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19화
청운의 말에 태감의 한쪽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마치 ‘네까짓 놈이 그러면 그렇지’ 하는 비웃음이었다.
비위가 살짝 비틀렸지만 태감은 차분하게 말했다.
“어려워 말고 말씀해 보시게. 내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드리겠네.”
“그럼, 염치없지만 말씀 올리겠습니다. 혹시…… 면회되나요?”
“무슨?”
“면회 말입니다. 가능하겠지요?”
“면회라니? 무슨 면회를 말하는 것…….”
뜬금없는 청운의 말에 태감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나 이내 떠오르는 일 때문에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입을 쩍 벌렸다.
와락 인상을 썼다.
이미 정 소감과의 일을 보고받았다. 청운이 정 소감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천인공노할 보고였다.
한 번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당사자들이 오해라며 극구 발뺌을 했기에 묻어두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까지 정 소감을 거론하자, 정원 태감은 이성의 끈이 두둑 끊어지는 것 같았다.
“이, 이노옴! 감히 누구를 욕보이려 드는 게야!”
“태감! 욕보이다니요? 그 일은 분명히 오해라 말씀드렸습니다.”
“오해? 오오해? 좋다. 그 일은 그렇다 치고, 그럼 무엇이더냐? 무엇 때문에 그 아이를 보겠다는 것이냐아!”
정원 태감은 부들부들 떨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미래의 권력자가 될 것이 뻔한 청운이지만 아직은 자신의 권력이 더 높았다.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방법도 많았지만 겨우 참고 있는 중이었다.
청운은 양손을 앞으로 내밀어서 흔들었다.
“오해입니다, 오해. 정 소감이 동창에 들어갔다기에 선물을 하나 전해주려는 것뿐입니다.”
“선물? 흥! 좋다. 선물이라고 치자. 그럼 어떤 선물이냐?”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저 정 소감에게 해가 되는 선물은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청운은 정중하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 모습이 정중했기에 정원 태감은 긴 한숨을 쉬며 노기를 살짝 누그러트렸다.
그가 청운을 노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좋다. 정 소감을 볼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 그러나 일다경으로 끝내야 한다.”
“감사합니다.”
“흥! 허나 명심해야 될 게야. 만일 그 아이에게 허튼짓을 하려다간… 천참만륙시킬 터이니.”
참혹하게 죽이겠다는 태감의 위협에도 청운은 미소 지었다. 남들이 깊은 오해를 하고 있었지만, 자신은 떳떳했다.
분위기가 살벌하긴 했어도 이야기는 잘 끝났다.
그길로 풍천호가 먼저 떠났고, 청운은 태감의 뒤를 따라서 자리를 이동했다.
태감을 따라서 이동한 곳은 황궁의 서쪽 중앙에 있는 자녕궁 뒤편이었다.
이곳이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 곳인지는 모른다. 안내된 방에서 잠시 기다리자 반가운 얼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 소감!”
“대이인!”
며칠 만에 보는 둘이지만 몇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반가워했다.
“어서 이리 앉게. 시간이 없으니 긴 얘기는 못 하네.”
“니에! 소인, 대인이 너무 보고 싶었사옵니당”
자리에 앉자마자 청운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제법 두툼한 책을 정 소감에게 건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동창에 들어갔다는 말은 들었네.”
“니에. 모두 대인 덕이옵니당.”
“아닐세. 자네가 뛰어나다는 것을 윗분들이 이제야 알게 된 것이지. 그보다 여기 이것은 내 마음의 선물이니 잘 익히게.”
“이것이 무엇이온지용?”
정 소감은 청운이 건넨 책을 내려다보았다.
겉표지에 아무런 제목도 없었다. 무슨 책인지 궁금했다. 그래도 청운이 선물한 책이니 예사 책은 아닐 것 같았다.
청운은 정 소감의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구화보전(九華寶典)일세”
“아홉 송이 귀한 책이라니용?”
“하하. 비슷하네. 이 책은 무공비급일세.”
정 소감은 무공비급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럼 황궁무고의 비급이옵니까아?”
“그렇다네. 환관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무공이 구화보전과 구음신경이라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자네에게 선물로 주려고 외워서 나왔다네.”
“가, 감사하옵니당.”
정 소감은 감격한 나머지 또르륵 한 방울 눈물을 흘렸다.
선물도 보통 선물이 아니었다. 황궁무고의 무공비급이었다.
정 소감은 감격에 겨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하하하.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다행이군.”
청운은 정 소감이 동창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을 준비했다.
동창 역시 무공이 필요한 곳이었기에 선물은 무공이 좋다고 생각했다.
어떤 무공이 좋을지 몰라서 혈황에게 조언을 구했다. 혈황은 두 가지 무공이 환관들에게 딱 맞는다고 알려줬다.
청운은 혈황의 조언대로 두 가지 무공을 살핀 후에 하나의 비급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정 소감이 익히기 쉽게 내용에 주석까지 달았다.
책을 펼친 그는 정 소감에게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주었다.
“구화보전은 내공심법과 검술이 뛰어나네. 부족한 건 신법과 보법인데, 여기 적힌 구음신경의 신법과 보법이 뛰어나지. 함께 익힌다면 분명히 고수가 될 것이네.”
“가, 감사하옵니당.”
정 소감은 울먹이며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정 소감에게 꼭 필요한 건 은자와 무공이었다.
동창 내에서 위로 올라가려면 적당한 뇌물과 무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창에서 가르치는 무공만으로는 부족했다. 남들과 같은 무공을 익혀서는 위로 올라갈 수 없었다.
윗선에 잘 보여서 남들보다 좋은 무공을 얻어내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그런데 청운이 무공을 선물로 가져왔다. 그저 그런 무공도 아니고, 황궁무고의 무공을.
청운에게 주어진 면회시간은 고작 일다경. 차 한 잔 마실 시간밖에 없었다.
청운은 정 소감에게 무공을 익히는 순서와 특징, 그리고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정 소감. 심법 위주로 먼저 익히고 그 뒤에 검법을 익혀야 하네. 음의 기운이 강하다고 하니 몸에 변화도 생긴다고 하더군. 심법이 삼성을 넘기면 그다음에 검법을 익혀야 하는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니에, 니에. 알겠사옵니당. 소인 대인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비급을 익혀서 꼭 대성할 것이옵니당.”
정 소감은 결의를 다졌다. 다시없을 기회였다.
결의를 다지는 정 소감에게 청운은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그래, 결코 쉬운 무공은 아니네. 특히, 구음신경의 신법과 보법은 범어로 되어 있던 것을 내가 해석한 것이네. 익히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도가의 경전을 보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니.”
“알겠사옵니당.”
청운은 마지막 당부의 말까지 모두 할 수 있었다.
너무 적은 면회시간이기에 더 많은 것을 알려줄 수는 없었다. 딱 하루의 시간만 더 있다면, 정 소감에게 구화보전의 모든 무공을 자세히 알려줄 텐데, 그게 아쉬웠다.
아니나 다를까 밖에서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려왔다.
“면회시간이 다 되었사옵니다.”
정 소감은 아쉬운 눈빛으로 문밖을 보더니 이내 청운을 보며 말했다.
“대인, 어찌 저 같은 것에게 이리 귀한 신외지물을 선물로 주시는지용?”
정말 궁금했다.
왜? 청운이 자신에게 이처럼 잘해주는지를.
청운을 만나면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도움을 받았다.
청운의 도움으로 끝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동창의 일원도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청운이 빙그레 웃으며 정 소감에게 말했다.
“하하. 이상한가 보군. 복잡하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말게. 자네 덕분에 황제 폐하를 조용히 만날 수 있었네. 네가 자네를 만난 건 하늘이 도와줬음이야.”
“니에, 하지만 소인이 아니어도 충분히 폐하를 뵐 수 있었을 것이옵니당.”
“중요한 건 자네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겠지. 예부터 성현들께서는 인연의 소중함을 강조하셨네. 나 역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앞으로 수많은 인연이 나를 스쳐 지나가겠지만, 정 소감과는 더욱 좋은 인연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네.”
“…….”
정 소감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청운은 그런 정 소감을 보며 방긋 웃었다.
“하하하. 어렵게 생각하지 말래도 그러네.”
“송구하옵니당.”
“이렇게 생각하게. 나는 앞으로도 자네를 후원할 것이네. 자네도 나를 후원해주게.”
“소인에게는 아직 대인을 도와드릴 힘이 없사옵니당.”
처음부터 그랬다. 자신은 청운의 수발을 드는 게 다였다.
“하하. 그 힘……. 자네 손에 들린 비급이 줄 것이니 열심히 익히게. 아참, 이건 비밀이네. 그리고 그림을 한 점 그렸으니 이걸 팔아서 유용하게 사용하게.”
청운은 소매에서 잘 접힌 종이를 꺼내 정 소감에게 건넸다.
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서 재차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려왔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 이름을 팔게. 최소한 자네 뒤에 내가 있음을 잊지 말고.”
“니에. 대인께옵서도 꼭 뜻한 바를 이루시옵소서. 소인 역시 대인 곁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주시옵소성.”
정 소감 덕분에 조용히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정 소감에게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 분명했다.
정 소감은 떠나려는 청운을 껴안았다.
와락.
청운은 말없이 정 소감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때 방문이 열리며 환관들이 들어왔다.
“시간이 다 되…….”
“허억…….”
선두에서 들어오던 자들이 그대로 굳었다. 둘이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청운은 고개를 돌렸다. 저 뒤에서 왕방울만 하게 커진 눈으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정원 태감이 보였다.
“이노옴! 다, 당장 떨어지지 못하겠느냥!”
“하하, 오해입니다, 오해.”
청운은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 ◈ ◈
끝없이 펼쳐진 협곡의 안쪽에는 넓은 분지가 있었다. 사방이 깎아 지르는 천장단애에 둘러싸여 있어서 사람은 접근조차 어려웠다.
분지의 한쪽에는 천장단애의 중간에서 떨어져 내리는 폭포가 있었는데, 폭포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가 분지를 가로질러서 흘렀다.
일 년 전, 아름답고 험준한 그 분지에 한 사내가 나타났다.
분지의 한쪽에는 돌로 만든 오래된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무공을 연마했다.
눈이 오면 눈송이를 상대로 무공을 수련했고, 비가 오면 빗방울을 상대로 초식을 펼쳤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파바바방.
가죽 터지는 소리가 분지의 적막함을 깨웠다.
한 사내가 적수공권으로 무공수련을 하고 있었다.
현란한 보법과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동작은 한 마리 표범과 같았다.
그 사내는 일 년 전 이곳에 들어온 청운이었다.
청운은 혈황의 조언을 들으며 황궁무고의 무공을 연마했다.
혈황은 청운이 수련하는 것을 지켜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이제 어디 가서 맞지는 않겠구나.]
불과 일 년 만에 대부분의 무공을 육성 이상 익혔다.
대성한 무공도 여럿 있었다. 혈황이 직접 지도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팡팡! 파바방!
청색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사방으로 쏟아졌다.
허공을 가르는 청색 기운을 보며 혈황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천명신공이 벌써 칠성 경지에 올랐군.]
청운이 익힌 내공심법은 혈황신공과 천명신공이었다.
혈황신공의 특징은 너무 눈에 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몸 주변으로 뿜어져 나오는 붉은 아지랑이가 문제였다.
만일 원수들이 혈황신공을 펼치는 청운을 본다면 대번에 알아볼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꼭꼭 숨거나 오히려 청운을 제거하려고 들 것이다.
그래서 천은자의 천명신공을 익혔다.
천명신공은 칠백여 년 전 천하제일인이라 불렸던 무성 천은자의 독문심법.
혈황도 인정할 만큼 대단한 천명신공은 혈황신공을 대신할 최고의 신공이었다.
연공이 끝나가자 혈황은 청운을 불렀다.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
혈황의 부름에 청운은 수련을 멈췄다. 두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가 빠르게 안으로 갈무리되었다.
다시 드러난 두 눈은 깊었지만 평범했다. 어느새 내공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일 년이 흘렀군요.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