운은 방갓을 눌러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은 밤이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지도 몰랐다.

* * *

천향서원의 주인이 집무를 보는 공식적인 전각은 천향각이다.

그런데 지금의 주인인 묘청 선생 위진천이 사용하지 않아서 비어 있는 상태였다.

그 천향각의 내부에 불이 밝혀졌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는데도 청소를 꾸준히 했는지 깨끗했다.

“일주일 후에는 이곳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다.”

“알겠습니다. 다음번에 찾아뵐 때는 이곳으로 오겠습니다.”

“그래.”

위진천은 서가가 늘어서 있는 한쪽 벽을 향해 가더니, 오른쪽 끝에서 위쪽에 있는 책을 살짝 당겼다.

철컥, 그그긍,

‘기관?’

[호. 별것이 다 있구나.]

청운과 혈황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기관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스승 위진천이 책을 당기자 곁에 있는 책장 하나가 뒤로 밀려들어갔다.

위진천은 안으로 들어가며 청운에게 손짓했다. 따라오라는 말이었다.

위진천과 청운이 안으로 들어서자 책장은 다시 원상태가 되었다.

통로는 지하로 연결되어 있었다.

건물의 지하에 비밀시설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계단을 따라서 내려서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수십 개의 서가가 질서정연하게 줄지어 있었다.

위진천은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서 중앙에 마련되어 있는 탁자에 앉았다.

“앉아라.”

“예, 스승님,”

“이곳이 뭐 하는 곳인지 아느냐?”

“비밀문서를 보관하거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는 곳인지요?”

“맞다. 이곳에 있는 책은 세상에 남겨진 것이 얼마 안 되는 귀한 서적들이지.”

위진천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귀하지 않은 책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 숫자가 얼마 없는 귀한 책들이 있단다. 오랜 세월 천향서원에서 구입하고 모은 책들이라고 보면 된다.”

황궁무고에 절대 뒤지지 않는 규모였다. 물론 무공서적으로 이뤄진 황궁무고와는 달랐지만.

“그런데 스승님, 이곳에는 어찌…?”

청운은 궁금했다.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이유가.

“천하의 서적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무림인들의 비급도 간간히 들어온단다.”

“네?”

“왜 놀라는 것이냐? 무공서적도 책이지 않느냐.”

맞는 말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귀한 책이겠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저 책일 뿐이었다.

“내 너를 이곳에 데려온 이유는 서적을 하나 보여주기 위함이다.”

위진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곳으로 가더니 상자를 들고 왔다.

상자에는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위진천이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상자를 청운 앞으로 밀었다.

“열어봐라.”

“네, 스승님.”

철컥.

청운은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책이 한 권 들어 있었다.

청운은 조심스럽게 책을 집어 들고 표지를 봤다.

“헉.”

절로 헛바람이 나왔다.

고개를 번쩍 쳐든 그는 위진천을 돌아보았다.

위진천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는 책이더냐?”

“예, 제가 찾던 책이옵니다.”

“그래? 그거 참 잘됐구나.”

청운은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았다.

‘구룡마경…….’

또 한 권의 구룡마경이 눈앞에 있었다.

혈황 역시 비급을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청마룡이군.]

겉표지의 오른편 하단에 청마룡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청운이 다시 스승을 보며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스승님, 그런데 이 책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이옵니까?”

“오래전부터 천향서원에서 간직하고 있는 책이다.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삼백 년이 조금 안 되었을 것이다. 역대 원주님 중 한 분이 기인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분이 비급을 전하며 천하를 피로 물들일 수 있으니 태우라며 부탁을 했었다고 하더구나.”

“그런데 안 태웠군요.”

“당연한 이야기 아니더냐? 학사에게 책을 태우라고 맡기면 태우겠느냐? 하하하.”

평생을 책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학사다. 스승이며 가족이고, 동무인 책을 태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래도 책이 범상치 않음을 알기에 따로 보관을 했단다. 천하를 피로 물들일 만한 흉물이라니 남에게 알릴 수도 없는 일이고.”

역대 천향서원의 주인에게만 비밀이 전해져 내려왔다. 행여 다른 이의 귀에 들어간다면 혈겁이 일어날 수 있기에 꼭꼭 숨겼었다.

“스승님. 그런데 어찌 제게 이 비급을 보여주시는지요?”

“네 녀석은 가끔 보면 맹할 때가 있다. 그거 알고 있느냐?”

“……송구하옵니다.”

총명함을 넘어섰던 청운이었지만 약삭빠르지는 않았다.

좋게 말하면 과묵한 거고, 안 좋게 말하면 눈치가 없었다.

“네가 무림에 발을 디뎠으니 스승으로서 네게 도움을 줘야 하지 않겠느냐?”

“감사합니다. 그런데 혈겁이 일어날 수도 있는 비급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혈겁이라……. 청운아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것은 많단다. 네가 차고 있는 검이나 이 비급이나 무엇이 다르더냐? 난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위진천은 잠시 말을 끊더니 청운을 보았다.

여전히 두 눈에 정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절로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비급도 검도 모두 도구일 뿐이다. 그러니 그 도구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혈겁이 일 수도 있고, 사람을 구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

청운은 말없이 머리를 조아렸다.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었다.

곁에 있던 혈황 역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위진천은 청운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을 이었다.

“내 너를 믿고 있음이니라.”

“예, 스승님. 결코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그럼 되었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청운은 청마룡을 내려다보았다.

뜻하지 않게 기연을 얻었다.

구룡마경의 청마룡이 얼마나 뛰어난 무공인지는 아직 모른다. 그러나 혈황과 함께 찾아보려고 했었던 비급 아닌가.

세상을 뒤흔들 수 있다는 그 비급이 세 권이나 자신에게 들어왔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청운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늘이 뭘 바라는지는 몰라도.

* * *

서문 부촌의 한 장원 앞에 거지 두 명이 서 있었다.

풍운장이란 현판이 커다랗게 걸려 있는 장원이었다.

문을 지키는 자들은 따로 없었고, 문 역시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더벅머리를 하고 있는 거지가 곁에 있는 다른 거지에게 말했다.

“여기냐?”

“예, 방주님.”

그 거지들은 천하 거지들의 왕초인 개방 방주 광견신개 염악과 취개였다.

취개는 염악의 스승인 구지신개의 제자로 염악에게는 사제이기도 했다.

“두드려.”

“근데, 진짜 만나시려고요?”

취개는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염악의 두 눈에 짜증이 가득 담겨 있음을 봤다.

옛날 같았으면 당장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모조리 개 패듯이 패고 천천히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방주가 된 뒤로 참을성이 늘었다. 참 희한한 일이었다.

거기다 아직 이성이 있는지 자신의 물음에 대꾸를 해줬다.

“어. 더는 못 참아.”

“저기… 다시 한번 생각 하…… 알았어요! 알았어!”

취개는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방주 때문에 할 말도 다하지 못하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여야 했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그날 다 죽는 것이다.

결국, 대문으로 가서 발로 대문을 깡깡 걷어찼다.

“어이! 아무도 없어!”

한참을 두들기니 웬 젊은이가 한 명 나왔다.

청운이었다.

“누군가?”

“보면 모르오? 거지지.”

“그렇군. 적선 때문이라면 잠시 기다리게. 안에서 먹을 것을 내어올 것이니.”

“감사합니다.”

취개는 넙죽 절까지 했다.

오늘 횡재했다.

보통 이곳 부촌은 거지들이 동냥해도 정문에서 하지 않았다.

있는 것들은 언제나 미관상 좋지 않다고 거지들이 정문으로 오는 것을 싫어했다. 때문에 뒷문으로 가서 기다리면 하인들이 알아서 먹을 것을 줬다.

그런데 오늘은 정문에서 동냥을 받게 되었으니 무척이나 기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퍽!

취개의 엉덩이에서 불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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