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화
[아쉬운 것이냐?]
“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냥 떠나려니 서운하긴 합니다.”
[하하하. 이곳이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예. 살면서 이곳처럼 평화롭고 한가한 곳은 보지 못했습니다.”
청운은 지상낙원이 있다면 이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혈황 역시 주위를 둘러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복수를 모두 마친다면 이곳에 와서 자리 잡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예. 생각해보겠습니다.”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른다. 그러나 모든 일을 끝낸 후 쉴 곳을 찾는다면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장소였다.
청운은 성큼성큼 걸어서 돌로 만든 집으로 향했다.
안에서 간단한 봇짐과 한 자루 검을 들고 나왔다.
“가시죠.”
[오냐, 이제 시작이구나.]
태행산맥의 이름 없는 골짜기에 들어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의 시간이 흘렀다.
황제에게 얻은 일 년의 시간은 청운을 강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황제가 있는 황성까지 경공을 빠르게 펼치면 이틀 거리였다.
청운은 곧장 용천혈에 내공을 흘려보내며 강하게 바닥을 찼다.
쿵!
비천무영신법(飛天無影身法)
무영신투라는 전설의 대도가 사용한 신법이 삼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서 다시 세상에 선을 보였다.
천하가 좁다며 예고장을 보내고 도둑질을 할 만큼 대담한 자였다.
무림고수들이 펼친 천라지망을 유유히 빠져나갈 만큼 그의 신법은 유령을 방불케 했다.
전설에 회자될 만큼 엄청난 신법인데 이제 청운에게로 이어졌다.
단 몇 번의 도약만으로 청운의 모습은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
* * *
청운은 비밀리에 황제를 알현했다.
용상에 앉은 황제는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폐하! 신 이청운, 돌아왔사옵니다.”
청운은 오체투지 한 채 황제를 알현했다.
늠름하게 변한 청운을 보며 황제는 크게 기뻐했다.
“하하하. 진정 네가 삼원이란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이 모든 것이 황제 폐하의 은혜이옵니다.”
“어서 고개를 들라. 진정 일 년 만에 돌아왔구나. 그것도 몰라보게 강해져서.”
황제는 청운이 금의위를 뚫고 장내에 내려서자 깜짝 놀랐다.
무공을 익힌 것 같지 않은 평범한 모습이건만 놀라운 신위를 보여주자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기적 같은 일이로다. 어찌 일 년 만에 이처럼 놀라운 신위를 보여줄 수 있단 말인가? 진정 하늘이 내린 기재가 아니던가.”
황제는 청운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치세에 하늘이 내린 기재가 나타났으니 홍복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곧장 준비한 것을 풀기 시작했다.
“삼원 이청운은 명을 받들라!”
쿵.
청운은 고개를 조아리며 황제의 명을 기다렸다.
“삼원 이청운을 황제 직속의 북진무사에 임명한다. 열세 개 성을 전부 관리할 수 있는 특별직이다. 이번 역모가 마무리될 때까지 그 권한을 일임한다!”
황제는 그 자리에서 청운에게 벼슬을 내렸다.
진무사는 황제의 명령 외에는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다. 황제 직속이기에 품계에 연연하지 않고 누구든 수사하고 형벌을 내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자리였다.
청운은 곧장 황제에게 절을 하며 외쳤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청운은 진무사라는 직위를 받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자신에게 내려진 관직을 믿을 수 없었다.
원래 금의위는 형옥을 담당하는 북진무사와 군장을 담당하는 남진무사로 나뉜다.
황제에 대한 의전과 경비임무를 맡는 것이 남진무사라면, 북진무사는 황제의 밀명으로 누군가를 조사하고 죄가 드러나면 형을 집행했다.
곁에서 있던 혈황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마디 했다.
[황제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환관들 말을 들어보면, 보통 북진무사는 정해진 지역이나 최대 한 개 성만 관여할 수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너에게는 중원 전체를 관장하는 힘을 주다니. 이놈 무슨 생각인 거지?]
혈황은 믿을 수 없는 관직을 내린 황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청운은 빠르게 정신을 수습했다.
자신에게 내려진 관직이 너무도 엄청났기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황제는 청운의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천하제일기재라는 삼원도 당황할 때가 있구나.”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그만큼 네게 내려진 관직이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구나.”
“신명을 다 바쳐서 충성을 다하겠사옵니다.”
청운은 다시 오체투지를 하며 황제에게 감사를 전했다.
황제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가 내릴 선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황제는 청운과 함께 움직일 금의위 위사 일백 명을 선발해서 대기시켰다. 모두가 일류 이상의 실력자들이었고, 절정에 이른 고수가 넷이나 되었다.
“금의위에서 고르고 고른 자들이니 삼원의 손발이 되어줄 것이다.”
황제가 곁에 있는 정원 태감에게 고개를 돌렸다.
정원 태감이 무언가를 받쳐 들고 있었다.
그는 청운에게 다가가더니 받치고 있는 물건을 건넸다.
척.
황금패였다.
청운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았다.
대명금패.
황제를 상징하는 신물인 황금인장이었다.
황금인장이 있으면 각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위소의 금의위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금의위 수장인 대영반의 명령을 받지 않아도 되는 진무사가 된 것이다.
* * *
황도의 남쪽 시장통에서 작은 축제가 벌어졌다. 길거리마다 등불을 밝혀 불야성을 이루었다.
수많은 장사치들이 밝힌 불은 어둠마저 몰아냈다.
그렇다고 딱히 대단한 축제는 아니었다. 일 년에 두 차례 벌어지는 남문 상인들의 작은 축제였다.
붉은 등불에 이끌린 사람들이 축제에 몰려들었다. 길거리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축제는 흥겨웠다.
바로 그 축제의 현장, 한 사내가 어기적거리며 길을 걷고 있었다. 낡은 마의를 입고 있는 사내는 앞머리를 반쯤 풀어헤치고 있었다. 대충 묶은 머리는 얼굴의 절반을 가린 상태였다.
사내는 길을 걸으며 연신 주변을 살폈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한 마리 표범 같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인파를 해치던 사내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씨익.
“찾았다.”
사내의 입가가 벌어지며 이빨이 보일 만큼 환하게 웃었다.
누군가를 찾아 헤매던 사내는 청운이었다.
진무사가 된 그는 곧장 하남성으로 출발하지 않았다. 당장 가서 놈들을 처단하고 싶건만 황제는 청운에게 며칠 쉬었다 가라고 명령을 내렸다.
일 년간 쉬지도 않고 수련을 했을 청운에게 약간의 휴식을 준 것이다.
덕분에 청운은 항상 마음에 남아 있던 일을 해결하려고 이곳에 왔다.
청운은 터벅터벅 한 사내를 향해서 걸어갔다.
커다란 청룡도를 등에 메고 있는 사내였다. 육 척이 넘는 큰 키의 사내는 근육질의 단단한 몸을 지니고 있었다.
청운은 축제를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사내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섰다.
그러고는 반 뼘가량 큰 사내의 얼굴을 살짝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재밌냐?”
“응? 헉! 네놈은……?”
근육질의 사내는 곁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청운을 보고 깜짝 놀랐다.
쉬익, 빡!
둔탁한 소리가 크게 울렸다.
거구의 사내 얼굴이 뒤로 돌아갔다. 청운이 냅다 날린 주먹질을 피하지 못했다.
청운은 연이어 사내의 배를 향해서 발길질했다.
퍽! 우당탕.
사내는 공중에 살짝 뜨더니 그대로 한쪽에 늘어서 있는 노점을 덮쳤다. 작은 수레가 거구의 사내 때문에 박살이 났다.
청운은 쓰러진 사내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이거 일 년 못 본 사이에 약골이 되었네.”
사내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청운을 노려봤다.
이내 괴소를 터트리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크크크, 오랜만에 만난 인사치고는 짜릿한데? 많이 컸어, 기습도 할 줄 알고.”
사내는 옷에 묻은 것들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보통 사람이라면 기절할 만한 공격이었는데도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 사내의 모습에 청운은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제법이야. 옛날 같으면 기절했을 텐데. 요즘 정신 차리고 수련 좀 하나 보지?”
“그럴 리가. 난 태어나면서부터 강했지. 딱히 수련을 안 해도 강해. 그러는 네놈이야말로 어디 지하에서 폐관수련이라도 했나 보네.”
둘 사이에 싸늘한 기운이 오고 갔다. 살기가 아니었다. 거대한 투기였다.
사내의 비아냥거림에 청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수련은 무슨…. 기루에서 기녀 엉덩이나 두드리고 있었지. 아! 네놈은 생긴 게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생겨서 기루 출입이 안 되겠구나.”
사내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모욕이었다.
“무, 무슨 소리야. 이거 서운한데? 내가 기루 근처에만 가면 루주들이 뛰어나와서 서로 모셔 가려고 난리야.”
“하하하, 그렇겠지. 호구가 납셨는데.”
“뭐야?”
사내는 버럭 화를 냈다.
역시 자신에게 인내는 어울리지 않았다.
예전에도 말싸움으로 청운을 이길 수 없었다. 그래서 패고, 패고 또 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말뿐이던 녀석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니면 드디어 미친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운이 사내에게 한마디 던졌다.
“고깃덩어리, 시간도 없는데 말장난은 이쯤 하자.”
“호…. 황도광마가 못 본 사이에 많이 변했네. 바라던 바야. 말이 너무 길었어.”
말과 동시에 사내의 몸에서 거대한 내공이 분출되었다.
후아아아악!
강맹한 기운이 주변을 휩쓸었다.
회오리치듯 내공이 몸 주위를 휘감았다.
묵직하면서 강인한 특징을 보이는 내공은 무림에 흔하지 않았다. 아니, 오직 한 가문의 독문심법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
혼원벽력신공.
무림일절로 알려진 하북 팽가의 독문심법.
오대세가 중 하나인 하북 팽가의 독문심법을 펼친다는 것은 사내가 팽가의 직계혈손이라는 말이었다.
그랬다. 사내는 팽가의 소가주 팽도천이었다.
일 년 전, 둘은 밤만 되면 마주쳐서 피 터지게 싸운 사이였다.
그러다 청운이 황제를 만나고 갑자기 황궁무고로 들어가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실력은 팽도천이 훨씬 뛰어났다.
첫 만남에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건 청운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쌩쌩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다시 덤볐다.
처음에는 송장 치우는 줄 알았던 팽도천은 제법 단단한 몸을 지닌 청운을 보며 놀라워했다.
그는 적당히 상대해서 딱 기절할 만큼만 손을 썼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청운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팽도천과 호각을 이뤘다.
그 시간이 고작 이십여 일이라는 사실에 팽도천은 기겁했다.
더욱이 청운과의 싸움은 자신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싫은 표정 하지 않고 밤만 되면 청운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청운의 모습이 거짓말처럼 황도에서 사라졌다.
수소문을 해봤지만, 어디에도 청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청운이 한편으로 걱정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다시 나타나자 뛸 듯이 기뻤다.
물론 한 방 맞은 것은 곧 갚아줄 생각이었다.
“가볍게 시작하지.”
커다란 덩치의 팽도천이 비호처럼 청운을 덮쳤다. 그는 갈지자로 움직이며 좌우에서 정신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팽가의 건곤신장과 파갑추다. 저놈 성격상 결정적일 때 혼원벽력장을 펼칠 것이니 조심해라.]
어김없이 혈황의 조언이 이어졌다. 그는 청운 곁에 딱 붙어서 팽도천의 공격을 청운과 같이 피해줬다. 어떤 때는 청운과 같은 동작이었고, 어떤 때는 청운과 반대였다.
이런 혈황의 움직임은 청운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아직 복기할 시간은 아니지만, 이미 청운의 머릿속에서는 빠르게 팽도천의 무공을 파악하는 중이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피하는 기술만 익혔느냐?”
훙, 쉐엑!
허공을 가르는 팽도천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청운은 산책하듯이 피해냈다. 그런 청운의 대처에 곤란해진 건 팽도천이었다.
‘이 자식, 일 년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돌아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