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17화
어둠이 내려앉은 공간에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청운이었다.
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와서 주위를 밝혔다.
[오 일이나 지났는데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거지?]
혈황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청운을 내려다보았다.
청운에게 특별한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뿐.
정확한 원인을 모르니 혈황도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 환골탈태를 세 번이나 하다니…….]
청룡과 혈룡이 융화되어서 스며들고 육체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키는 더욱 커졌고 근골은 강해졌으며, 근육은 화산에 빠져도 이상 없다는 곤의 다리 근육만큼이나 질겨졌다.
[이 녀석, 깨어나면 괴물이 되는 것 아닐까?]
문득 궁금해졌다.
육체적으로는 이미 최상의 조건을 갖췄다.
천명신공의 최상승 무리를 중얼거린 걸 보면 뭔가 깊은 깨달음도 얻은 듯했다.
혈황은 청운이 어떠한 깨달음을 얻었는지 궁금했다.
어쩌면 저 괴물 같은 놈은 무리를 깨닫는 와중에도 무공까지 새롭게 정립했을지 몰랐다.
* * *
청운이 정신을 잃은 채 닷새를 보내는 동안 밖에서는 난리가 났다.
처음 이삼 일은 청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비급을 읽느라 늦는다고 생각했다.
학사들은 책에 몰두하면 가끔 식음을 전폐할 때가 있으니까.
그런데 닷새가 넘어도 나오지 않자, 이제는 보고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대영반 풍천호와 나이 먹은 환관이 달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정 소감은 굳게 닫힌 석문을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청운의 신상에 이상이 생겼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대인. 흑흑흑.”
밀려드는 서러움에 대성통곡을 했다. 초췌한 모습에 환관모는 바닥에 떨어져서 아무렇게나 구르고 있었고, 얼마나 울었는지 두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누가 죽었소?”
“니에…… 흑흑. 으, 은인께옵서…… 응?”
정 소감은 화들짝 놀라서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던 정 소감의 두 눈이 놀란 토끼 눈처럼 커졌다.
너무 기뻐서 그때는 정신이 없었나 보다.
“대인!”
정 소감이 달려가더니 청운을 와락 껴안았다.
그러고는 다시 대성통곡을 하며 서럽게 울었다.
“어허, 어찌 그러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 소감의 모습에 측은함을 느낀 청운은 살짝 정 소감의 등을 감싸 안으며 토닥였다.
그때 헛바람 소리가 들렸다.
“헉.”
“이놈! 무슨 짓을 하는 게야!”
“삼원! 어찌 이런 망측한 행동을…….”
청운도 그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얼굴이 붉게 변한 나이 많은 환관이 앞으로 나서며 청운에게 화를 냈다.
“삼원. 어서 그 아이를 놓아주지 못하겠느냐!”
“삼원. 그러면 안 되네.”
풍천호도 나서서 말했다.
청운은 정 소감의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며 돌아섰다.
“오랜만입니다.”
청운은 이들이 자신 때문에 왔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시간이 며칠이나 흐른 것도 몰랐다.
혈황이 시간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다.
그저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청운은 무슨 일인가 싶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정 소감이 울고 있어서 달래준 것뿐이었다.
그런데 왜들 저러지?
“……무슨 말씀이신지?”
청운은 풍천호와 환관의 기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흉측한 물건 당장 치우지 못하겠소!”
“흠흠. 삼원 어서 옷이라도 입게나.”
청운은 그제야 자신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헛! 이런, 수련하다 그만…….”
어색한 표정을 지은 그는 돌 탁자에 있는 옷을 주섬주섬 걸쳤다.
청운이 옷을 걸치자, 가만히 노려보고 있던 환관이 이를 부드득 갈며 청운을 몰아붙였다.
“아무리 삼원이라지만 감히 환관을 건들다니, 무사할 성싶소?”
“무슨 말씀이시오? 건들다니?”
“흥. 오리발을 내밀겠다는 게요? 여기 증인이 있는데!”
“무슨 증인 말이오?”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청운의 표정에 노환관은 버럭 화를 냈다.
“호호홍. 내 삼원이라 하여 대단한 기재인 줄 알았더니 인두겁을 쓰고 있는 게로구나.”
“말씀이 지나치시구려.”
“오냐! 네놈이 아무리 황상의 총애를 받는다지만, 내 이대로 끝내지는 않을 게야! 뭣 하는 게야! 정 소감은 이리로 오지 않고.”
정 소감이 주춤거리며 노환관이 있는 곳으로 갔다.
노환관은 청운을 다시 노려본 후 횅하니 돌아섰다.
곁에서 지켜보던 풍천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삼원, 오늘은 그만 물러나겠네. 그나저나 그런 취향이신 줄은 몰랐네. 하하하.”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돌아선 풍천호를 보며 청운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환관은 청운을 째려본 뒤 정 소감을 데리고 그곳을 나섰다.
정 소감 역시 뒤를 힐끔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청운이 측은한 마음에 한마디 했다.
“걱정 말게. 내가 책임질 것이니. 그러니 나를 믿고 안심하게, 정 소감.”
노환관이 어깨를 부르르 떨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에이이잉…….”
* * *
사방에서 빛이 흘러 들어와서 어두운 석실을 밝게 비추었다.
거울을 이용해서 빛을 지하까지 끌고 내려오는 기술은 인세에 보기 힘든 기적과 같았다.
돌로 만든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내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한 사내는 청운이었고, 다른 한 사내는 풍천호 대영반이었다.
한동안 무겁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쉬운 사람이 먼저 입을 열게 되어 있었다.
“삼원. 기연이라도 만났나 보구려.”
“기연이랄 것도 없습니다.”
청운의 말에 풍천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청운을 살폈다.
훤칠해진 키와 백옥처럼 빛나는 피부는 처음 청운의 모습과 달랐다.
머릿결은 검은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기름이라도 발랐는지 살짝 살폈지만,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다.
피부 역시 잡티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화장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그도 아니었다.
신체 역시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근골이 갑자기 변한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혹시 말일세……. 환골탈태했는가?”
“아닙니다.”
“그런가? 이상하군. 내가 전에 자네를 살폈을 때와 많이 달라져 있는데…….”
이렇게 급격한 몸의 변화는 오직 환골탈태밖에 없다. 개정대법을 받고 몸의 노폐물을 제거하면 이렇게 변할 수도 있지만, 누가 이곳에서 청운에게 개정대법을 펼쳐주겠는가.
그래도 확인은 해야 했다.
풍천호가 청운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누구 다른 사람이 이곳에 들어온 적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그래? 혹시 동창의 인물들은 안 왔나?”
“동창의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청운의 말에 풍천호가 피식 웃음 지었다.
“왜 있지 않은가? 정 소감 말일세.”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럼 정 소감이 동창의 사람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아! 그 이야기도 해줘야겠군. 정 소감이 이번에 동창으로 발령 났네. 그러니 지금은 동창 사람이지. 모습은 그리 어려 보여도 십 년은 더 나이가 있는 친구야. 자네보다 나이가 많을걸? 후후.”
풍천호는 청운을 물끄러미 보며 여전히 무언가를 살폈다.
청운은 끈적이는 이질적인 기운에 기분이 나빴다. 당장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상대는 금의위의 수장인 대영반이기에 참았다.
“축하할 일이군요.”
“그런가? 나는 자네가 아쉬워할 줄 알았는데?”
“영전했는데 아쉬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지인이 잘되면 좋은 일이지요.”
“하하하. 그런가? 당분간 정 소감을 볼 수 없는데도?”
순간 청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안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비밀을 알고 있는 정 소감을 제거하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대영반. 분명히 제 사람이라 했을 텐데요.”
“후후. 잘 알고 있네. 이번 일 때문에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네.”
풍천호는 청운을 안심시켰다.
생각하고 있는 방향은 약간, 아니 많이 달랐지만.
“그럼 왜 볼 수 없다는 것입니까?”
“쯧쯧쯧. 아무리 보고 싶어도 그렇지…….”
풍천호는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듯이 청운을 보았다. 그러고는 청운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동창이 되면 수련을 해야 한다네. 모종의 장소에서 수련을 해야 하지. 보통은 어릴 때부터 뽑아서 가르치는데, 나이가 있는 정 소감이 뽑힌 건 이례적인 일이네.”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다행입니다. 잘 있는 것 같으니 나중에 보면 되겠지요.”
동창이 황실을 수호하는 비밀조직이라는 것 정도는 청운도 알고 있었다. 여러 가지 특혜가 주어지는 것도 알기에 정 소감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풍천호가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하하하. 자네 취향이야 내 뭐라 할 말은 아니네만, 그래도 소문이 더럽게 날 수도 있으니 조심하게. 크흠.”
“오해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하하하. 알겠네. 나는 다 이해한다니까.”
그날의 상황은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일이었다.
‘하아, 이거 참…….’
그때 풍천호가 얼굴에서 장난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어째서 내가 말한 무공은 주지 않는가?”
“못 찾았습니다. 알려주신 곳의 서가를 모두 뒤졌지만 그런 이름의 비급은 없었습니다.”
“정말인가?”
“믿지 못하실 거 같으면 함께 들어가서 보시죠.”
청운의 말에 풍천호는 달려 들어갈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가 아무리 금의위 대영반이라 해도 황제의 허락 없이 황궁무고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설마… 자네가 숨긴 것은 아니겠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인지 모르지만, 마경이라 쓰인 비급을 숨겨서 뭐하겠습니까? 여기 엄청난 비급들이 굴러다니는 거 안 보이십니까?”
“으음.”
풍천호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구룡마경은 모르는 자에게 가치가 없었다.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 같은 내용이 적혀 있을 뿐이니까.
학사였던 청운이 그에 대해서 알지는 못할 터.
그럼 대체 구룡마경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때 청운이 슬쩍 풍천호를 떠봤다.
“그 비급이 무엇이기에 그러십니까?”
“알 것 없네.”
“아직 시간이 며칠 남았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제가 다른 것 다 포기하고 한번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만.”
풍천호는 잔뜩 찡그린 얼굴을 폈다.
“정말인가?”
“못 해드릴 것도 없지요. 대신…… 일 년의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일 년? 설마 여기에 일 년이나 더 있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곳을 나서면 황제 폐하께서 곧장 명을 수행하라 하실 겁니다. 그 일을 일 년만 유예해달라는 말입니다. 제가 아직 무공에 미숙해서 수련할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화들짝 놀랐던 풍천호의 표정이 펴졌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네. 무공이라는 것이 비급만 외운다고 고수가 되는 건 아니지.”
청운은 풍천호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몰아쳤다.
“대영반, 어찌하시겠습니까?”
“좋네. 단, 자네가 구룡마경을 구해준다는 전제하에 허락을 받아내겠네.”
풍천호는 청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구룡마경은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서 찾아보겠습니다.”
풍천호가 돌아가고 홀로 남겨진 청운을 향해서 혈황이 말했다.
[잘했다. 일 년이면 네가 외운 무공 중 몇 가지는 익힐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구룡마경이 무엇이기에 저리 욕심을 내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