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18화
사실 구룡마경은 청운도 이미 외우고 있는 비급이었다.
무엇이 특별한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저 외우고만 있을 뿐.
왜 그런지 몰라도, 혈황은 구룡마경의 무공을 해석해주지 않았다. 청운이 스스로 해석을 하긴 했지만, 심득까지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청운을 보며 혈황이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으음…. 전설에 의하면, 구룡마경을 극성으로 익힌 자가 천하를 차지할 거라고 했다.]
“예? 아니, 그런 비급을 넘기라고요?”
청운은 깜짝 놀랐다.
그런데도 혈황의 표정은 담담했다.
[나는 젊을 때 그 사실을 알고 구룡마경을 뛰어넘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수많은 무공을 연구해봤지.]
청운은 혈황의 말에 점점 흥미를 느꼈다. 무언가 대단한 비밀이 있는 것 같았다.
“여기 있으니까 함께 파헤쳐 보죠. 제가 분석하고 파헤치는 일에 전문인 거 아시지요?”
[구룡마경은 하나가 아니라 아홉 개다.]
“예? 그럼 여기 있는 비급이 아홉 개 중 하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비급은 흑마룡이다.]
혈황의 그 말에 청운의 표정이 변했다.
“그걸 어떻게 아시죠?”
[표지 하단에 희미하게 흑마룡이라고 적혀 있을 거다. 희미해져서 잘 보이진 않지만.]
청운은 곧장 다른 서가로 가서 한 권의 비급을 뽑아냈다. 그러고는 겉표지를 벗겨냈다.
안에서 빛바랜 낡은 비급이 나타났다.
“아! 맞습니다. 여기 흑마룡이라고 적혀 있군요.”
그때 혈황의 몸 주변에 붉은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그가 극도로 분노하거나 흥분했다는 뜻이었다.
[내 혈황신공은 오직 구룡마경을 상대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무공이다. 그 근본은 구룡마경상의 혈마룡이지.]
청운은 이미 혈황신공의 엄청난 위용을 접해본 터였다.
그 엄청난 혈황신공이 구룡마경 중 하나에서 시작되었다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구룡마경을 익힌 자가 있었습니까?”
[그래. 몇 사람 있었지. 천마신교의 천마가 첫 번째였고, 수라혈교의 수라마존이 두 번째였다. 그리고 내가 세 번째였지. 그 외에도 잠깐 활동을 한 자들이 있었지만, 구룡마경의 오의를 온전히 익히지 못하고 사라졌다.]
“천마라면 전설의 마도지존 말입니까?”
[그래. 그런데 착각하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천마는 천마신교의 교주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결코, 모든 천마가 다 강했던 건 아니다. 당금 천마가 어떤 자인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천만대산에 웅크리고 있다면 별 볼 일 없는 자다.]
마교는 천하를 상대로 결전을 벌일 수 있는 유일한 문파였다. 단일 문파로 천하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강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문파의 주인을 별 볼 일 없다고 이야기하는 혈황이다.
하지만 청운은 혈황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럼 천마의 무공이 구룡마경의 무공입니까?”
[그건 아니다. 나와는 반대였다. 천마신공에 구룡마경을 융화시켰지. 천하를 상대로 싸우기에는 당시의 천마신공이 부족했거든.]
“그럼 두 분 중 누가 강하죠?”
[글쎄다. 한판 붙어봐야 알겠지. 후후]
영혼 상태인데도 여전히 호승심이 남아 있는 혈황이었다.
청운은 그런 혈황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혈황의 웃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전에는 항상 무뚝뚝했는데 요즘은 자주 웃었다. 분위기가 훨씬 나았다.
혈황은 자신을 보며 바보같이 웃고 있는 청운을 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회가 되면 구룡마경을 더 모아보자꾸나. 그리고 너에게 혈마룡과 흑마룡을 가르쳐 주마.]
“정말입니까? 저도 궁금합니다. 어떤 무공이기에 혈황신공의 기초가 되었는지요.”
[대신 조심해야 한다. 마경을 익히다 보면 심마에 빠져서 주화입마에 들 수 있다.]
* * *
황궁의 북문인 신무문을 나서면 경산이라는 산이 자리하고 있다. 경산의 정상에는 커다란 누각이 있고 이 누각에서 황궁을 내려다볼 수 있다.
우측에는 커다란 호수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곳이 서원이라 불리는 태액지였다.
만수산과 태액지는 황궁에 속한 두 개의 정원으로 황제가 자주 애용하는 곳이어서 경비가 삼엄했다.
“삼원, 어서 오거라.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처럼 헌헌한 대장부가 되다니, 짐이 기쁘구나.”
“폐하! 신 이청운, 폐하의 은덕으로 무사히 공부를 마쳤사옵니다.”
청운은 누각의 바닥에 오체투지를 한 채 황제를 만났다.
황제의 곁에는 두 명이 함께 있었다.
오른쪽에는 대영반 풍천호가 있었고, 왼편에는 늙은 환관이 구부정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래, 얻을 것은 다 얻었느냐?”
“그러하옵니다. 폐하의 보살핌으로 많은 것을 얻었사옵니다.”
“하하하. 짐이 특별히 기회를 준 것임을 잊으면 아니 되느니라.”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황제는 기분이 좋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랏일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었다. 그런데 청운을 만나러 오는 길에 두통이 싹 사라졌다.
그는 청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제국을 발전시키려면 수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청운은 그런 인재 중에서도 군계일학을 넘는 대붕 같은 기재였다.
그런데 그 기재가 자신을 따르고 있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삼원은 고개를 들어라.”
황제의 명에 청운은 반듯이 앉아서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황제는 그런 청운을 보며 입을 열었다.
“태위, 조사한 걸 청운에게 알려주게.”
“니에, 황상.”
왼편에 있던 환관이 앞으로 한 발 나섰다.
환관들의 수장인 정원 태감이었다.
정원 태감은 십이감 중 한 명으로 동창의 수장 자리를 겸하고 있는 실세 중의 실세였다.
동창은 황제의 직접적인 힘 중 하나로, 첩보와 감시가 주 임무였다.
다른 기관들과 겹치는 부분이 있었지만, 황제 직속이기에 구문제독부나 오군도둑부에서도 한 수 접어주었다.
그런 동창의 수장이 정원 태감인 것이다. 그런데 청운을 바라보는 정원 태감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청운은 무언가 불만이 많아 보이는 정원 태감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넘겼다.
‘하아, 정 소감 때문이군.’
많은 사람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날의 오해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정원 태감이 두루마리를 죽 펼치며 이야기했다.
“삼원을 공격한 자는 하남성 개봉부에 자리한 혁련장의 첫째 아들이옵니다. 혁련장은 무림방파인 혁련세가의 방계인 혁련종도가 세운 곳입니다. 기본적으로 무공을 익히고 있으며, 표국과 객점을 운영하고 있고, 하남성에 전장 세 곳을 두고 있어서 제법 탄탄한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을 받은 동창이 움직였다. 혁련휘에 대한 조사를 모두 마쳤다.
청운도 익히 아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정작 알고 싶은 부분이 빠져 있었다.
그런 청운의 마음을 아는지 금의위 수장인 풍천호 대영반이 나섰다.
“정원 태감, 혁련휘의 숙부라는 자에 대해서는 알아낸 것이 없습니까?”
갑자기 끼어든 대영반의 말에 정원 태감의 기분이 언짢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원 태감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탐문을 해봤지만, 아직 놈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잡지 못했습니다. 놈들이 눈치챌 수 있기에 강도 높은 수소문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사가 미흡합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토벌할 인원을 구성도 못 했는데 들쑤셨다가는 놈들이 달아날 수도 있다.
좀 더 깊은 조사가 이뤄졌다면 좋겠지만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는 없었다.
정원 태감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다시 보고를 올렸다.
“숙부라고 불린 자는 가끔 혁련장에 와서 한두 달 지내다가 가는 자라 하옵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이름이 뭔지, 정확히 아는 자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소인의 생각으로는 잡아서 직접 심문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으로 보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네. 그보다 삼원, 짐이 듣자 하니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 것 같은데, 그 말이 사실인가?”
황제는 청운을 만나러 오기 전에 이미 풍천호와 이야기를 했었다.
풍천호는 청운의 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청운이 황실무고를 나서기 삼 일 전에 구룡마경을 넘겨준 것이다. 중요한 부분의 구결을 표 나지 않도록 살짝 바꾸긴 했지만.
청운이 황제에게 고했다.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이 황궁무고에서 무공을 얻었사오나, 그 기간이 너무도 짧았사옵니다. 신 역시 당장 역도들을 처단하고 싶사오나 아직은 힘이 모자라니, 시간을 조금만 더 주시옵소서.”
청운이 다시 엎드리며 황제에게 청했다.
곁에 있던 풍천호가 때를 같이해서 말을 했다.
“황상. 이미 놈들의 실력이 기존 금의위보다 강하다는 것이 밝혀졌사옵니다. 그러니 저희 금의위와 삼원에게 일 년의 시간을 더 주시옵소서.”
황제는 시간을 끄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굳이 소수정예를 보낼 필요 없이, 많은 인원을 보내서 쓸어버리면 될 일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을 어렵게 처리하려고 한단 말인가.
그때 곁에서 보고하던 정원 태감이 나섰다.
“황상. 소인이 한 말씀 올려도 되겠는지요?”
“아, 그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난 그냥 대규모 병력을 보내서 일거에 쓸어버렸으면 좋겠는데.”
“황상. 좋은 생각이시옵니다. 하나, 아쉽게도 놈들의 소재를 다 파악하지 못했사옵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 자칫 놈들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놈들이 도망갈 수도 있사옵니다.”
“흠. 그럼 태감 생각에도 소수정예로 가는 게 좋겠는가?”
“소인의 생각이 무에 중요하겠사옵니까. 그저 황상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황제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좋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니라. 삼원도 어서 빨리 그 일을 마무리 짓고 나랏일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황제의 불만은 단순했다.
하늘이 내린 천재를 옆에 두면 자신이 편해진다. 하루라도 빨리 청운에게 관직을 주고 골치 아픈 일을 맡기고 싶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
* * *
황제와 헤어진 후 청운은 둘에게 따로 자리하자고 이야기했다.
청운은 정원 태감과 풍천호 대영반을 따라서 자리를 옮겼다.
널찍한 실내로 이동한 셋은 커다란 탁자에 둘러앉았다.
청운은 일단 찻잔을 들어서 그윽한 용정차로 입술을 축였다.
둘은 청운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기에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청운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이들과 자리한 이유를 밝혔다.
“두 분에게 드릴 것이 있어서 따로 자리를 부탁드렸습니다.”
쓰윽.
청운은 품속에서 두 권의 책을 꺼냈다.
두껍지 않은 얇은 책이었다.
청운은 두 사람 앞에 한 권씩 내려놓으며 말했다.
“무고에 괜찮은 비급이 있어서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제가 필사한 것입니다.”
선물이라는 말에 둘은 서로를 보았다.
청운이 자신들에게 선물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얘기였다.
풍천호가 청운을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삼원,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가?”
“딱히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앞으로 잘 봐주시길 부탁드릴 뿐입니다.”
풍천호는 의심의 눈초리를 버리지 않았다.
자신이 겪어본 청운은 언제나 주고받는 것을 좋아했다. 공짜보다는 정당한 거래를 원했다. 분명히 문언가가 있음이 분명했다.
하지만 따지거나 거부하기에는 선물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진정 그런가?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기네?”
“물론입니다. 저 때문에 고생하셨는데 제가 이 정도도 못 해드리겠습니까. 그저 앞으로 일을 하실 때 신경 써주시면 족합니다.”
“허허. 당연히 그리할 것이네. 어쨌든 고맙네.”
풍천호는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굳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청운과 척을 질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처럼 알아서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데 미워하기보다는 예뻐 보였다.
문제는 정원 태감이었다. 여전히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다.
그런 정원 태감을 보며 청운이 방긋 웃었다.
“하하하. 태감님, 저의 작은 성의입니다. 받아주시지요.”
“삼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받기는 받겠넹. 그래도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한 가지 말씀해주시게.”
태감은 청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선물을 받고 그냥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청운이 건넨 선물은 자그마치 황궁무고에서 나온 비급이었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더군다나 청운이 선물할 정도면 제법 괜찮은 무공이 수록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청운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것 참……. 하하하. 사실 한 가지 청이 있기는 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