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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마존-26화 (26/257)

# 26

26화

청운은 의아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서로를 의심하는 것보다 힘을 합쳐야 할 때였다.

‘나중에 진 소저에게 말해야겠군.’

그러면 알아서 처리하지 않겠는가.

“고마워요, 이 공자.”

진설란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강호풍과 남궁룡, 제갈해미도 함께 왔는데,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

“밥 얻어먹은 값은 해야지요.”

청운은 가볍게 말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상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신음하는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쟁자수와 짐꾼들도 나서서 시신을 묻을 수 있게 땅을 파고 주변을 정리했다.

“피해가 크네요. 안양에서 전열을 정비한 다음에 출발해야 할 거 같아요.”

“놈들이 무슨 물건을 노리는 것 같던데… 혹시 뭔지 아십니까?”

“예? 글쎄요. 저는 하북의 상단이 맡긴 물건을 장안까지 호위하는 걸로만 알고 있는데요.”

절정고수가 포함된 도적들이다. 평범한 상단의 물건을 노리고 온 자들이 아니다.

그런데 진설란도 자세한 것은 모르는 듯했다.

청운도 더 깊이 묻지는 않았다. 이 일에 관여해서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표행은 진설란의 말대로 안양에서 하루를 보내며 전열을 정비하기로 했다.

헤어지기에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청운도 더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서 혼자 개봉으로 향했다.

◈ ◈ ◈

개봉은 황하 근처의 평야에 위치해 있었다.

서안(西安), 낙양(洛陽)과 더불어 중원의 삼대 고도 중 하나로, 전국시대의 위(魏)나라를 비롯해 양(梁), 북송(北宋), 금(金) 등 여러 왕조의 도읍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위세가 크게 줄었지만, 여전히 황하로 이어진 수많은 수로로 인해서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개봉부의 서남부 쪽에는 여러 장원이 모여 있는 장원부가 있었다.

이 장원부에는 예로부터 개봉부의 유력가와 선비들이 모여 살았다.

돈만 많아서는 그곳에 장원을 매입할 수 없었다. 학식 높은 학사들이 돈 많은 장사치와 거리를 뒀기 때문이었다.

반면 부호들은 학식이 높은 이들과 가까이 지내기를 원했다. 그러다 보니 부호들이 자연스럽게 장원부가 있는 서문으로 몰려들었다.

특히 이곳 장원부에는 유명한 서원이 존재했다. 천하십대서원 중 하나인 천향서원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깊은 시각.

천향서원이 내려다보이는 근처의 높은 전각 위에 한 인영이 홀연히 나타났다.

인형은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야조가 되어서 홀연히 사라졌다.

천향서원의 내원 깊숙이 자리한 곳에 있는 학현각은 현 천향서원 주인인 묘청 선생(妙靑先生) 위진천의 집무실이었다.

그곳은 그가 원장이 되기 전부터 사용하던 장소였다.

본래 천향서원의 주인은 천향각으로 거처를 옮겨야 하나, 묘청 선생은 번거롭다며 여전히 그곳에서 집무를 봤다.

하지만 실제 이유는 그의 제자인 삼원 이청운 때문이었다.

“제자가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데 스승이 자리를 지켜야지 않겠는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린 애제자 때문에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사람들을 시켜서 천하를 뒤지고 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꽝!

“어디에 있는 것이더냐. 어디에!”

가지런한 수염이 멋들어지게 난 중년 사내가 탁자를 손으로 내려치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바로 천향서원의 원주인 묘청 선생 위진천(韋振天)이었다.

중년으로 보이는 그의 나이가 환갑을 지났다면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의 별호가 묘청 선생(妙靑先生)이라 불리는 이유였다.

“죽었건 살았건, 내게 기별만 해라. 내 황제 폐하를 움직여서라도 네 어려움을 풀어줄 것이니.”

움켜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

탁자 위에는 청운을 봤다는 내용의 서신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확인해보니 모두 거짓이었다.

사라진 지 일 년이 훌쩍 넘어서 이제는 그의 행방을 찾기가 쉽지 않겠지만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황궁에 알아보니 수행하던 금의위들도 함께 실종되었다고 했다. 최악의 경우 시체가 된 제자를 볼지도 몰랐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내 기필코 너를 찾을 것이다.”

그는 애제자가 살아 있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휘이잉.

한 줄기 바람이 창문을 통해서 흘러들어왔다.

방 안을 밝히던 촛불이 흔들리며 일렁거렸다.

그리고 눈앞에 웬 사내가 서 있었다.

“누구신가?”

위진천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나타난 자는 이제 약관이 넘었을까 싶은 사내였다.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바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내가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위지천에게 큰절을 하는 것 아닌가.

위진천은 가만히 사내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누구이기에 나에게 계수지례를 한단 말인가?’

사내의 행동은 구배지례(九拜之禮)중 삼배지례(三拜之禮)에 속하는 계수(稽首)라는 예법이었다.

군신, 부모, 사제 사이에서 존장에게 예를 올릴 때의 격식인데, 낯선 사내가 그 예를 행하니 의아했다.

묵묵히 사내의 계수지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위진천은, 예를 마치고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는 사내를 보며 물었다.

“공자는 누구인데 내게 계수지례를 하는 것인가?”

사내는 그런 위진천을 보며 낮게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님…….”

눈이 한껏 커진 위진천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너, 너는…….”

늘 귀에 들려왔던 목소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어도 그만은 그 목소리를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마, 맙소사.”

위진천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청운에게 다가가서 감싸듯이 안았다.

“돌아왔구나. 내 너를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늘……. 이 미련한 스승이 너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청운아.”

“스승님.”

청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직 혁련가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야밤을 틈타 스승을 찾아왔다.

그는 스승을 만나도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스승이 더욱 가슴 아파 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위진천은 떨리는 손으로 청운의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의자에 앉혔다.

그러고는 청운이 진정하기를 기다리며 수많은 생각을 했다.

이윽고 청운이 눈물을 거두자, 위지천이 굳게 다문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위지천의 두 눈에서 광채가 일렁이며 형형한 빛을 뿌렸다.

천하 삼대 석학이라 칭송받은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제자를 앞에 두고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내 누가 되었든, 무슨 일이 되었든……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탁자 위에 올린 위진천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는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그에겐 천하를 희롱할 붓이 있고, 천향서원의 원장이라는 힘이 있었다.

“예, 스승님. 일이 어찌 된 것인가 하면…….”

청운은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소상하게 이야기했다.

황궁무고에 들어가서 무공을 익힌 것, 황제의 명령을 받고 진무사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전시를 치르기 전에 들었던 혁무천의 말까지.

단지, 혈황에 관한 부분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위진천은 습격을 받았다는 부분과 습격한 자의 정체를 듣고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허허. 그 짧은 시간 동안 인생이 바뀌는 파란만장한 삶을 겪었구나.”

위진천은 길게 탄식했다.

제자가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벌어졌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안하구나. 휘 녀석이 너를 못살게 군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늘…… 조치하지 못한 내 잘못이 크구나.”

“아닙니다. 휘는 신기서생(神機書生) 님 문하였습니다. 당시에 스승님이라 할지라도 막을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천향서원은 여러 스승을 두고 학문을 가르쳤다.

학문 외적인 부분까지 살펴주는 주스승과 학문만을 배우는 부스승으로 나뉘었다.

청운의 주스승은 위진천이고, 혁련휘의 주스승은 신기서생 사마광도(司馬曠道)였다.

“아니다. 내 사마광도의 가문인 사마 가문의 위세에 밀려서 너를 지켜주지 못했구나.”

천향서원에는 천하에 위명이 쟁쟁한 학사들이 선생으로 있었다. 그중에는 천하에 이름 높은 제갈세가와 사마세가의 인물도 있었다.

청운이 어렸을 때는 스승 위진천의 영향력이 사마세가 출신인 사마광도를 따라가지 못했었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제자 이렇게 장성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스승님의 은공 덕입니다.”

“이해해주니 고맙구나.”

둘은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부분 청운의 신상과 앞으로의 일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런 일에는 신묘한 계책을 써야 한다. 일단 놈들이 쉽게 예상해서 대처하게끔 만들어라.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게끔 하는 게 이번 계책의 핵심이다. 그리고 함정을 파는 것이지. 예를 들어서…….”

위진천의 계책을 다 들은 이청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절묘한 생각이십니다.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도 있으니, 그 부분에서는 각별히 조심할 필요가 있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아! 그리고 개방을 이용하는 부분은 조심해야 한다. 이번 방주가 근래 보기 드문 미친개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구나.”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청운은 개방 방주의 별명을 듣고는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잘 있으려나?’

황도광견으로 이름을 날렸던 하북 팽가의 팽도천. 그리고 개방의 미친개.

둘이 붙는다면 누가 더 미친개처럼 보일까?

궁금했다.

[흐음…….]

혈황은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듣다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그러다 끝내는 둘의 흉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녀석이 누굴 닮았나 했더니, 제 스승을 닮았군. 악마 같은 놈들.]

* * *

개봉에는 천향서원 말고도 유명한 곳이 있다.

흔히 정파를 이야기할 때 구파일방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그중 구파는 구대문파를 가리키고 나머지 일방이 개방이다.

그 개방이 이곳 개봉부에 총본산을 두고 있었다.

개방의 총본산에 수십 명의 거지가 빙 둘러 앉아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한 삼십 대 거지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살점도 붙어 있지 않는 뼈를 뜯으며 말했다.

“요즘 개봉에 이상한 자들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들었나?”

“방주도 들으셨수?”

“헤헤, 이미 애들 시켜서 지켜보고 있습니다요.”

개방의 총본산이 있는 개봉이다 보니 거지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특히 외지인이 들어와서 자리를 잡거나 그들이 어떠한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곧장 위로 보고가 들어갔다.

예의 방주라는 거지가 비슷한 나이의 한 거지를 보더니 입 안에서 뼛조각을 뱉어내며 물었다.

“퉤! 서문은 별일 없어?”

“네, 딱히 이상한 일은 없습디다.”

방주의 질문에 호리병을 입에 물고 있던 취개라는 거지가 대답했다.

방주는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재차 확인했다.

“그래? 확실하지?”

“허참, 속고만 살았소?”

“어. 네놈이 술 처먹고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반대로 애들 보냈다가 흑도 애들한테 아주 작살났잖아.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기억 안 나?”

일주일 전에 동문 객잔에서 흑도들과 싸움이 있었다.

취개가 달려와서 싸움이 났다고 서문으로 가야 한다고 난리를 쳤었다. 자세하게 무슨 일인지 물었는데 이놈이 술에 취해서 횡설수설했었다.

결국 급하게 서문으로 달려갔지만 아무 일도 없었고, 동문 객잔 앞에서 벌어진 싸움으로 거지 여럿이 크게 다쳤었다.

취개는 머리를 극적이며 누런 이를 드러냈다.

“헤헤. 그 일은 제가 술에 취해 가지고…….”

휘익, 퍽!

“아이구! 거지새끼 죽네.”

방주가 뜯고 있던 뼈다귀가 취개의 머리를 때렸다.

취개는 죽겠다고 꽥꽥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었지만 다른 이들은 취개를 무시하며 방주를 보았다.

둘의 이런 모습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보고 있는 거지들을 향해서 방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것만 얘기해 봐.”

“예, 방주도 알겠지만, 일 년여 전에 천향서원의 이청운 학사가 금의위와 실종되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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