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21화
믿을 수 없었다. 청운의 옷깃 하나 건들지 못하다니.
한참을 허공에다 헛손질한 팽도천은 우뚝 멈췄다.
‘적수공권으로는 어렵겠군.’
청운이 펼치는 요상한 보법을 자신의 실력으로는 따라잡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방법은 하나뿐인데….
‘그렇다고 도를 꺼낼 수도 없고….’
그동안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다.
싸울 때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
마음이 통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줄 수 있는 병장기를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상황으로는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이길 방법이 안 보였다.
그런 팽도천의 마음을 아는지 청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만 꺼내지?”
“뭐? 꺼내긴 뭘 꺼내! 이 자식, 설마 내 물건이 보고 싶은 것이냐?”
“미친놈. 네놈 등 뒤에 그 물건.”
청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팽도천의 등 뒤에 있는 도를 가리켰다.
팽도천은 실소를 터트렸다.
“허, 네놈이야말로 단단히 미쳤구나.”
자신도 도를 꺼내고 싶었다. 그러나 도를 뽑는 순간 피를 봐야 한다.
청운의 몸놀림을 봤을 때 자신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청운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것이다.
청운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싫어? 그럼 일단 맞자.”
청운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고는 묵룡파천권과 풍뢰연환권을 섞어서 펼치기 시작했다.
황궁무고에서 익힌 그 어떤 무공도 팽가의 무공에 뒤처지지 않았다.
퍼버버벅.
팽도천은 온몸으로 청운의 공격을 막아내며 연이어 뒷걸음질 쳤다.
그나마 청운이 손속에 사정을 둬서 한 방에 무너져 내리지는 않았다.
[반 푼의 힘을 더 빼라. 그러다 저 녀석 뼈 부러지겠다.]
적절히 힘쓰는 방법 역시 혈황에게 배워나갔다. 곁에 딱 붙어서 알려주니 매 순간순간이 청운에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하지만 당하는 팽도천은 죽을 맛이었다. 일방적인 구타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윽! 젠장, 어쩔 수 없군!’
팽도천은 일방적인 구타를 더 참지 못하고 혼원벽력신공을 몸 주변으로 터트렸다.
우웅, 파아앙!
팽도천의 기세가 달라지자, 청운은 훌쩍 뒤로 물러섰다.
“정녕 자신 있느냐?”
팽도천이 으르렁거리며 청운을 노려보았다.
청운은 살며시 웃으며 답했다.
“물론.”
“좋다. 후회 마라.”
스르릉.
태산처럼 팽도천의 등 뒤를 버티고 있던 청룡도가 시리도록 맑은 빛을 뿜어내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투박할 것 같았던 거대한 도의 도신은 잡티 하나 없었고, 정교하게 새겨진 한 마리의 청룡이 선명하게 도등을 타고 앉아 있었다.
팽도천은 혼원벽력신공을 도신에 두르며 천천히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청운을 향하던 몸을 살짝 비틀어서 혼원벽력신공을 이용한 혼원벽력도의 기수식을 잡았다.
[조심해라, 혼원벽력도다. 저 녀석은 팽가의 직계혈손이니 오호단문도를 펼친다면 너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혈황은 팽도천이 펼칠 무공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팽가는 단순 무식한 놈들이었다. 그들의 무공 역시 아기자기한 맛이 없이 일도양단의 무공이 대부분이었다.
그중 패도적인 오호단문도가 가장 까다로웠다.
“으아아앗!”
저돌적인 성격인 팽가의 후예답게 팽도천은 곧장 청운에게 커다란 도를 휘둘렀다.
쉐에엑.
청운은 벼락처럼 쏟아지는 도기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상체를 살짝 흔들며 섬전보(閃電步)상의 섬전팔영보(閃電八影步)를 펼친 그는 빠르게 팽도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팽도천은 공격하던 도를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려서 청운의 공격을 막았다.
청운이 빠르게 떨어지는 도를 손으로 쳐냈다.
투캉!
강력한 내공의 힘에 팽도천이 뒤로 주르르 밀려났다.
팽도천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를 들었는데도 일 수에 밀려다니.
쉐엑, 쉐에엑!
이를 앙다문 팽도천은 혼원벽력도의 일 초식인 벽력풍을 펼쳐서 사방에 도기를 뿌렸다. 자칫 구경하는 자들이 다칠 수도 있었지만, 지금 그들을 걱정해줄 만한 여유가 없었다.
투캉, 투캉!
청운은 도기를 뒤로 흘리거나 피하지 않고 일일이 맨손으로 도면을 쳐냈다.
대결을 지켜보던 혈황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청운에게 조언을 했다.
[혼원벽력도는 혼을 담아 펼치는 벼락같은 도법이다. 한 수 한 수가 일격필살의 묘를 담고 있지. 그런데 저놈이 펼치는 것을 보니 강만 담았지 유의 묘리가 빠져 있구나. 화후가 조금만 깊었어도 너에게 정말 좋은 상대였을 텐데, 조금 아쉽구나.]
혈황을 상대했던 팽가의 고수 중에는 그가 감탄할 만큼 대단한 실력을 갖춘 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펼치는 혼원벽력도는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었는데, 팽도천은 아직 그 정도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부드러움이 없는 강함은 부러지기 쉽다. 저 녀석처럼. 무슨 말인지 알지?]
‘예! 강은 더 강한 힘에 부러지고, 부드러움을 이길 수 없죠.’
청운은 사선으로 베어오는 도기를 보며 말아 쥔 주먹에 내공을 모았다.
그러고는 벽력대제의 묵룡파황권을 펼쳤다.
강맹한 기운이 도를 막아서자 헌원벽력도가 제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청운은 빈틈이 보이자, 섬전팔영보를 펼치며 품속으로 파고든 뒤에 연타를 날렸다.
퍼버버벙.
팽도천의 몸이 허공에 붕 떠서 날아가더니 벽에 부딪혔다.
우당탕.
“크윽.”
앙다문 잇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청운은 팔짱을 끼고 잠시 기다렸다. 다른 자였다면 그냥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발길을 돌렸겠지만, 상대는 강골 중의 강골인 팽가의 혈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씨익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팽도천이었다.
그런 팽도천을 보며 청운이 한마디 흘렸다.
“미친놈.”
말은 그리했지만, 청운은 팽도천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무인이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알고 있었다.
기개.
사내라면 응당 팽도천이 보여주는 기개가 있어야 했다.
청운은 팽도천을 보며 살짝 물었다.
“좀 쉬었다 할까?”
“카악, 퉤!”
팽도천은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되지도 않는 소리 집어치우라고.
그런 팽도천의 모습에 청운은 활짝 웃었다.
팽도천은 다신 청룡도를 잡고 기수식을 잡았다.
혈황은 다른 의미에서 감탄하며 한마디 했다.
[호오, 다행이다. 이 녀석, 오호단문도를 알고 있구나.]
직계혈손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익힌다는 팽가의 비전이었다.
쉐에엑.
팽도천의 도가 일도양단의 기세를 머금고 청운을 덮쳤다.
청운은 뒤로 물러서며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팽도천의 기개에 탄복한 그는 팽도천을 무인으로서 대우해주고 싶었다.
콰앙!
커다란 폭음이 사방으로 번져나갔다.
청룡도에 비해서 작고 얇은 청운의 검이 밀리는 기세 없이 대등하게 막아서자 놀란 건 팽도천이었다.
그러나 놀람도 잠시 팽도천은 혼원보를 밟으며 청운을 몰아붙였다.
쾅쾅쾅쾅!
사방으로 흩어지는 팽도천의 신형과 연속으로 쏟아내는 도기가 청운을 덮쳤다. 그가 거구의 몸을 가진 자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민첩한 움직임이었다.
혼원벽력도를 펼칠 때와는 모든 게 달랐다.
하지만 청운은 여전히 여유가 있는 움직임으로 팽도천을 상대했다.
[너무 몰아붙이지 말고 천천히 해라. 이런 기회가 흔한 것도 아니니.]
청운은 혈황의 조언대로 육십사 식으로 이뤄진 오호단문도를 하나하나 견식했다.
‘응? 이놈 왜 펼치다 말아? 아직 안 배웠나?’
혈황은 팽도천이 펼치는 오호단문도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청운아. 저 녀석에게 한번 물어봐라. 오호단문도를 다 배운 것인지, 아니면 그게 다인지.]
청운 역시 안 그래도 조금 이상하다 생각했다.
오호단문도의 초식 중간중간 무언가 강력한 한 방이 있을 것 같은데 없었던 것이다.
청운은 검법을 조금 더 빠르게 펼쳤다.
유려한 발놀림을 더해서 팽도천을 몰아붙였다.
대등하게 싸우던 청운의 검이 갑자기 날카로워지자 팽도천은 다시 이를 앙다물었다.
채앵!
둘의 신형이 우뚝 멈춰 섰다. 힘겨루기를 하려는지 검과 도가 맞붙은 상태였다.
그런데 둘의 자세가 이상했다. 분명히 청운보다 큰 키와 덩치를 가진 팽도천이 위에서 누르는 형상이어야 하건만 정반대의 형상이었다.
팽도천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고, 청운은 위에서 팽도천의 도를 무자비하게 내리누르고 있었다.
점점 팽도천의 커다란 청룡도가 밑으로 내려앉았다.
청룡도가 팽도천의 어깨까지 내려앉자 청운이 입을 열었다.
“광견, 버틸 만하냐?”
“크윽.”
팽도천은 청운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도 내공과 타고난 신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여기서 대답을 했다가는 내공이 흩어져서 어깨가 박살 날 것이 분명했다.
“오호단문도를 배우긴 다 배운 거냐? 뭔가 좀 빠진 것 같은데.”
“…….”
“쯧쯧. 힘든가 보군.”
청운은 힘을 풀며 뒤로 훌쩍 물러섰다.
전신을 압박하던 힘이 사라지자 팽도천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크허억.”
헐떡이는 팽도천을 두고 청운은 검을 집어넣었다.
팽도천은 그런 청운을 잡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청운은 자신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청운을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오 식의 절초는 오래전 유실되었다.”
“흠, 그래?”
혈황이 재빨리 설명해주었다.
[오호단문도는 칠 초식 다음에 팔 초식이 강력한 일격을 가진다. 팔 초, 십육 초, 이십사 초, 삼십이 초, 이렇게 죽 올라가면 나중에 육십사 초에서 만나지.]
“…….”
[빠진 오 초식은 내가 대충 아는데, 알려줄까?]
청운은 혈황의 말에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팽도천을 보며 한마디 했다.
“광견. 따라와라.”
“크크, 왜? 술이라도 한잔하게?”
청운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죽도록 두들겨 맞아놓고는 여전히 팔팔한 것을 보니 역시 미친놈이 분명했다.
“웅패군산, 백호도간”
“뭐?”
“알고 싶어?”
팽도천의 기세가 점점 거칠어졌다. 두 눈에 살기마저 어렸다.
청운이 읊은 말은 실전된 오호단문도의 두 가지 초식이었다.
“이놈! 나를 놀리려는 것이냐?”
“미친개 놀려서 뭐하게. 잔말 말고 따라와라. 네놈에게도 좋은 일이니.”
청운은 몸을 돌려서 앞장섰다.
이내 팽도천도 청운을 따라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청운은 객잔으로 팽도천을 데려가서 다섯 초식의 구결을 적어주었다.
따라가면서도 못 미더워했던 팽도천은 구결을 보고 나서야 벌게진 얼굴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보기보다 순진한 친구였다.
“고맙다. 이 은혜, 잊지 않으마.”
“친구가 된 기념으로 주는 거다. 나중에 술 한잔 거하게 사.”
“걱정 마라. 항아리째 사줄 테니까.”
팽도천이 눈물이 그렁거리는 눈으로 씩 웃었다.
청운으로서도 혈황이 불러주는 구결을 받아 적었을 뿐인데 오대세가 중 하나인 팽가에 은혜를 베푼 셈이 되었으니 큰 이득을 본 셈이었다.
* * *
팽도천에게 오호단문도의 잃어버린 초식을 선물하고 사흘이 지났다.
그날 오전, 마침내 황제의 명령이 떨어졌다.
청운은 마음을 다잡고 황도를 나섰다.
진무사라는 신분에 맞게 비어복(飛魚服)을 입어야 하건만 평범한 무복을 입은 상태였다.
동행하는 사람도 없었다. 금의위들은 그와 따로 움직이는 중이어서 당분간 혼자, 아니 혈황과 함께 남하해야 했다.
그러고 보면 팽도천이 구결을 얻은 후 급히 본가로 돌아간 게 조금 아쉬웠다.
옆에 있으면 제법 도움이 될 텐데……. 하다못해 길잡이로라도 부릴 수 있을 것 아닌가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천천히 알려줄 걸 그랬나?’
그나마 ‘반드시 이 빚을 갚으마.’라며 단단히 약속했으니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었다.
[개봉으로 바로 갈 거냐?]
성문을 나서자마자 혈황이 물었다.
청운은 열 걸음쯤 걸은 후에 씩 웃으며 답했다.
“가면서 패주의 진천표국에 들러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