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12화
“은인께 송구하오나 그건 말씀드릴 수 없사옵니다.”
“아, 그렇겠군. 미안하이. 하하하.”
청운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무안함을 털어냈다.
황제에 관한 일은 비밀이었다. 괜한 구설수에 올라서 좋을 게 없었다.
그래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지만, 이런 객잔에서 환관복을 입고 떠들 일도 아니었다.
청운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다른 주제를 꺼내 들었다.
“아참, 환관이 되면서 받은 성은 무엇인가?
“니에. 소인 정씨 성을 받았사옵니다.”
보통 환관이 되면 기존에 쓰던 성이나 이름을 바꿨다. 백성들의 이름 중 천한 이름을 쓰는 자들이 많았다.
어려서 죽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민간에서는 이를 두고 귀신이 데려간다는 민간신앙이 퍼져 있었다. 오래 살려면 이름이 천하고 더러워야 귀신이 안 데려간다는 신앙이었다.
“호. 좋은 성을 받았군. 그럼 정 소감이라 불러야 하는가?”
“편하실 대로 부르시옵소성”
얼굴을 붉히며 무엇이 부끄러운지 입가를 가리는 정 소감이었다.
한참을 신변잡기에 관해서 이야기하며 궁에서의 삶을 간간이 이야기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거운 시간이 빛살처럼 빠르게 흘렀다.
“소인 은인과 대화를 더 즐기고 십사오낭, 이제 환궁해야 할 시간이옵니당.”
“이런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군. 허허. 내 정 소감과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몰랐네. 미안하이.”
“아니옵니당. 혹 어디 사시는지 알 수 있는지용.”
“오늘 황도에 들어왔다네. 당분간은 이곳에서 지낼 것이니 시간이 날 때 이곳에 들르게.”
“알겠사옵니당.”
청운은 정 소감과 작별을 했다.
정 소감이 떠나고 잠시 후 혈황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놈은 왜 실실 웃는 거냐? 얼굴까지 붉히면서?]
“어릴 때는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웃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마 세상일이 다 즐거운가 보죠.”
[하긴 고추도 없는데 웃으면서 살아야지.]
측은한 눈빛으로 떠나간 정 소감의 자리를 내려다보는 혈황이었다.
“당분간 이곳에 머물면서 정 소감의 환심을 사야겠습니다.”
[환심? 이미 넘치는 것 같던데?]
혈황의 말대로 정 소감은 청운에게 과하게 고마움을 표현했었다.
“도움을 받았으니 절반은 넘어온 것이겠죠. 그래도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칫 정 소감이나 그 윗선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환심을 사는 일에 주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흐음…. 좋다. 그럼 어떻게 환심을 살 것이냐?]
“두고 보십시오. 환관들의 삶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들의 권력욕과 소유욕은 탐관오리들보다 더하다고 합니다. 그것을 충당해주면 될 겁니다.”
환관들에게 유일한 낙은 권력과 돈이었다. 그들의 돈에 대한 집착은 부족한 남자의 기능을 대신했다.
[흠…. 돈이 필요하겠군. 돈이라면 예전에 숨겨놓은 비밀금고가 있기는 한데…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가까운 곳인가요?”
“이곳에도 있었을 텐데, 너무 변해서 어딘지 모르겠다. 중원 여러 곳에 숨겨뒀었지. 따로 사업을 하던 곳도 있었는데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고.”
천하를 지배하던 곳이 천교였다. 그런 천교에는 비밀지부와 비밀창고가 따로 존재했다.
중원 곳곳에 숨겨둔 비밀금고를 아는 인물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고, 그중에는 혈황 혼자만 아는 곳도 존재했다.
“흠. 그곳들은 나중에 시간 내서 찾아보는 거로 하시죠. 남아 있을지 없어졌을지 모르니까요. 당장 필요한 돈은 글씨나 그림을 팔아서 벌겠습니다.”
원수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청운이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조심스러움이라면 자신의 복수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놈들, 상대를 잘못 골랐군.]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흘러도 괜찮다고 했습니다. 보여줘야죠. 그들이 누구를 건든 것인지.”
* * *
다담객잔에 여장을 푼 청운은 별채를 따로 구해서 생활을 시작했다.
별채를 구하는 데 제법 많은 돈이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청운은 돈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만들 재주가 있었다.
청운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흠. 차라리 열두 폭 병풍으로 하지 그러느냐. 그러면 돈이 더 많이 될 것 같은데.]
혈황은 청운이 그린 그림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에 조예가 없는 자신이 봐도 웅장하며 힘이 있는 그림이었다.
청운은 총 두 장의 그림 외에도 두 장의 글씨를 써놓았다.
“병풍은 나중에 큰돈이 필요할 때 그릴 생각입니다. 지금은 황상을 뵙는 게 우선이니까요.”
공가에서 받은 여비가 바닥을 보였다. 황제를 알현하기까지 며칠이 걸릴지 몰랐다. 그러니 당장 사용할 돈이 필요했다.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정 소감을 보고 정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정 소감이 언제 올지 모르겠군요.”
[아마 밤이 되기 전에 올 거다.]
“아침에 해어졌는데 벌써 오겠습니까?”
[내가 볼 때, 네놈 얼굴을 보기 위해서 당장에라도 달려올 것 같은데?]
“그럼 좋죠. 돈도 떨어졌는데.”
혈황의 생각대로였다. 정 소감은 유시가 되기 전에 청운을 찾아왔다.
한 손에 비단 보따리를 들고서 청운을 보며 방긋 웃었다.
“은인. 이렇게 다시 뵈니 너무도 좋습니당.”
“정 소감, 어서 오시게. 이거 아침보다 더 혈색이 좋아졌군.”
“호호홍.”
정 소감은 청운의 칭찬에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음 지었다.
그런 모습에 혈황이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환관 놈들은 자기들이 여자인 줄 안다니까, 쯧쯧.]
정 소감이 교태를 부리는 듯한 모습이 별로 달갑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린 녀석이라 귀엽기는 하군.]
혈황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관심이 없는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서 이리 들어오게.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마침 차를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차부터 한잔하세나.”
“니에.”
청운은 정 소감을 끌고 자신의 별채로 들어섰다. 방 안에는 묵향과 차향이 가득했다.
청운의 뒤를 따라서 들어온 정 소감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한쪽에 걸려 있는 기다란 줄에 늘어뜨려진 그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머나. 이게 다 무엇이옵니까?”
“마침 시간이 남아서 한번 그려보았다네.”
“진정 은인께옵서는 대단하신 분이시옵니당. 소인 어찌 은인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당.”
정 소감은 그림 앞으로 쪼르륵 달려가서 황홀한 눈빛으로 그림을 살폈다.
한눈에 보아도 대단한 대가의 그림이었다.
한참 동안 그림을 보던 정 소감은 왼편을 보더니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은인, 어찌 낙관을 하지 않으셨사옵니까?”
“낙관을 함부로 하기도 뭐해서 하지 않았네. 내 고유 화법으로 그린 것은 아니고, 약간 틀었는데 제법 괜찮은 그림이 나왔지 뭔가.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낙관이 오히려 방해가 될지도 몰라서 말이야.”
“아! 니에, 니에.”
정 소감은 청운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글씨나 그림 모두 누가 그리고 쓴 것인지 알 수 있다. 특유의 서체와 화법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운은 자신의 고유기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그렸다는 낙관도 하지 않았다.
이 말은 다른 이에게 그림을 팔겠다는 말이었다.
이런 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이들은 가끔 대가에게 은밀히 부탁하기도 했다.
대가는 자신들의 화법이 아닌 새로운 화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을 산 자들은 병풍으로 사용하거나 족자를 만들어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놓았다.
정 소감은 남루한 청운의 옷차림 때문에 돈이 될 만한 것을 준비해서 가져왔건만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손에 들린 작은 비단보를 청운에게 건네며 말했다.
“소인이 작은 선물을 준비하였는데 부끄럽군용.”
“작은 선물이라니. 그런 말 말게.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다니, 내가 사람을 잘 본 모양이야.”
“그리 말씀해주시니 감사하옵니다.”
안의 내용물도 보지 않고 기뻐하는 청운을 보자 정 소감도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정 소감은 순간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치며 청운에게 말했다.
“은인. 이런 그림이라면 소인이 팔 곳을 알아볼 수 있사옵니당.”
“정말인가? 사실 여비가 떨어져서 난감했다네. 내 글이나 그림 재주는 있지만 임자를 찾는 재주는 없어서 고민했는데, 잘 됐군. 고맙네.”
“별말씀을 다하시옵니당. 아직 시간이 늦지 않았사오니 소인이 이 길로 곧장 알아보겠사옵니당.”
청운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정 소감이었다. 비록 소감이라는 위치였지만, 아직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요직을 꿰차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고민했었는데 청운이 자신의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한 시진 뒷면 해가 지는데 너무 늦지 않겠는가?”
“아니옵니다. 오히려 시간이 잘 맞았사옵니다.”
“그러한가?”
“이에. 이런 일은 남의 눈도 있기에 조심해야 하옵니다.”
은밀한 거래가 필요했다.
청운이 그린 그림 두 점을 몰래 파는 일이다.
작가가 누구인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대가의 그림.
누가 되었든 여기에 자신의 낙관만 찍으면 자신의 작품이 되는 일이었다.
정 소감은 그림 두 점을 곱게 말아서 그림을 보관하는 연통에 넣었다. 그러고는 이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담객잔을 빠져나갔다.
그런 정 소감의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혈황이 한마디 툭 던졌다.
[그런데 저놈은 왜 자꾸 얼굴까지 붉히면서 웃어?]
“어려서 그런다니까요. 하늘의 태양만 봐도 웃는 나이잖아요.”
[그래?]
혈황이 딱히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계획대로 되었으니 이제 다음 일을 준비해야 했다.
“돈은 정 소감이 마련할 것 같으니 이제 수련이나 하지요.”
별채 안쪽에는 제법 넓은 마당이 있었다. 삼 장 넓이의 크기이기에 충분히 무공수련을 할 수 있었다.
[수련은 낮에 하고 밤에는 실전을 하는 게 좋겠다.]
“하아, 또 맞아야 합니까?”
[맞는 것도 수련이라니까. 일단, 몸 쓰는 방법을 좀 더 익힐 필요가 있으니 당분간은 적수공권으로 하자꾸나.]
“그러다 칼 맞으면요?”
[칼 맞는다고 쉽게 안 죽는다. 더구나 네 살은 혈황기와 뇌기 때문에 질겨져서 잘 썰어지지도 않잖아.]
“…….”
* * *
황도에서 실전수련에 나선 지 일주일이 지났다.
청운은 밤만 되면 싸우러 다녔다.
흑도로 보이는 자들만 보면 시비를 걸었다.
병장기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그냥 보내고, 무기가 없는 놈들만 상대해서 싸웠다.
그 와중에 수도 없이 두들겨 맞았다.
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이제는 무작정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휘두르는 주먹에 자신이 원하는 혈도를 들이댔다. 운기의 순서에 따라서.
강제 추궁과혈이라고나 할까?
가끔은 원하지 않는 곳을 맞을 때도 있지만,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었다.
싸우고, 또 싸우고. 맞고 또 맞고…….
가끔은 때리기도 하면서 미친놈처럼 싸웠다.
며칠이 지나자, 남문 근처에 미친놈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덕분에 남문에는 흑도의 인물들이 잘 안 보였다.
“오늘은 동문 쪽으로 가보지요.”
객잔을 나선 청운이 말했다.
혈황이 좌우를 둘러보았다. 흑도 패거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청운은 한참을 이동해서 동문 근처에 있는 시장으로 향했다.
[이곳 애들은 남문 쪽에 있는 애들보다 강해 보이는군.]
“그래요?”
[저기 두 놈은 제법 수련을 했군. 그래 봐야 네 상대는 아니다만. 가볍게 몸 푼다고 생각해.]
“알겠습니다.”
삼류 흑도인들은 청운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저 온몸에 퍼진 내공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맞아줄 뿐이었다.
청운은 마음을 잡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한곳에 모여 있는 사내들에게 다가가서 시비를 걸었다.
“어이, 얼굴 이상하게 생긴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