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11화 (11/257)

# 11

11화

황궁에는 두 개의 비밀 보고가 있다.

하나는 황궁서고다.

황궁서고에는 천하에 존재하는 수많은 진귀한 서적들이 모여 있다. 다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허락된 자만 들어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황궁무고다.

무공비급과 병장기를 비롯해서 영약과 각종 진귀한 물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곳 역시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허락된 자들만이 등급에 맞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정해져 있다.

“황상께 부탁해봐야겠군요.”

[부탁? 네가 아무리 삼원이라지만 황제가 그런 부탁을 들어주겠느냐? 그리고 단순히 황궁무고에 들어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최고 등급까지 열람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야 제대로 된 비급을 볼 수 있을 거다.]

“가능할 겁니다. 전에 처음 입조했을 때 황상께옵서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청운이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황제를 알현했을 때, 황제는 청운을 보며 크게 기뻐했다. 나라의 동량이라며 입에서 침이 튀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황제가 청운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었다.

[잘되었구나. 그럼 길거리에서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어서 빨리 황궁으로 가자꾸나.]

“예. 알겠습니다.”

새로운 목표가 정해졌다. 둘은 지체 없이 황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제국의 황도는 수십만 명이 살아간다.

황궁을 중심으로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되며 아홉 개의 성문과 연결된 대로가 제국 전역으로 이어져 있다.

크게 동서남북으로 나뉘어서 황궁은 황도의 북쪽에 치우쳐 있다.

청운과 혈황은 황도의 남문을 통해서 입성했다.

놀면서 와도 한 달이면 올 거리를 석 달이 넘어서야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가 청운의 무공수련을 위해서 늦어진 일이었다.

그동안 청운은 실전을 치르면서 무공이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혈황이 보기에는 이제 세 살짜리가 걷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저기서 쉬죠.”

청운은 남문 대로에 있는 객잔으로 들어갔다. 다담객잔이라는 현판이 멋들어지게 걸려 있었다.

삼층으로 이뤄진 객잔은 내부의 가운데가 뚫린 구조였다. 각 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두 개나 연결되어 있었다.

청운은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서 이층의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래도 바로 황궁에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청운의 말에 혈황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황궁도 안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혈황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금의위도 무시하고 죽이던 자들이었다. 황궁 안이라고 해서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냐?]

“일단 인편을 통해서 은밀히 황제를 만나는 게 좋겠습니다. 금의위에도 소식을 전하고요.”

여러 사람이 알아서 좋을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황제에게 은밀히 연락을 취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때 혈황의 눈에 이채가 번득였다.

[저기 봐라.]

청운은 혈황이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입구에 환관 한 명이 자리를 잡는 게 보였다. 아직은 어려서 열서너 살밖에 안 될 듯했다.

‘환관이군.’

환관이라면 황제를 보필하는 자들이다. 그렇다고 모든 환관이 황제 측근에서 활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환관을 통해서 황제를 만나면 어떻겠느냐?]

“좋은 방법이긴 한데… 아는 환관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금방 생길 것 같으니.]

혈황의 말이 끝남과 동시, 주문을 하는 환관 근처에 앉아 있던 술 취한 사내들 중 하나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환관을 보며 다가갔다.

“어이구, 환관 나리.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사내가 환관의 어깨를 짚으며 커다란 얼굴을 환관에게 들이밀었다.

어린 환관이 움찔 놀라며 상체를 뒤로 뺐다.

“여어, 곱상하게도 생기셨네.”

사내는 팔로 환관의 어깨를 두르고는 다른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다.

탁.

환관이 얼굴로 다가오는 손을 쳐 냈다.

“무례하군용.”

“워워워. 그냥 이뻐서 그런 겁니다.”

사내가 여인네를 희롱하듯이 낄낄거렸다. 뒤에서 지켜보는 다른 사내들도 무엇이 좋은지 함께 웃었다.

“이봐, 환관 나리께 그러다 치도곤당하지 말고 적당히 해.”

“당장 비키지 않으면 경을 칠거예용.”

“하하하. 이거 이거, 톡톡 쏘는 것도 예쁘시네. 그러지 마시고 저희랑 함께 노시지요.”

사내는 환관의 어깨를 두른 손으로 여인의 가슴을 쓰다듬듯이 환관의 가슴을 쓸었다.

“꺄악. 무, 무슨 짓이에용!”

“크흐흐. 이뻐서 그런다고 했잖습니까.”

사내가 실실거리며 환관의 이곳저곳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사내들도 환관이 있는 곳으로 몰려왔다.

“이야, 피부도 곱네.”

“이거, 환관이 아니라 계집애 아니야?”

저마다 한마디씩을 하며 환관의 몸을 여기저기 쓰다듬었다. 환관은 비명을 꽥꽥 지르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사, 살려주세용. 제발 이러지 마세용. 꺄악!”

환관이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를수록 사내들의 장난기가 심해졌다.

그들도 환관을 잘못 건들면 목이 달아난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 사람들이 아니었다. 장난 좀 치고 도망치면 자신들이 누군 줄 알아서 잡으러 올 건가.

설령 정체가 드러난다고 해도, 어린 환관에게 장난 친 정도야 자신들의 뒷배가 충분히 막아줄 수 있었다.

객잔 안은 이층에서 벌어지는 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서로 수군대며 구경했다.

주인과 점소이 역시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말리려 나서지는 못했다.

사내들은 거친 흑도의 무사들 같았다. 자칫 화가 자신들에게 튈 수도 있었다.

사내들은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자 간이 더욱 커져서 점점 더 심하게 환관을 괴롭혔다.

“어디… 정말 고추가 없는지 한번 볼까?”

사내 중 한 놈이 환관의 아랫도리로 손을 뻗었다.

얼굴이 창백해진 환관이 비명을 질렀다.

“꺄아악!”

그때였다.

척.

“어이.”

환관의 아랫도리로 향하던 사내의 손을 누군가가 잡았다.

“뭐야?”

퍽!

우당탕탕.

손이 잡힌 사내는 두 눈에서 별이 번쩍함과 동시에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환관은 고개를 들어서 새롭게 나타난 사내를 보았다.

길게 자란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사내였다.

청운이었다.

청운은 어린 환관의 팔을 잡아서 자신의 뒤로 돌리더니 그대로 앞에 있는 다른 사내의 배를 찼다.

퍽!

사내가 피할 새도 없이 배를 얻어맞고 뒤로 벌렁 넘어갔다.

“물러서라.”

청운이 환관을 뒤로 물릴 때, 남은 두 사내가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덤비기 시작했다.

“이런 개자슥이!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죽어!”

좌우에서 동시에 주먹을 날렸다. 청운은 가볍게 주먹을 쳐 내며 사내들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네놈들이 누구든……!”

찰싹, 찰싹!

“잘못했으면 맞아야지!”

어찌나 찰지게 쳤는지 두 사내의 얼굴이 홱홱 돌아가며 입술 사이에서 붉은 피가 튀고, 누런 이가 수수 알갱이처럼 밖으로 튀었다.

사내들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청운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좌우로 세차게 후려 찼다.

퍼벅!

우당탕탕!

청운의 발길질에 두 사내가 붕 날아가서 바닥을 굴렀다.

청운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끙끙거리며 몸을 비트는 자들을 뒤로하고, 뒤쪽에 있는 환관을 보며 말했다.

“괜찮은가?”

“니에. 구해주셔서 감사하옵니당.”

묘한 말투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하. 괜찮은 것 같아 다행이네.”

청운은 뒤를 돌아보며 쓰러진 자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저놈들, 어떻게 하실 건가? 팔다리를 모조리 부러뜨리면 되겠나? 아니면…… 목을 쓱……?”

사내들을 힐끔거린 환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당. 더러운 말을 지껄인 입이 터졌고, 이가 몽땅 빠졌으니 그 정도면 됐습니당.”

청운이 사내들을 향해 일갈했다.

“썩 꺼져라! 여기 이분은 마음씨가 고우셔서 용서하셨지만, 다음에 또 이런 꼴을 보면 내가 용서치 않을 것이다!”

비틀거리며 겨우 일어난 자들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수수방관만 하던 자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잘했다고 한마디씩 했다.

그들이 뭐라 떠들건 청운은 얼굴에 미소를 드리우고 환관에게 말했다.

“식사하러 온 것 같은데, 나랑 함께하세.”

“니에, 송구하옵니당.”

이제는 안정을 찾았는지 환관은 떨지 않았다.

청운은 환관과 함께 자리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시작했다.

“천천히 먹게. 난 이삼원이네.”

“니에, 소인은 길재이옵니당.”

“좋은 이름이군. 길할 길에 두 재라… 거듭 길하라는 뜻인가?”

“니에, 한 번에 알아맞히시다니 놀랍사옵니당. 학식이 높으신 분이군용.”

길재 환관은 깜짝 놀랐다.

단순히 자신의 이름만 듣고 뜻을 풀이한다는 건 제법 학식을 갖추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청운의 지금 모습은 시골 촌놈, 아니면 삼류무사였다. 학문과는 거리가 멀게 보였다.

“하하. 내 지금 사정이 있어서 이 모습으로 있지만, 학식이라면 자신이 있다네.”

“아! 정말 멋지신 분이시군용. 단정하게 차려입으시오면 헌헌한 대장부가 따로 없을 것 같사옵니당.”

길재는 두 손을 맞잡고 예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살짝 드러난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하하. 고맙네. 내 이렇게 멋진 소형제를 알게 되어서 기쁘군.”

“니에, 소인 역시 반갑사옵니당.”

아직 어린 환관인데 말이 통했다. 마치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대화가 즐거웠다. 학식도 제법 갖추고 있었기에 막힘없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둘의 이런 모습을 지켜본 혈황이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역시 환관들은 상대의 기분을 좋게 하는 화술이 뛰어나.]

청운은 혈황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환관은 상전을 보필하며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해야 평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환관이 되면 따로 상전을 대하는 처세술을 배웠다.

“소형제는 아직 어려 보이는데 말재주가 대단하군.”

“송구하옵니당.”

길재도 기분이 좋았다.

불한당 같은 놈들에게 끌려가서 몹쓸 짓을 당할 뻔했는데 청운이 구해줬다. 그에게는 목숨을 구해준 것만큼이나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궁 밖에는 무슨 일인가?”

“니에, 사가에 다녀오는 길이옵니당.”

“사가? 어린 환관들은 궁에서 쉽게 나오지 못할 텐데……. 자네 윗분들에게 귀염을 받나 보군. 정말 대단해.”

환관들도 궁에서만 사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직위가 있는 자들은 궁 밖에 집이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환관은 아직 어렸다.

보통 어린 환관은 궁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런데도 궁을 나올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니에. 보통은 그렇사옵니당. 그래도 소인은 자유롭게 궁 밖을 오갈 수 있사옵니다.”

“호오. 설마하니 벌써 품계를 받은 것인가?”

당당한 말에 혹시나 하고 물어봤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니에. 소인 소감이옵니다.”

“뭐라? 소감!”

청운은 깜짝 놀랐다. 단순히 윗선의 귀염을 받아서 궁 밖에 있는 사가에 다녀오는 길인 줄 알았는데 직책이 있었다.

환관은 크게 태감, 중감, 소감이라는 직책을 갖는다. 평생을 소감에 오르지 못하고 끝나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아직 어려 보이는 길재가 소감이라니, 믿기 어려웠다.

“혹시, 자네 나이가 몇인가?”

“호호홍. 비밀이옵니당.”

“허어, 이거 생각보다 많은가 보구만.”

청운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겉모습과 달리 나이가 있는 것 같았다.

자주 있는 경우는 아니지만, 세상에는 평생을 어린아이의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럼 자네는 어디서 근무하나?”

“서육궁 중 삼궁이옵니당.”

“아, 마마들을 모시나 보군.”

“니에. 귀비들 중 한 분을 모시고 있사옵니당.”

황궁은 크게 정무를 보는 곳과 황제와 가족들이 사는 곳으로 나뉜다. 건청궁이 있는 후원에는 황제의 여인들이 살아가는 궁들이 여러 채 있다.

그중 서쪽에 여섯 개의 궁이 있는데, 그곳에 귀비들이 모여 살았다.

청운은 길재 환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런저런 신변잡기를 열심히 물어보았다.

“황상께옵서도 자주 들리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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