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9화
혈황의 차가운 한마디에 청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가 얼마나 지났다고 피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던 복수를 잠시 잊었다. 육체의 고통이 머릿속에 망각을 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나태했습니다.”
청운은 어떠한 어려움과 고통도 참고 이겨내겠다고 다시 다짐했다.
[되었다. 오늘도 열심히 맞아보자.]
“…….”
그렇게 혈황을 따라서 공부를 나온 청운은 자신을 때린 자들을 찾아 나섰다.
* * *
청운이 공가의 별채에서 지낸 지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청운의 기행은 공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널리 퍼졌다.
그가 곡부의 서문시장 근처에서 매일 흑사방 인물들과 드잡이질을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 학사가 저잣거리에서 흑사방 놈들과 매일 싸움을 벌인다고 합니다.”
“허어. 이거 우리가 나설 수도 없고,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 아닌지요?”
“그런 불한당 같은 놈들을 이대로 두고 봐야겠습니까? 당장 관에 알려서 놈들을 치도곤 내야지 않겠습니까?”
“안 됩니다. 이 학사가 자신이 처리할 일이라면서 절대 도와주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게 문제였다. 청운의 기행은 다음 날 바로 알려졌다. 청운의 학식을 아끼는 여러 학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흑사방을 절단 내겠다며 으르렁거렸다.
곡부에서 이들의 힘이라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었다.
그런데 청운은 자신의 일이니 절대 나서지 말라고 그들에게 당부했다.
“그래도 어제는 다섯 놈이나 쓰러트렸다고 합니다.”
“아니, 고고한 학사가 불한당들과 드잡이질을 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갑론을박을 하며 상황을 살폈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청운은 청운대로 어려움이 있었다.
처음 흑사방과 다툴 때는 주먹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는 몽둥이까지 동원되었다.
그나마 칼을 뽑아들지 않은 것은, 무기를 사용할 경우 관이 나서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학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싸우는 걸 지켜보았다.
그 바람에 ‘날마다 찾아오는 미친놈’이 자신들과 같은 일반인이 아니고 학사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흑사방에 퍼졌다.
“그 질긴 놈이 학사라고?”
“그 거머리 같은 새끼가 정말 학사일까?”
“X발, X됐네.”
학사들의 날카로운 눈빛에 흑사방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다른 곳이 아닌 공자의 사당이 있는 공부였기 때문이다.
흑사방은 어떻게든 청운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악착같이 달려드는 청운 때문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공부에 사람을 보내서 하소연했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눈빛뿐이었다.
“저희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맞습니다. 그분이 저희를 공격하기에 어쩔 수 없이 방어를 쬐금 했을 뿐입니다.”
일방적으로 몽둥이까지 동원해서 두들겨 패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방어였단다. 하지만 살아야 하니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가에서는 시종일관 같은 반응을 보였다.
“큼. 알았으니 그만 돌아들 가시게.”
“빠드득. 어서들 돌아가지 않고 뭐 하나?”
다시 사흘이 흘렀다. 이곳에 온 지 열흘째가 되었을 때 청운은 더 이상 흑사방도들을 찾아다니지 않았다.
흑사방도들이 청운을 보면 모조리 달아나니 싸울 수가 없었다.
알게 모르게 학사들이 흑사방을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하룻밤이면 상처가 아문다고 하지만 그 흔적이 전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공맹을 이야기하는 청운을 보며 학사들은 안타까움을 금하지 못했다.
불의에 목숨까지 거는 학사들이니 청운의 당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썼다.
결국 흑사방도들은 더 이상 청운에게 덤비지 않았다. 청운의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쳐버렸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면서.
청운은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흑사방을 직접 쳐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제 몸 쓰는 일이 조금 익숙해지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그만 황도로 갈까요?”
[그래야겠다. 다음에는 신분을 숨겨야겠어.]
“다른 곳에서 이렇게 싸우면 칼 맞겠죠?”
[당연하지. 그래서 여기서 하자고 한 거다.]
조건에 맞는 실전을 치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이곳은 최상의 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몽둥이는 맞아도 칼은 맞지 않으니까.
목숨 또한 보장이 되는 곳이었다.
청운은 다음 날 공가에 그림 한 점을 선물했다. 자신이 사용하던 별채에 서찰과 함께 뒀다는 말을 건네며 작별인사를 했다.
언제나 이곳을 찾는 학사들은 청운처럼 글이나 글씨를 남기고 떠났다.
노잣돈으로 쓰라며 접객당주가 묵직한 전낭을 건넸다. 얼마가 들었는지 모르지만 황도에 들어설 때까지 충분할 것 같았다.
청운이 떠나자, 학사 하나가 청운이 기거했던 별채에서 그림과 서찰을 가져왔다.
그림과 글씨가 한데 어우러진 멋들어진 산수화였다.
웅장한 산세와 함께 구름이 휘감고 있고 폭포수가 굉음을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길게 이어진 강줄기에는 조각배가 떠서 한가로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허어. 어찌 이런 그림이.”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천산의 운당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이 하나같이 감탄사를 흘릴 때 중앙에 앉아 있던 공가의 현 가주가 한쪽에 적힌 글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허! 삼원이 그 삼원이었단 말인가!”
모두의 이목이 공가의 가주에게 모였다가, 공가의 가주가 보고 있는 쪽으로 향했다.
낙관 대신 서명이 되어 있는 곳에 용사비등한 필체가 있었다.
삼원 이청운
다섯 글자에 담긴 뜻을 이들은 모르지 않았다.
이번 전시에서 연중삼원을 한 이청운이었다.
“가주, 어서 사람을 보내서 다시 삼원을 불러와야 합니다.”
“삼원을 이리 보낼 수 없습니다. 어찌 큰 인물을 이리 소홀히 대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가주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청운이 남긴 서찰을 펼쳤다.
이내 얼굴이 붉게 변했다.
“가, 감히!”
가주의 노호성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가주는 서찰을 고이 접으며 모인 이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이곳에 삼원이 왔다는 것은 비밀이네. 삼원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학사들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처음 청운이 이곳에 왔을 때도 평범한 양민 행색이었다. 자신들에게 밝힐 수 없는 무슨 일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셋째는 이 길로 사람을 보내서 제갈세가와 황보세가에 도움을 요청하거라.”
“뭐라 전할까요?”
“흠…. 일단 자리를 옮기자꾸나. 그리고 모두 내 말 명심하게. 꼭 함구해야 하네! 자칫 나라의 큰 인물을 잃을 수도 있음이니.”
“알겠사옵니다.”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 * *
처음 공가를 나서면서 청운이 행한 일은 무복과 청강검 한 자루를 구입하는 일이었다.
복장을 바꾼 그는 학사가 아닌 무인으로 변신했다.
한 자루 청강검을 허리춤에 메니 몸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검을 차니 좋으냐?]
“든든하다고 할까요?”
[누구나 처음 검을 마주하면 그 차갑고 날카로움에 두려움을 느끼지. 그리고 검을 가지게 되면 자신감이 생기는 법이다.]
혈황은 검을 만지작거리는 청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었다.
[조심해라. 검은 상대를 상하게도 하지만 나를 상하게도 하니.]
“예, 칼에는 눈이 없죠.”
청운 역시 경거망동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쌓은 수양이 얇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동평까지 가서 배를 타고 올라가죠.”
그렇게 청운과 혈황은 황도로 발길을 옮겼다.
곡부를 나와 동평에서 운하를 타고 계속 배로 이동했다.
중간중간 몇 번의 배를 옮겨 탔다. 그리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어촌에 내려서 혈황에게 무공을 배웠다.
이제는 권장술에 더해서 검을 익히기 시작했다. 검을 처음 쥔 청운이지만 형을 따라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유연해지고 강인해진 청운의 몸은 어떤 동작이라도 따라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문제는 혈황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흐음. 따라하기는 잘하는데…… 머리만큼 몸이 못 따라가는 것 같구나.]
어딘지 모르게 신경을 긁는 이유를 혈황이 찾아냈다.
청운은 몸으로 익혀야 하는 무공을 머리가 먼저 이해했다. 문제는 머리로 이해하는 만큼 몸으로 펼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머리가 너무 뛰어나니 몸이 머리를 못 따라가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한데, 그래도 아쉬웠다.
고민하던 혈황이 결론을 내렸다.
[역시 너는 맞으면서 배워야 하나 보다.]
“또 맞아요?”
어떻게든 청운을 고수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복수를 하든 뭐를 하든 할 수가 있다.
[방법을 생각해 볼 테니 수련을 게을리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청운은 늘어뜨린 검을 다시 들고 초식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가 펼치는 것은 천교의 기본검법이었다.
혈황은 청운의 무공기초를 잡아주기 위해서 천교의 기초무공을 가르쳤다.
천교의 무공 외에도 다른 세력이나 인물들의 무공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들의 무공을 기초로 삼을 수는 없었다.
무공마다 특징이 있고, 그 무공을 익히는 데 필요한 요소들이 있었다. 혈황 본인이야 한 번만 봐도 그 무공을 펼칠 수 있는 실력이지만 가르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저 녀석을 어떻게 단기간에 고수가 되게 가르치지?’
무언가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몸만 빼앗을 수 있어도……!’
복수를 위해서 가장 확실한 방법이 청운의 몸을 빼앗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자신의 힘이 돌아오지 않아서 불가능했다.
‘당장은 두들겨 맞으면서 혈에 충격을 주는 수밖에 없어. 그렇게 해서 잠들어 있는 기운을 깨우고, 다음은 천천히 생각해보자.’
* * *
콰과과광.
시원한 물소리가 울려 퍼지는 커다란 폭포수가 숲속에서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폭포수가 떨어지는 가장자리에는 널찍한 바위가 있었는데, 수십 명이 앉아서 놀아도 될 만큼 넓었다.
폭포 소리를 뚫고 수십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타났다.
“여기서 목을 축이고 간다.”
진천표국이라는 깃발을 높이 든 표행이었다.
그들은 산서지방으로 표행을 갔다가 하북 패주에 있는 본가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제 반나절만 가면 본가이기에 마지막으로 상행에서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서 폭포수를 찾았다.
마차에서 일단의 여자들이 내렸다. 곧장 사내들을 뚫고 물가로 와서는 시원한 물을 마셨다.
“아가씨, 시원하시지요?”
“네, 웅표 아저씨도 목을 축이세요.”
맑고 귀여운 목소리에 웅표라 불린 장한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웅표는 진천표국의 표두 중 한 명으로 이 표행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철벅, 철벅.
어디선가 물을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폭포 소리에 잠겨서 희미하게 들린 소리였는데, 일류 무인인 웅표의 귓가에 잡혔다.
“응? 잉어라도 있나?”
이곳 계곡에는 작은 물고기부터 여러 종류의 커다란 물고기들도 살고 있었다. 특히 폭포수 아래에는 제법 큰 물고기들이 살고 있어서 한 번씩 잡아서 회를 떠먹기도 했다.
입맛을 다시는 웅표의 시선을 따라서 아가씨라는 묘령의 여자의 시선이 돌아갔다. 아니,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향했다.
철벅, 철벅.
그러나 이들이 기대하던 물고기가 아니었다.
툭 튀어나온 버드나무 사이로 누군가가 빨래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응?”
“우욱.”
“왝!”
난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시원하게 마셨던 물이 문제였다. 자신들이 마신 물이 사내가 빨래한 물이라는 것을 깨닫자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욕지기가 올라왔다.
빨래를 하는 사내는 목욕까지 했는지 머리를 풀어헤치고 웃통까지 벗고 있었다.
“웬 놈이냐!”
호통 소리에 사내의 고개가 돌아갔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카락 사이로 두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