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7화
혈황은 사실을 살짝 꼬아서 말했다.
[음……. 강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다. 무공으로 대성하고 싶은 자들이 모인 곳이지. 네가 관리가 되기 위해서 학문을 익혔듯이 무림인은 무공을 익힌다.]
“아, 무림에 대해서는 들어봤습니다. 수련을 통해서 우화등선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무당파도 그런 곳이고, 소림사도 비슷하고요.”
청운도 불교나 도교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곳 하남성에 소림사가 있으니 모르는 게 이상했다.
[그, 그렇지. 비슷해.]
근엄하던 혈황의 표정이 어딘지 어색했지만 청운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그만 출발하죠.”
◈ ◈ ◈
산맥의 끝자락은 황하강 하류와 접해 있었다.
정오 무렵, 붉은 흙탕물이 거세게 몰아치는 작은 어촌 마을에 거지꼴의 사내가 들어섰다. 헤어지고 찢겨서 넝마가 되어버린 의복은 거지도 입지 않을 만큼 더러웠다.
“후우. 드디어 황하까지 왔군요.”
거지꼴의 사내는 청운이었다. 그의 곁에는 영혼 상태의 혈황이 곤룡포를 멋들어지게 입고 서 있었다.
청운은 혹시라도 혁련휘 무리에게 들킬까 봐 산맥을 빙 돌아서 이동했다. 그 바람에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사흘이나 걸렸다.
그동안 두 사람은 몇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첫 번째 사실은, 혈황의 영혼은 이제 다른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면서 체격이 좋은 장한을 만나 한번 시도해봤는데, 대상의 몸을 그냥 통과해버렸다. 아마 제때 멈추지 않았으면 얼굴을 땅에 처박아버릴 뻔했다.
나중에 힘이 생기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당장은 영혼으로서만 행동할 수 있었다.
두 번째 사실은, 두 사람이 멀어질 수 있는 거리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대략 십여 장? 그 이상이 되면 혈황이 제자리걸음만 했다. 아마도 두 사람의 몸에 깃든 혈황기가 서로를 끌어당기는 듯했다.
그 역시도 나중에 힘이 강해지면 거리가 더 늘어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가는 걸 포기한 혈황은 청운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혈황은 청운의 이야기를 듣고 ‘너도 참 힘들게 살았구나.’라며 혀를 찼다.
혈황도 간간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다만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다. 학사인 청운이 싫어할지도 모르니까.
“일단 마을에 가서 이 사슴을 팔죠.”
청운은 이른 아침에 잡은 커다란 사슴을 메고 있었다. 평소라면 통째로 구워서 먹었을 텐데, 황하를 건너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호랑이를 잡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제가요?”
호랑이라는 말에 청운은 깜짝 놀랐다.
사슴을 잡은 것도 혈황이 도와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호랑이라니.
[쯧쯧. 반쪽짜리 환골탈태긴 하지만, 네 몸이면 호랑이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아직은 자신 없다니까요.”
환골탈태를 해서 힘은 장사가 되었지만 아직 가진 힘을 제대로 쓸 줄 몰랐다.
혈황도 기운을 운용할 수 있으려면 몇 달은 걸릴 거라고 했다.
[원래 몸이란 자꾸 단련을 해야 강해지는 법이다. 너는 일단 몸부터 만들어야 해.]
“그래서 열심히 하고 있잖습니까. 가시죠.”
청운은 마을의 푸줏간으로 가서 사슴을 팔고 은 석 냥을 받았다.
사슴 가격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은 석 냥이면 다섯 가족이 한 달 이상 생활할 수 있는 큰돈이었다.
청운은 푸줏간에 딸린 집의 안쪽 마당에서 간단하게 씻은 뒤에 평범한 의복을 하나 구해서 갈아입었다.
반듯한 이목구비에 정기가 흐르는 맑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오뚝한 콧날과 붉은 입술이 돋보였다.
[씻고 나니 인물이 사는구나.]
청운의 외모는 일반 백성들과 확연히 달랐다. 여기에 환골탈태까지 해서 피부가 맑아지고 키도 훌쩍 커졌다.
청운은 어촌을 뒤로하고 나룻배에 올랐다.
“이대로 뱃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단현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곡부로 갈까 합니다.”
[곡부라면… 공자묘 있는 곳 말이냐?]
“예. 그곳에서 여비 좀 마련할 생각입니다.”
[아는 사람이라도 있느냐? 숨어서 가야 한다며?]
“황도까지의 여비도 여비지만, 황도에 도착해도 쓸 돈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돈을 마련할지는 모르지만 혈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곡부에 도착한 건 사흘이 흐른 뒤였다.
이곳까지 오면서 딱히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자신을 찾으려는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는데 그런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방갓을 쓰고 얼굴을 가렸다.
“저 대신 폭포에서 뛰어내린 금의위들, 살아 있을까요? 어렵겠지요?”
[일말의 가능성을 보고 폭포로 뛰어내렸겠지만,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곳이 워낙 높거든.]
“금의위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나 봅니다. 시신을 발견했으면 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마침 비가 많이 와서 폭류가 흘렀을 테니 멀리 떠내려가서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폭류에 의해 얼굴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상했을 수도 있고.]
“그분들께 정말 미안할 뿐입니다. 그 상황에서 제 옷을 걸치고 저로 위장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덕분에 네가 살아남은 거지. 천운이었다고 생각해라. 너를 위해 희생한 그들을 위해서라도 힘을 길러야 한다.]
“예. 그럴 생각입니다.”
청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금의위와 짐꾼들이 죽었다.
그들을 위해 복수를 하려면 힘이 필요했다.
[그런데 곡부에서 어떻게 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냐?]
“곡부는 공자님의 후손이 살지만 그곳에는 수많은 학사들과 유력가들이 많이 왕래합니다. 그들에게 그림이나 글씨를 팔 생각입니다.”
[아. 너 유명한 학사였다고 했지? 그럼 아는 곳은 있느냐?]
“네 공묘를 관리하는 공가에 가서 글 한 줄 써주면 경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공묘를 관리하는 일은 공자의 후손들이 하고 있었다. 모두가 뛰어난 학자였고, 글과 그림에 심취해 있었다.
청운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가로 향하던 중 막 한 노점 곁을 지나갈 때였다. 길거리의 노점에서 시비가 붙었다.
“여기서 장사하지 말라고 했지.”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자판에 쌓인 물건이 허공에 비산했다.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사방에서 울렸다.
험악하게 생긴 다섯 사내가 노점상을 겁박하고 있었다.
“뭘 봐! 이 자식아!”
“눈 안 깔아! 구경났어?”
곁을 지나가던 청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한눈에 봐도 험악하게 생긴 흑도의 인물이 자신을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주춤 물러서며 돌아가려는데 뒤통수에 전해지는 충격에 멈칫 멈춰 섰다.
퍽!
“빨리빨리 안 꺼져?”
아프지는 않은데 기분이 나빴다.
가던 길을 멈춘 그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덩치 좋은 사내가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툭 불거진 가슴 근육을 보니 힘깨나 쓸 듯했다.
“눈 깔라고 X새끼야!”
퍽퍽퍽.
사내는 연이어 청운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들이 볼 때 청운은 그저 그런 무지렁이일 뿐이었다.
발길질까지 가미된 구타가 있었지만 청운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그들의 기세와 달리 고통은 크지 않았다.
“어쭈, 이 새끼 봐라? 제법 단단하네?”
“뭐야? 어떤 자식이 우리 흑사방 행사에 초를 치는데?”
다른 사내들이 우르르 청운에게 몰려왔다. 둥글게 포위한 그들은 청운을 툭툭 밀며 위협했다.
청운이 아무 반응이 없자 놈들의 기세는 더욱 거칠어졌다.
청운은 한쪽을 보았다. 혈황이 팔짱을 끼고서 구경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혈황이 턱을 앞으로 밀면서 한마디 던졌다.
[뭐 하냐? 한판 붙어야지.]
아직 정식으로 무공을 배우지 않은 청운이었다. 오면서 혈황에게 배운 것도 몸속의 기를 다스리기 위한 운기법의 기초가 전부였다.
싸움이라고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하지 않은 자신에게 다섯 사내를 상대하라고?
청운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곧 주먹을 움켜쥐며 혈황이 시키는 대로 휘둘렀다.
휘익, 퍽!
제법 빠르고 강력한 일격이었다. 청운을 툭툭 치며 장난치던 사내 하나가 붕 날아서 노점상을 덮쳤다.
콰당.
청운은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주먹이 이렇게 강했던가?
그러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이런 개X끼가!”
“죽여!”
다른 사내들이 청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온몸을 두드리는 공격에 청운은 본능적으로 몸을 잔뜩 웅크렸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한 타격이었다. 하지만 못 견딜 정도로 아프지는 않았다.
청운은 힐끔 혈황을 다시 봤다.
혈황이 피식 웃으며 한마디 했다.
[안 죽는다. 한번 싸워 봐. 조금 전처럼 주먹도 지르고 발길질도 해봐.]
나 몰라라 하는 혈황이 야속했다. 그러나 점점 전해지는 충격이 커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관이 곡부 내에서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걸 엄격히 금하기에 흑도 무리의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이다.
청운은 손을 휘저으며 사내 중 한 명을 붙잡았다.
퍽퍽퍽.
연이어 주먹을 휘둘렀다.
청운의 주먹에 얼굴을 강타당한 사내가 축 늘어졌다. 다른 사내들이 깜짝 놀라며 청운을 다시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중 한 명은 부서진 자판을 들고 청운의 등짝을 갈겼다.
충분히 위협적인 공격이었다.
청운은 철퍼덕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다른 사내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청운을 밟았다.
한참 동안 청운을 구타하던 자들은 청운이 축 늘어지자 걸쭉하게 가래침을 뱉으며 으르렁거렸다.
“너 이 새끼, 한 번만 더 걸리면 그때는 멱딴다.”
“X만 한 새끼가 어디서 기어올라.”
사내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부축하고 자리를 떴다.
“크윽.”
청운은 몸을 돌리며 대자로 바닥에 누웠다. 푸른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빙글거리며 웃고 있는 혈황의 얼굴도 보였다.
“기분 좋으십니까?”
[안 죽어. 그 정도에 죽을 것 같으면 세상 사람들 다 죽겠다.]
온몸이 쑤셔왔다. 그렇다고 끙끙 앓을 정도로 아프지도 않았다.
그 정도만 해도 어딘가.
[환골탈태하면 근골이 강해진다. 저런 삼류들의 발길질에 망가지지 않을 만큼 몸이 단단해지지.]
“그거 다행이네요. 끄응.”
청운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주변에 구경꾼은 많았지만 누구 하나 선뜻 나서서 청운을 도와주지 않았다.
청운을 구타한 자들은 인근에서 이름 높은 흑도 패거리였다. 그렇다고 일반 흑도들같이 무기를 들고 다니면서 패악질을 부리지는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도 자릿세를 받기위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암묵적으로 구역이 정해져 있고, 상인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관에서 눈감아 주는 형국이었다.
엄연한 불법이었지만 적당히 상납을 하고 사람이 죽는 일이 없으니 관에서도 신경 쓰지 않았다.
청운을 한참 동안 유심히 살피던 혈황이 뜬금없는 말을 했다.
[그런데… 몸이 조금 가벼워지지 않았느냐?]
“지금 놀리시는 겁니까?”
방금 전까지 두들겨 맞은 것을 곁에서 지켜봐 놓고는 시원하냐고?
청운은 그렇게 묻는 혈황이 얄미웠다.
그런데 청운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양팔을 돌리고 몸 이곳저곳을 주물렀다.
“어? 그러고 보니 조금 시원합니다.”
[오호. 이것 봐라?]
“왜 그러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