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22화
하북성 패주는 중원에서 황도로 가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 잡은 성이었다. 교통의 요지다 보니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성의 북문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검은 무복과 허리춤에 매어 있는 한 자루 청감검이 잘 어울리는 사내.
그는 황제의 밀명을 받고 황도를 나선 청운이었다.
청운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진천표국을 찾았다.
진천표국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대로를 따라서 걷다 보니 진천표국이라는 간판이 걸린 커다란 장원이 보였다.
‘하북성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졌다고 하더니, 규모가 제법 큰데?’
진천표국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수많은 수레가 오가는 모습을 보니 무척 바빠 보였다.
청운은 입구를 지키는 위사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이삼원이라는 사람이오. 이곳 셋째 아가씨인 진설란 소저를 찾아왔소.”
위사는 청운이 범상치 않은 자라는 걸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답했다.
“아가씨 손님이시군요. 안에 기별을 넣어드릴 테니 접객당에서 기다리십시오.”
청운은 또 다른 사내의 안내를 받아서 접객당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일각 후.
청운이 방에서 차를 따라서 마시는데 예의 위사가 찾아왔다.
“아가씨께서 누구신지 잘 기억이 안 나신다고 하십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하긴 일 년이 훌쩍 넘었으니 자신을 기억 못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웅표 표두님은 잘 계시오?”
“지금 상행을 떠나서 일주일은 있어야 돌아오실 겁니다.”
“하, 이런.”
청운은 미련이 없지 않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쩔 수 없군요. 지나는 길에 얼굴이나 뵙고 가려고 했는데.”
그러고는 사내를 따라서 접객당을 나섰다.
그가 넓은 마당을 지나는데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정문 위사가 이남일녀를 안내하고 있었다.
혈황이 그들을 보고 한마디 했다.
[제법 기초가 단단한 놈들이군.]
청운은 자신 또래 정도로 보이는 인물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무가의 후손들인지 모두가 병장기를 차고 있었다.
특히 선두에 선 사내의 기도가 대단했다. 백색 비단에 금실로 백호가 수놓인 옷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선두의 사내 역시, 우두커니 서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는 청운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것이 무언가 이상한 듯했다.
바로 뒤에서 걷고 있던 청색 무복의 사내가 선두의 사내에게 말했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몸이 균형 잡혀 있어서 내가 착각을 한 것 같군. 무공을 익혔다면 대단한 자일 것 같은데, 기도가 약한 걸 보니 무공을 깊이 익히지는 않은 것 같군.”
“저 친구 말씀입니까?”
정문위사가 손을 들어서 청운을 가리켰다.
선두의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청운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었다.
청운의 웃음 짓는 모습에 청색 무복을 입은 사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봐, 거기.”
청색 무복의 사내가 청운을 불렀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신경이 쓰였다.
청운은 우뚝 멈춰 서서 자신을 보고 있는 이남일녀에게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별것은 아니고, 방금 그 웃음, 우리를 향해서 웃은 건가?”
“그럴 리가요.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어서 웃음 지었습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청운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런 청운의 모습에 청색 무복 사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제법 예법을 아는 친구군. 좋네, 오해였다니 넘어가도록 하지.”
그렇게 막 일이 마무리될 때 안쪽에서 한 여인이 경공을 써서 장내에 내려섰다.
“무슨 일이에요?”
모두의 시선이 새롭게 나타난 여인에게 모였다.
진천표국의 셋째 딸 진설난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선두에 있는 사내였다.
“아 별거 아니야. 그보다 이렇게 보는 게 얼마 만이야. 사매, 몰라보게 예뻐졌는데?”
“쳇, 오라버니는 보자마자 설난이 칭찬부터 하시네.”
뒤쪽에 있던 묘령의 여인이 뾰로통하게 말했다.
진설난은 방긋 웃으며 이들의 인사를 받았다. 서로가 친한지 스스럼없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진설난이 청운을 보며 말했다.
“저를 찾아오신 분이신가요?”
“그렇소. 일 년 전에 인연이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청운의 말에 진설난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청운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잘생긴 청운의 모습을 기억 못 한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우리가 어디서 만났었죠?”
“폭포라고 하면 기억하시겠습니까?”
청운의 대답에 진설난의 두 눈이 커졌다. 일 년 전 폭포라면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다.
“아! 빨래!”
“하하. 기억하시는구려.”
진설난은 드디어 청운이 누구인지 기억해냈다.
당시 헤어질 때 무언가 아쉬움이 남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찾아오다니.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당시에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기억을 못 했네요.”
진설난은 청운을 요리조리 살폈다.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겉모습은 거칠고 투박해 보이는데, 두 눈에는 정기가 가득했다.
더구나 청운이 그때 일을 잊지 않고 찾아오니 기분이 좋아졌다.
진설난이 입가에 미소를 띠며 한마디 했다.
“요즘은 어떠세요? 요즘도 빨래를 손수 하시나요?”
“하하,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소.”
“아하. 그러시구나.”
진설난은 환하게 웃음 지었다. 장난인지 사실인지 모르지만, 유쾌한 사람이었다.
“이삼원이라고 하셨죠? 그거 본명이세요?”
“그게 중요한 일이오?”
“호호.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는군요.”
진설난과 청운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뒤쪽에서 지켜보던 이남일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진 사매가 저렇게 많이 웃는 것은 처음 보는데?”
“오라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왜? 응!”
묘령의 소녀가 보고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린 백색 무복의 사내는 깜짝 놀랐다. 청운을 죽일 듯이 바라보고 있는 청색 무복의 사내 때문이었다.
백색 무복의 사내는 청색 무복의 사내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정해라.
백색 무복의 사내가 보낸 전음을 들은 청색 무복의 사내는 정신을 수습하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다른 때는 진중한 녀석인데…….’
꼭 진설란과 관련된 일만 생기면 이성을 잃어버린다.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진설난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것처럼 청운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했다.
어느 정도 이야기를 주고받은 그녀가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쩐 일이신가요? 그때의 일을 사과하려고 오셨나요?”
“그것도 그것이지만, 마침 지나던 길에 화산파의 검을 구경해볼까 싶어서 왔소.”
진설난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문득 당시에 청운이 펼쳤던 기이한 검술이 떠올랐다. 분명히 사파의 검술 같았었다.
진설난은 고개를 끄덕였다.
“못 보여 드릴 것도 없죠. 잘하면 이번에야말로 당신이 정파인지 사파인지 알 수 있겠네요.”
“다시 말하지만, 난 정파 쪽이오.”
“호호호, 그건 확인해보면 알겠죠.”
진설난과 청운의 대화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뒤에 있던 백색 무복의 사내가 한 발 나서며 진설난을 보고 말했다.
“사매, 여기 이 미남자가 누구신지 우리에게도 소개해줘야지 않아?”
“아! 죄송해요.”
진설난은 ‘미남자’라는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청운은 뛰어난 미남이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드신 후에 소개해 드릴게요.”
“그래?”
“이 공자도 함께 가시죠.”
“알겠소.”
진설난은 이들을 데리고 장원의 안쪽으로 이동했다.
진천표국은 명성만큼 규모가 커서 수십 채의 건물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건물들 사이사이에는 인공 연못과 아름다운 정원들이 들어서 있었다.
표국에는 귀한 손님들이 오면 연회를 베푸는 곳이 따로 존재했다.
진설난은 청운과 다른 이들을 제법 큰 연못에 자리한 전각으로 안내했다.
이 층으로 된 전각에는 풍운각이라는 이름의 현판이 걸려 있었다.
진설란이 이끈 일행들은 전각 위로 올라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사매. 저분이 누구인지 언제 소개해 줄 거야?”
백색 무복의 사내가 진설난을 재촉했다. 다른 이들도 무척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진설난은 조금 난처했다. 그녀도 아직 청운에게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게 일 년 전에 인연이 있었어요. 표행을 하고 돌아오던 중에 뵌 분이신데, 화산의 검을 보고 싶어서 장원을 찾아오신 거예요.”
“뭐야? 그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란 말이야?”
백색 무복의 사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설난은 얼굴을 가리는 성격이었다. 아는 지인에게는 살갑게 대하지만 평상시에는 결코 웃는 모습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매화라고 불렀다.
그런데 봄날 포근한 야생화같이 활짝 피어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놀라운걸? 그럼 나부터 소개하지. 나는 청성파의 일대 제자인 강호풍이라고 하네.”
“반갑습니다. 저는 이청운이라 합니다.”
청운은 본명을 사용했다. 자칫 혁련장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좋을 것 없지만 이제는 자신이 있었다.
더욱이 이름만으로는 자신이 삼원을 한 진사 이청운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환골탈태를 하면서 모습도 많이 변했다. 키는 한 뺌 이상 커졌고, 덩치도 보기 좋게 변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청운의 이름을 듣고는 진설란은 피식 웃음 지었다.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그날 청운은 가명을 이야기했었다.
그런 진설난의 표정 변화에 청의 무복을 입은 사내는 얼굴마저 붉게 변했다.
한 발 앞으로 나선 그가 청운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남궁세가의 남궁룡이다. 친구들은 질풍신룡이라고도 부르지.”
남궁룡은 강호의 청년 기재를 칭하는 오룡오봉(五龍五鳳) 중 오룡에 속하는 신진고수였다.
약관이 되기 전에 강호에 출두한 그는 많은 명성을 쌓았다. 그가 익힌 선전십삼뢰검과 창궁비연검법은 그를 오룡의 자리에 올려놓기 충분했다.
“반갑습니다. 이청운입니다.”
“흥. 사문은 없는 것인가?”
남궁룡은 청운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차갑게 말했다.
청운은 남궁룡의 이유 없는 적대감에 의아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곁에 있던 혈황이 피식 웃으며 청운에게 속삭였다.
[저 녀석, 진 소저를 좋아하나 보군.]
청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혈황의 말이 이해가 안 되었다.
‘아니 진 소저를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그런 청운의 마음을 눈치채고 혈황이 말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준다면 저놈처럼 변하지.]
“아!”
청운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탄성을 질렀다.
그런데 그런 청운의 모습이 남궁룡에게는 좋게 보이지 않았다.
“사문을 물었네만.”
“하하. 오해는 마십시오. 남궁 형을 뵈니 남궁세가의 인물들이 헌헌한 미장부라는 말이 떠올라서 감탄한 것입니다.”
“흥.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이야기는 필요 없고, 사문이 어디인가?”
“아직은 밝힐 수가 없습니다. 은원이 관련돼서요.”
청운의 말에 남궁룡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강호에서는 상대가 밝히지 않을 경우 사문이나 무공을 물어보는 것이 큰 결례였다.
남궁룡이 머뭇거릴 때, 뒤에 다소곳이 있던 귀여운 묘령의 여인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저는 제갈세가의 제갈해미예요. 이 공자, 반가워요.”
귀엽게 자랐는지 제갈해미의 얼굴에는 그늘이 없었다. 해맑게 웃는 모습이 강아지를 닮은 귀여운 얼굴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청운이라 합니다.”
청운은 예를 갖춰서 인사를 했다. 명가의 후손인 이들이 청운의 반듯한 몸가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바른 몸가짐이었다. 명가의 후예이거나, 혹은 학식이 뛰어난 학사일 확률이 높았다.
“이야. 이 공자님은 예절이 몸에 배어 있으시네요. 누구와는 다르게요.”
제갈해미는 배시시 웃으며 곁눈질을 했다. 제갈해미의 시선을 받은 강호풍은 어색하게 웃음 지었다.
“하하. 해미야, 나도 제법 예법에 밝다니까.”
“아, 네. 어련하시겠사와요.”
그러나 강호풍과 다르게 남궁룡은 굳어진 얼굴을 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진설란을 향해 있었다. 복잡 미묘한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