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화
그르릉.
문이 묵직한 굉음을 내면서 옆으로 밀려났다.
청운은 문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수많은 서가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벽면에도 돌로 만든 탁자가 길게 늘어서 있고, 종류를 헤아릴 수 없는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규모가 엄청나군. 이 모든 것이 비급이란 말인가?]
혈황은 자신의 생각보다 규모가 큰 서고를 보며 감탄했다.
이런 서고가 두 개나 더 있었다.
“저는 이쪽부터 살펴볼 테니까, 괜찮은 무공이 있으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오.”
[알았다. 옛날 것은 내가 좀 알지.]
혈황은 수십 년간 강호를 질타했었다. 정파의 무공을 가르쳐주지는 못해도 강한 무공을 골라내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날 밤.
청운은 널찍한 지하 공터에서 음식을 가져온 사람을 마주하고 눈을 크게 떴다.
“대이인, 이제 나오시옵니까?”
“이곳에는 어쩐 일인가?”
정 소감이었다.
공터에는 음식과 갈아입을 옷가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한쪽에는 통이 있었고 그 통에는 물이 담겨 있었다.
“당분간 소인이 대인의 수발을 들기로 하였사옵니당.”
함박웃음을 짓는 정 소감을 보며 청운도 미소를 지었다.
“대영반이 보냈는가?”
“니에, 대인과의 인연이 있어서 소인이 뽑혔사옵니다.”
정 소감이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음식을 가리켰다.
“대인, 음식부터 드십시용.”
청운은 탁자에 앉아 음식을 먹었다. 곁에서 정 소감이 이것저것 먹어보라며 살갑게 대했다.
“대인, 이 음식은 오향육이옵니다. 돼지고기에 갖은 양념을 하고 만들 것이옵니당. 칠 숙수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 황상께옵서도 즐겨 드시는 음식이옵니당.”
검붉은 진한 양념에 돼지고기와 채소가 들어간 오향육은 부드럽고 간이 잘 배어 있었다. 청운의 입맛에도 딱 맞는 음식이었다.
“맛있군. 자네도 함께 들게.”
“아니옵니당. 소인은 이곳에 오기 전에 먹었사옵니당.”
정 소감은 몸을 비비 꼬며 사양했다.
청운은 피식 웃으며 식사를 했다.
‘저럴 때는 영락없이 여자 같군.’
* * *
황궁무고의 생활은 단순했다.
하루에 두 번, 정 소감이 차려준 음식을 먹고 서고에서 혈황이 골라낸 비급을 읽었다.
처음에는 비급을 읽고 외우는 속도가 느렸다.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비급들은 은유적인 비유가 너무 심했다.
더욱이 각 문파나 세력마다 사용하는 단어가 달랐다.
다행히 혈황은 이러한 부분들을 폭넓게 알고 있었다. 덕분에 무공에 대한 지식이 쌓이면서 비급을 읽는 속도가 빨라졌다.
혈황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혈황은 비급을 보면서 청운에게 하나하나 풀이해 줬다.
청운의 무공에 대한 이해력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다.
절대종사로 불릴 만큼 혈황의 무공에 대한 지식은 방대했다. 그러한 지식이 하나씩 청운에게 전수되니 진정한 기연은 황궁무고가 아니라 혈황일지도 몰랐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네요.”
[하하하. 그걸 다 기억하는 네 녀석은 어떻고.]
혈황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두 혈황님 덕분입니다. 비급을 잘 풀이해주시고 기초를 잡아주셔서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래도 네 녀석같이 뛰어난 머리의 소유자는 처음 본다.]
이미 풍천호가 부탁한 무공 열 가지는 찾아내서 외웠다. 풍천호가 행방을 파악하지 못한 비급도 찾아냈는데, 혈황이 그 비급을 보고 경악했다.
[허어, 이게 여기에 있었다니. 과연 황궁무고구나.]
“아는 무공입니까?”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른다고 할 수 있지. 어쨌든 이 무공을 건네주는 것은 신중히 고민해 보도록 해라.]
“약속했으니 주긴 줄 생각입니다만, 그냥 주지는 않을 겁니다.”
혈황은 세 개의 서고에서 백팔 권의 무공비급을 추려냈다.
모두가 상승의 절기가 적힌 비급들이었다.
개중 세 가지 무공은 구결이 워낙 심오해서 화경에 오른 고수가 아니면 찾을 수조차 없는 절세의 무공비급이었다.
오죽하면 그걸 발견하고 혈황조차 침을 흘릴 정도였다.
칠백 년 전 무성이라 불렸던 천은자의 천명신공
삼백 년 전 천하제일 대도 무영신투의 비천무영신법.
사백여 년 전 천하제일검으로 추앙받았던 천세검존의 환우구검.
이미 사라졌다고 알려진 무공이 황궁무고에 있을 줄이야.
혈황은 추려낸 무공을 해석해 주었고, 청운은 열심히 외웠다.
놀라운 것은, 혈황이 해석해준 무공을 융화시켜 청운이 다른 형태의 무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혈황은 대답해주기 위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만 했다. 심지어 가끔은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끄응,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보름째 되던 날 아침, 다른 환관이 식사를 가져왔다.
“대인. 오늘부터 정 소감 대신 소인이 모시겠사옵니다.”
순간 청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정 소감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런데 환관이 묘한 표정으로 넌지시 말했다.
“대영반의 청으로 태감께서 지시하신 일이옵니다.”
그 말에 청운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영반이 청했다고?’
청운은 어렴풋이나마 대영반이 자신과 친한 정 소감을 빼돌린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했다.
‘나를 못 믿겠다는 건가?’
하긴 금의위의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무언가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싶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아야 했어.’
혈황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알려줘라.]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풍천호가 부탁한 무공을 외우고 난 후 심심풀이로 혈황과 함께 단점과 장점을 파악했다.
그런데 풍천호가 그렇게 나온다면 굳이 모든 걸 알려줄 필요가 없었다.
* * *
혈황과 청운이 황실무고에 들어온 지 어느덧 십팔 일이 지났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를 만큼 무공에 미쳐 있던 시간이었다.
“우아아!”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을 뚫고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두 팔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발한 인물은 청운이었다.
혈황은 뒷짐을 지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도 슬쩍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징그러운 놈. 그걸 다 외우다니.]
“하하하. 모두 혈황님 덕입니다.”
[보름 만에 백팔 가지 무공을 외우고, 그것도 모자라서 내용까지 파악했다고 하면 아마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혈황도 만족했다.
일차 목표를 달성했으니 복수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간 셈이었다.
이제 두 번째 목표를 정하고 달려갈 시간이었다.
“혈황님, 이제부터는 뭘 하는 게 좋겠습니까?”
[이제 하루의 절반은 수련을 하고, 남은 시간은 비급을 읽도록 하자.]
청운도 찬성했다.
몸이 버틸 수만 있다면 온종일이라도 수련을 하고 싶었다.
특히 내공을 기르기 위해서 운공조식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싶었다.
최근 들어서 몸에 웅크리고 있던 뇌기의 힘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상승의 무리를 지속적으로 해석하다 보니 무의식중에 진기의 흐름이 그에 맞춰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고른 무공은 대부분 정파 쪽의 절기들이 아니던가. 아마도 그로 인해서 정기에 가까운 뇌기가 더욱 강해진 듯했다.
처음에만 해도 그는 진기가 빠르게 강해지자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만 노력하면 나갈 때쯤 상당한 내공을 얻을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 * *
그 일이 벌어진 것은 운공수련에 집중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크윽.”
청운은 이를 앙다물었다.
빠직, 빠지지지직.
청운의 몸에서 푸른 번개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어 붉은 아지랑이들이 스멀스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뇌기가 강해지자, 청운의 몸에 잠복해 있던 혈황신공의 혈기가 위기를 느끼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든 것이다.
단순히 고개만 쳐든 것이 아니었다. 강해진 뇌기를 몰아내려는 듯 맹렬하게 부딪쳐 갔다.
뇌기도 지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반발했다.
‘이, 이런……!’
후아아아악!
빠지지지직!
청운은 두 기운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진정되기는커녕 두 기운의 충돌은 점점 더 거세졌다.
[저, 저런!]
혈황은 청운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폭풍 같은 기세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곧 또 다른 이유로 놀라야만 했다.
크아아앙.
어디선가 커다란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청운의 몸에서 뻗어 나온 뇌기가 푸른 청룡으로 변하더니 용트림을 했다.
전에 이미 한 마리를 만들어냈던 청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두 마리였다.
[허어! 뭐 저런 놈이…….]
혈황이 평생에 걸쳐서 이룩한 경지가 구두룡이었다.
혈황신공의 오의가 담긴 아홉 마리의 혈룡을 끌어내면 적수가 없었다. 그런데 청운이 어느새 청룡을 두 마리나 만들어낸 것이다.
그에 대항하듯 이번에는 붉은 혈기가 혈룡으로 변해서 청룡과 뒤엉켰다.
[서, 설마……?]
혈황은 문득 떠오른 어떤 생각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청룡과 혈룡이 뒤엉키면서 청운의 몸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청운이 나름 노력했다고 하나, 아직 그의 육체는 거대한 두 기운을 받아낼 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저러다 혈맥이 터지기라도 하면……!
복수고 뭐고 공염불이 된다.
[정신 차려, 이놈아아아아!!]
혈황이 고함을 질렀다.
청운에게만 들리는 고함.
청운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청룡과 혈룡은 주인의 몸이야 어떻게 되든 뒤엉켜서 풀어질 줄 몰랐다.
풀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웠다.
크아아앙!
콰우우우우우!
찌지지지직!
그 바람에 청운의 옷이 가루가 되어서 먼지처럼 날렸다.
혈황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이 떨거지 같은 잡룡들이!]
눈을 치켜뜬 그가 무의식중에 반사적으로 두 손을 뻗었다.
화르르르르!
그에게서 뻗어 나온 기운이 청룡과 혈룡 사이로 스며들었다.
외부에 실질적으로 드러나는 힘은 아니었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청운의 내부 힘에는 작용했다.
청룡은 적대적인 기운 때문에 멈칫했고, 혈룡은 본래의 주인에게 대들지 못해서 주춤거렸다.
혈황은 그나마 남아 있는 혈황신공의 기운을 이용해서 청룡과 혈룡을 압박했다.
청룡과 혈룡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졌다.
그렇게 일각쯤 지났을 때였다.
정신을 잃은 것처럼 아무런 반응도 없던 청운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중얼거림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청운을 빤히 바라보던 혈황의 눈매가 잘게 떨렸다.
[저, 저 구결은…….]
청운이 무엇을 중얼거리는지 눈치를 챈 그는 허탈감마저 들었다.
황궁무고에서 골라낸 무공 중 혈황의 욕심을 채워줄 만한 것은 세 가지뿐.
그중 하나가 바로 천명신공이었다.
지금 청운이 중얼거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천명신공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구결의 핵심 무리였다.
자신조차 몇 번이나 읽고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거늘.
청운은 그 어려운 무리를 천자문 읊듯이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중얼거림이 길어지면서 청룡과 혈룡이 청운의 몸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청운의 몸에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혈황은 그러한 현상의 정체를 깨닫고 침을 꿀꺽 삼켰다.
융화!
상극이나 다름없는 두 기운이 서로를 인정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되지?
혈황도 결과를 알 수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절대 나쁜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쓰벌…….]
나쁘기는커녕 혈황의 입에서 욕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기연 중의 기연이었다.
혈황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청운을 지켜보았다.
‘이러다 진짜 괴물이 되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