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14화
“늦은 시간인데 이 시간까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이.”
“아니옵니당. 그래도 오늘은 다른 때보다 일찍 들어오셨습니당.”
해시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깊은 밤은 아니지만 주위가 어둑해져 있었다.
청운은 정 소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차를 한 잔 따라서 목을 적셨다.
청운이 차 한 잔을 마시고 나자 정 소감이 들뜬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은인께옵서 대단한 분이실 줄은 알았지만 설마 그분이실 줄은 몰랐사옵니당.”
“하하하. 사정이 그러한데 어쩌겠는가. 나도 살아야지 않겠는가.”
청운은 그동안 정 소감을 통해서 귀비에게 환심을 사는 일을 했다. 자신의 그림과 글씨, 그리고 은자를 주었다.
처음에는 낙관이나 서명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기풍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지만 귀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정 소감도 청운이 귀비에게 잘 보여서 무언가를 도모하려고 하는 줄 알았다. 여러 가지 청탁을 이런 식으로 해오는 자들이 제법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젯밤에 마지막으로 청운이 정 소감에게 글을 써줬다.
이번에는 그림에 서명을 해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지니고 있던 삼원진사패도 넘겨주며 황제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정 소감은 처음 보는 삼원진사패를 그저 옥패 정도로만 알았다. 그저 무언가 사연이 있는 물건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청운은 귀비에게도 보여주지 말라며 서찰 한 장을 잘 밀봉해서 주었다.
황제가 옥패를 알아보면 보여드리라며 신신당부했다.
“삼원진사패가 진품임이 판명되었사옵니당. 황상께옵서 단번에 알아 보셨사옵니당. 주신 서찰을 보시더니 대노하셨사옵니당.”
“어허, 이런 불충이 있나.”
“니에. 사흘 후 해시 무렵에 저와 함께 가실 곳이 있사옵니당.”
“고맙네. 내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네.”
청운의 감사 인사에 정 소감이 환하게 웃었다.
황궁에서 연줄이 있고 없음의 차이는 너무나 컸다.
관리가 되었든 환관이 되었든 돈과 인맥이 없으면 좋은 자리로 품계를 올리기가 요원했다.
그런데 그는 청운이라는 굵은 동아줄을 잡은 것이다.
수백 년 만에 나온 삼원.
청운은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나라의 동량이었다.
앞으로 수많은 고위 관리들 역시 청운을 자신들 편으로 만들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소인은 이만 일어나겠사옵니당. 다시 환궁을 해야 하옵니당.”
“그래? 늦었으니 내가 데려다주겠네.”
“아니옵니당. 이목이 있사오니 당분간 객잔에서 나가시지 않았으면 좋겠사옵니당.”
황제를 알현할 때까지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더욱이 정 소감은 청운의 기행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옵고, 당분간 싸움은 안 하셨으면 하옵니당.”
“싸움이 아니라 수련이라니까 그러네.”
“그 수련, 이곳에서만 하시옵소성. 폐하를 뵈올 때까지는 참으셔야 하옵니당. 지금도 얼굴이 엉망이옵니당.”
청운은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근질거리기는 하지만 사흘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황제를 알현할 때까지 조심할 필요도 있었다.
“알겠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내 따르겠네.”
정 소감은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았다.
앞으로 황궁 생활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럴 때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뻔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환궁하겠사옵니당.”
짧은 인사와 함께 정 소감이 객잔을 빠져나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청운은 자신을 보고 있는 혈황을 보며 입을 열었다.
“볼일 봤으니 나가죠.”
[응? 안 나간다면서?]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던 혈황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운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놀렸다.
“에이, 왜 이러세요. 알면서.”
[……미친놈.]
◈ ◈ ◈
황도에는 여러 개의 궁이 있다.
황제가 기거하는 황궁과 요양이나 연회를 위해서 필요한 궁도 따로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이화원이라는 곳이 유명했다.
황도에 항주와 서주를 본 따서 거대한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호수를 만들면서 파낸 흙을 쌓아서 산을 만들었다.
그 산이 만수산이고, 만수산 위에 이화원이라는 궁을 지었다.
만수산의 석고대 위에 만들어진 불향각은 그 높이가 십오 장에 달했다. 그 웅장함은 이화원의 자랑이었다.
늦은 밤이건만 불향각의 맨 위층인 삼층에 불이 밝혀졌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늦은 시간이건만 일단의 인물이 모여 있었다.
곤룡포를 입은 황제가 중앙의 용상에 앉아서 한 사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저분한 옷을 입은 사내였다.
황제를 알현하기에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
황제는 얼굴을 찌푸릴 만도 하건만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사내의 숙였던 상체가 들려졌다. 그가 반듯하게 앉으며 황제를 향했다.
“허허. 진정 삼원이로구나.”
“송구하옵니다, 폐하!”
지저분한 옷을 입고 있는 사내는 청운이었다. 관복으로 갈아입고 와도 되건만 정 소감은 반대했다.
황제의 감성을 자극할 필요가 있다면서 누더기나 마찬가지인 옷을 입고 오게 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다른 자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관복이나 반듯한 학사의를 입고 온다면 누군가 알아볼 수도 있었다.
여기 오면서 수문장에게는 새로운 환관이 될 자라고 했다. 그러고는 신무문에 딸린 쪽문을 통과했다.
이미 그에 관련된 명령서를 만들어둔 상태였다. 이 일에도 은자가 들어갔지만 그리 많은 돈이 들지는 않았다.
황제는 청운의 모습에 울컥 노기를 띠었다.
“감히 누가 삼원을 이리 만든 것이더냐?”
청운은 황제에게 자초지종을 소상히 알렸다.
자신을 산속에서 공격한 자들을 알렸고,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금의위들이 목숨을 건 일도 알렸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서 어둠 속을 보았다.
“대영반!”
“신 풍천호, 여기 있사옵니다.”
굵은 목소리의 힘 있는 중년 남성의 음성이 울렸다. 이내 어둠 속에서 스르르 한 인물이 나타나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놈들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감히 나라의 큰 인물을 죽이려 하고, 짐의 병사들을 상하게 하다니. 구족을 멸할 것이다!”
“폐하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옵니다!”
풍천호가 부복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금의위 수장인 풍천호는 청운의 일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자신의 부하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탐문수색을 벌였지만 어디에서 사라졌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렇게 속만 끓이고 있었는데 청운이 살아서 돌아왔다.
청운에게 사정을 들은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당장 그놈들을 쳐 죽일 생각밖에 안 들었다.
황제가 무언가 명령을 내리려고 할 때 청운이 나서며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의 말을 잠시 들어주시옵소서.”
황제는 찌푸렸던 얼굴을 풀며 온화한 표정으로 청운을 보았다.
“그래, 무엇이더냐. 무엇이 되었든 이야기해 보거라.”
황제는 청운을 총애했다. 백 년 만에 나타난 삼원이라는 존재는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첫 만남에서 대신들과 학문을 논하는 모습을 보고 반했었다.
정기 넘치는 눈과 청아한 목소리로 공맹을 이야기하며 대신들을 압도했었다. 그는 청운이 과연 하늘이 내린 기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폐하! 신에게 원수를 직접 갚을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쿵!
청운은 바닥에 머리를 박으며 절했다.
황제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청운을 보았다.
거지꼴로 돌아와서 은밀하게 자신을 찾아온 청운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복수를 직접 하고 싶다는 말이로구나. 좋다! 병사들을 붙여줄 것이니 직접 처리하거라.”
황제는 흔쾌히 청운의 청을 수락했다.
어차피 싸움은 청운이 할 것이 아니었다. 청운의 명령에 금의위 위사들이 나서서 처리할 일이었다.
그러나 청운은 제차 황제에게 주청을 올렸다.
“폐하. 저를 공격한 자들 중에는 무림인들도 있었사옵니다. 금의위 위사들이 당해내지 못할 만큼 엄청난 실력을 갖춘 자들이었사옵니다.”
“금의위를 능가하는 무림인들이라…….”
황제는 말을 흘리며 곁에 부복해 있는 풍천호를 보았다. 풍천호는 황제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더니 청운을 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삼원. 금의위를 무시하는 것인가?”
“아니옵니다. 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이들이옵니다. 어찌 제가 그리 생각하겠사옵니까.”
풍천호 대영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삼키며 조용히 물었다.
“그럼 무엇인가?”
“그놈들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옵니다. 자칫 강력한 세력을 가진 무림세력이라면 많은 희생이 따를 수 있사옵니다.”
관부의 무인들보다 무림인들의 실력이 높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무림인들이 황실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황실에는 백만 황군이 존재했다. 게다가 무림인조차 두려워하는 병기와 뛰어난 병법이 있었다.
황군이 작정하고 공격하면 아무리 거대문파라 할지라도 하루를 버티지 못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풍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청운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금의위로 부족하면 병사들을 동원하면 되네. 하늘을 덮는 화살비에 살아남을 자들은 많지 않으니.”
“오군도독부의 병사들을 동원한다면 놈들이 눈치채고 몸을 숨길 수도 있사옵니다. 더욱이 놈들이 숨기라도 한다면 찾아내기 힘들 것이옵니다. 천하는 넓으니까요.”
문제는 그것이었다. 정면대결이라면 얼마든지 놈들을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먹고 숨어버리면 복수가 요원해진다.
“흐음.”
풍천호는 침음성을 흘렸다.
청운의 말대로 천하는 넓었다. 촉산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라도 하면 사실상 공격하기가 불가능했다.
“병사들을 동원하되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사옵니다. 놈들이 도망친다 할지라도 끝까지 찾아가서 금의위들의 넋을 달래야 하옵니다.”
풍천호는 청운을 보며 생각을 빠르게 정리했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 그가 눈빛을 묘하게 번뜩이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가 앙다문 입술을 비집고 말했다.
“황상. 삼원의 말대로 당장 놈들을 쳐서는 안 될 것 같사옵니다.”
다 듣고 있던 황제는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풍천호를 보았다.
풍천호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아는 황제였다. 그의 성격상 청운의 청을 물리고 당장 놈들을 잡아들이자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성질을 누르고 있지 않은가.
“놈들의 정체부터 파악하자는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부하들의 죽음으로 분노하고 있던 풍천호가 화를 참으며 한발 물러서자, 황제는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청운에게 물었다.
“삼원은 계획이 있느냐?”
“예, 폐하. 모든 계획은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문제는 아직 제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옵니다.”
“응? 그건 무슨 말인가?”
“신은 직접 놈들을 상대하고 싶사옵니다.”
“뭐라? 그럼 경이 직접 놈들과 싸우겠다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폐하!”
“허허허.”
황제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평생 글만 읽은 학사가 직접 검을 들겠다는 말이다.
그 기개는 가상했지만 들어줄 수 없는 청이었다.
그런데 청운이 의외의 말을 꺼냈다.
“폐하. 신은 사실 무공을 익히고 있사옵니다.”
“뭐라?”
“응?”
황제와 풍천호가 동시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백면서생인 줄 알았던 청운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렇다고 삼원을 한 청운이 거짓을 고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황제는 풍천호를 보았다. 청운이 무공을 익힌 것이 맞는지 묻고 있었다.
풍천호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청운을 자세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공을 익히면 툭 불거져 나오는 태양혈이 밋밋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에게 말했다.
“황상. 어떤 무공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사오나, 삼원의 근골이 뛰어난 건 사실이옵니다. 자세한 건 직접 살펴야 알겠지만 거짓은 아닌 듯 보이옵니다.”
“하하하, 삼원이 문무를 두루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군.”
황제는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풍천호가 뛰어나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저 그런 실력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삼원은 짐을 보아라.”
엎드려 있던 청운이 상체를 새우며 황제를 보았다.
황제가 근엄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자신 있느냐?”
“신, 제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황제 폐하의 근심을 없애고, 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금의위의 넋을 꼭 달랠 것이옵니다.”
청운은 결의에 찬 표정과 음성으로 황제를 설득했다.
황제는 가만히 청운을 내려다보았다.
금의환향하고 돌아오라 했더니 다 떨어진 거지꼴로 나타났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여전히 청운이 예뻐 보였다.
그렇다고 그냥 들어줄 수는 없었다. 너무 위험한 임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황제가 망설이고 있을 때 청운이 입을 열었다.
“폐하,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엇이더냐?”
“소인으로 하여금 황궁무고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