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마존-10화 (10/257)

# 10

10화

진천표국 사람들이 오기 전부터 자리를 잡고 목욕도 하고 빨래도 한 듯했다.

주변을 잘 살피지 않은 자신들 잘못이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이런 개자식이! 감히 이곳에서 빨래를 해!”

폭포 소리가 잠길 만큼 커다란 일갈이었다. 내공이 실려서 소리는 더욱 웅장했다.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폭포 소리 때문에 당신들이 온 것을 몰랐구려.”

사내는 청운이었다. 여러 날 수련과 대련으로 지저분한 몸을 씻고 빨래를 하고 있었다. 폭포 소리도 폭포 소리지만, 무공초식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이 하다 보니 이들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쯧쯧. 큰일이다 큰일.]

곁에 있던 혈황이 수십 명의 사내가 다가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청운을 나무랐다. 자신도 별일 아니기에 청운에게 알리지는 않았었다.

청운은 아직 행구지 못한 웃옷을 철벙철벙 물속에 담갔다가 꺼냈다. 그리고 돌돌돌 말아서 꾹 짜고는 허공에 탈탈 털었다.

원래는 바위에 널어 말려야 하는데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 그냥 위에 걸쳤다.

차가운 기운이 피부로 전해졌다. 진천표국 사람들의 흉흉한 기세에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풀어놓은 봇짐을 들고 막 돌아서려는데 날카로운 기세가 등 뒤로 전해졌다.

청운은 상체를 옆으로 틀며 빙글 몸을 돌렸다.

한 사내가 험악한 얼굴로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감히 사과도 없이 어딜 내빼려는 것이냐?”

“방금 사과했지 않소.”

“이놈, 저기에 가서 정중하게 사과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날 줄 알아라.”

사내의 말에 청운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자신이 한 행동은 빨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겁박하자 목욕으로 상쾌해졌던 기분이 팍 상했다.

“형장. 말씀이 지나치시구려. 내 이미 양해를 구했으니 더 나를 겁박하지 마시오.”

“허허.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있나. 아무래도 네놈은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말과 동시에 사내의 장검이 빠르게 허공을 사선으로 베며 청운의 옆구리를 노렸다. 딱히 살기를 띤 공격은 아니었지만 검의 움직임이 매서웠다.

청운은 사내의 품으로 뛰어들며 팔꿈치로 명치를 가격했다.

퍽!

“크윽.”

사내가 청운의 일격에 꽈당 넘어졌다. 그가 넘어지면서 청운과 진천표국 사이를 절묘하게 가로막고 있던 작은 버드나무 가지가 부러졌다.

덕분에 청운을 가리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졌다.

“다짜고짜 공격이라니, 너무한 것 아니오?”

쓰러진 사내를 향해서 말했지만, 실은 뒤쪽에서 이곳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모두 들으라는 소리였다.

“내 급소는 피해서 쳤으니, 욱신거리기는 하겠지만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요.”

요즘 많이 맞아본 청운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맞으면 아픈지 잘 알고 있었다. 하도 맞다 보니 때리는 일에도 요령이 생겨서 힘 조절을 할 수 있었다.

“이놈! 감히 진천표국의 표사를 공격해?”

하지만 모두 청운과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힘이 있는 자들은 자신들에게 위해가 가해졌다고 생각하면 참지 않았다. 지금처럼 화를 내고 힘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어서 놈을 무릎 꿇리지 않고 무얼 하느냐!”

웅표의 호통 소리에 맞춰서 십여 명의 표사들이 청운을 포위하듯이 둘러쌌다.

청운은 호통 친 웅표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하자는 거요?”

“네놈이야말로 감히 진천표국을 향해서 시비를 거는 것이냐?”

청운은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말로 해결할 사항은 아니었다. 납작 엎드려서 용서를 구하거나 신분을 밝히면 되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청운이 차갑게 한마디 했다.

“시비는 당신들이 걸고 있는 것 같은데?”

“주둥아리만큼 실력이 있는지 보자꾸나. 쳐라!”

뒤쪽에서부터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청운은 떨어져 있던 청강검을 차올려서 잡고는, 빙글 신형을 돌리며 공격한 사내의 다리를 베었다.

“크윽.”

사내가 바닥을 굴렀다.

뒤이어 두 표사가 좌우에서 공격해 들어왔다.

청운은 빙글 검을 돌리며 오른발을 앞으로 쭉 뻗었다.

뱀처럼 휘어져서 찔러가는 공격에 오른쪽의 표사가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청운의 빠른 검격을 온전히 피하지 못하고 팔뚝을 찔렸다.

빙글 몸을 돌리며 자세를 낮춘 청운은 왼편 표사의 검을 위로 쳐냈다. 그러고는 검을 돌려서 표사의 가슴을 길게 베었다.

쫘악!

또 한 명의 표사가 쓰러졌다.

다행히 청운이 손속에 사정을 둬서 깊은 상처는 아니었다.

길게 늘어트린 청운의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동시에 청운의 신형이 앞으로 나아갔다. 공중으로 뛰어오른 그가 사방으로 검을 뿌렸다.

따다다당.

일검에 다섯 번의 변화를 줬다. 앞을 막아섰던 자들이 뒤로 물러섰다.

청운은 물러서는 자들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깨로 가슴을 받아버리고, 물러서는 사내의 팔을 잡아채서 오른쪽으로 던졌다.

청운을 공격하던 두 표사가 던져진 표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그때 웅표가 일갈과 함께 청운을 공격했다.

“이놈!”

한 마리 비조처럼 날카롭고 빠른 공격이었다.

청운은 공격을 쳐내며 연신 뒤로 물러섰다.

[막지 말고 쳐서 놈의 공격을 떨쳐내!]

가만히 있던 혈황이 나섰다.

청운은 이제 검을 잡은 지 한 달밖에 안 되었다. 혈황에게 검술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은 일류무사인 웅표를 상대하기에 부족했다.

하지만 청운 곁에는 혈황이 있었다. 곁에서 조언해주며 때로는 적절한 동작을 알려줬다.

[자세를 더욱 낮추고 검을 빠르게 흔들어라.]

웅표의 검은 이름같이 빨랐다. 검세에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혈황의 말대로 지금은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떨쳐내는 것이 나았다.

[일초에 승부를 봐야 한다. 혈사검 일초 혈사출동을 펼쳐라.]

차자장. 챙챙

청운의 검이 허공을 휘젓기 시작했다.

혈사신검, 혹은 혈사검이라 불리는 천교의 절학 가운데 하나가 펼쳐졌다.

혈황은 기초검법 외에 상승 검법 하나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펼친 적은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혈사검 일초 혈사출동을 펼쳤는데 다행히 제대로 펼쳐졌다.

푹.

“크윽.”

청운의 검이 웅표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몸을 비틀어서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어깨를 잡고 물러선 웅표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

“놈! 사파였더냐?”

“뭐요?”

웅표의 말에 청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시에 혈황의 미간이 살짝 찌부러졌다.

“네놈의 검술에 흉악한 살기가 깃들어 있는데도 발뺌할 생각이더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

소리를 치긴 했지만 웅표가 단순히 싸움에서 졌다고 하는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검을 들이대다니, 당신들이야말로 마도 사람들이 아니오!”

“뭐라? 감히 진천표국을 보고 마도라고?”

“흥. 별것도 아닌 일을 트집 잡아서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소? 사마외도가 아니라면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그건…….”

웅표는 청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딱히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그때 웅표가 아가씨라고 부른 묘령의 여인이 나섰다.

“당신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저 제압하려고 했을 뿐이죠.”

그녀는 백색의 비단에 수수한 부용화가 살며시 피어 있는 무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춤에 날렵한 장검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 무척 잘 어울렸다.

“소저. 사람을 향해 다짜고짜 검을 휘둘러 놓고는 제압만 하려고 했다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여인을 상대로 조금 전 같이 막 대할 수는 없었다. 청운은 예법을 배우고 익힌 학사가 아니던가.

“제 말은 거짓이 없어요. 저희 진천표국은 나름 유명한 곳이랍니다.”

그때 혈황이 나섰다.

[화산파 제자다. 그것도 매화검수야. 네 상대가 아니니 물러서라.]

여인의 소매에 두 송이 매화가 수놓아져 있었다.

화산파 특유의 표식.

청운은 혈황의 말에 여인의 소매를 보았다.

화산파는 오악검파의 수장이며, 현 천하제일검인 파천일검의 사문이기도 했다.

그런 화산파의 정예고수가 매화검수였다.

“소저께서는 화산파의 매화검수요?”

“그래요.”

“좋소.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그만합시다. 진천표국 사람들도 크게 다치거나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오.”

청운의 이어지는 말에 여인은 생각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청운의 잘못이 아니었다.

계속 몰아붙이기도 어정쩡했다.

만에 하나 죽이려다가 놓치기라도 해서 오늘 일이 밖에 알려지면 진천표국은 훨씬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었다.

고민하던 그녀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우리도 이 일이 더 커지는 것은 원치 않아요.”

“하하하. 이해해준다니 다행이오.”

청운은 그쯤에서 검을 거두고 물러섰다.

단 한 번도 싸움을 말린 적이 없던 혈황이었다. 오히려 싸움을 부추기면 부추겼지.

심지어 자신이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맞을 때도 무공은 맞으면서 배우는 것이라며 흐뭇해했다.

그런 혈황이 싸움을 말렸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는 진천표국의 진설란이에요. 공자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진 소저였구려. 내 이름은 이삼원이오.”

청운은 여인에게도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아직 황도까지 이삼 일이 남았다. 그 안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언제 하북 패주를 지나실 길이 있다면 진천표국에 오셔서 저를 찾아주세요.”

“알겠소. 내 꼭 들리리다.”

예의상 하는 인사치레 초청이겠지만, 미인의 초청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 * *

청운은 진천표국 사람들과 헤어진 뒤에 곧장 길을 나섰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혈황에게 묻지 않았다. 혈황도 굳이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청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말리신 겁니까? 정말 제가 진 소저와 싸우면 패합니까?”

[열에 아홉은 패한다고 봐야지.]

청운의 실력으로는 화산검수를 상대하기에 아직 무리였다.

[그리고 네게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무공 말입니까?”

혈황은 청운을 봤다.

청운은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놈들이 건재하다면 분명히 네가 익힌 무공을 알아볼 거다.]

기초무공은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천교의 대표적인 검법인 혈사검이었다.

검신이 파르르 떨리며 상대의 검을 휘감는 검초는 한 마리 독사와 같았다.

“그럼 앞으로 다른 무공을 익혀야 합니까?”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무공을 가르쳐 주십시오.”

혈황도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가 주로 사용하던 무공은 두 종류였다.

천교의 무공, 아니면 사악한 사공이나 마기가 풀풀 흐르는 마공.

천교의 무공은 드러나면 안 되었다.

사공과 마공 역시 청운의 성격상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럼 다른 무공을 가르쳐야 하는데, 구결을 모두 기억하고 있는 무공이 없었다.

수백 년이 흘렀지 않은가. 자신의 무공도 아니고 타인의 무공을 기억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혈황은 난감한 기색으로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는 시늉을 했다.

“그럼 어떻게 배운단 말입니까?”

[그거야… 그래! 황궁에 가면 네가 배울 만한 무공이 있을 거다.]

“황궁에 무슨 무공이 있… 아! 황궁무고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