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2화
주먹과 발을 휘두르던 혁련휘는 그제야 때리는 걸 멈추고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청운을 노려보았다.
혁련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얼굴을 청운에게 바짝 가져다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너, 네 아비가 왜 죽었는지 알아? 나도 얼마 전에야 아버지에게 들었는데, 바로 너처럼 고집부리고 친구의 부탁을 거절했다가 죽었다더군.”
이청운은 얼굴을 땅에 처박은 채 이를 악다물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럼… 혹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한 맺힌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산적에게 당한 것이 아니라 친구의 배신 때문에 돌아가신 거라고.
다만 그 친구가 누구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제야 그 친구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왜 어머니가 사실을 다 밝히지 않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어머니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입을 다무셨을 것이다. 자신이 쫓아가서 따질지도 모르니까. 그럼 아버지의 친구라는 자가 비밀을 묻기 위해서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니까.
“마지막 경고다, 이청운. 네 아비처럼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으면 양보해. 알았지?”
나직이 윽박지른 혁련휘가 이청운의 새끼손가락을 발로 지그시 밟았다.
‘으윽!’
새끼손가락의 살을 짓이겨놓은 혁련휘는 차디찬 조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이청운은 처절한 고통을 참기 위해 이를 악다물었다.
‘나처럼 가진 것 없는 놈이 복수하려면… 더더욱 연중삼원을 해야만 해. 힘을 얻어야 복수할 수 있어.’
닷새 후, 두 사람은 서원의 사부와 동료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나란히 천향서원을 나섰다.
겉으로 보기에는 둘도 없는 친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황하를 건너 으슥한 곳에 도착하자 혁련휘가 청운을 오물이 가득한 진창에 처박았다.
“마지막으로 충고하마. 죽고 싶지 않으면, 전시가 끝날 때까지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가라.”
혁련휘는 진창에 처박힌 청운을 향해 비릿한 조소를 짓고는 몸을 돌려 떠나갔다.
한참 만에 일어선 청운은 창백한 얼굴로 옷을 대충 털고는 이를 악다문 채 걸음을 옮겼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고통이 밀려왔다.
뼈마디가 산산이 분해되어 살을 찢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 번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청운은 이를 으스러지게 앙다물고 힘겹게 발을 내디뎠다.
‘오늘은 네가 나를 벌레처럼 짓밟았지만, 언젠가는 네가 내 발밑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릴 때가 있을 거다, 혁련휘.’
* * *
청운과 혁련휘가 천향서원을 떠나온 지 열흘째 되던 날.
구름이 옅게 낀 오월, 황도에서 전시가 열렸다.
넓은 마당에 모여 앉은 학사들은 초조하게 시험을 기다렸다.
진사가 되려면 전시에 합격하여야 한다.
하지만 시성이라 불리는 두보조차 번번이 낙방했을 만큼 전시 합격은 어려운 일이었다.
학사들은 행여나 잊은 것이 있는지 눈을 감고 자신의 기억을 더듬으며 배운 바를 복습했다.
혁련휘는 그런 학사들을 둘러보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후후, 놈이 안 왔군. 하긴 아무리 독해도 살고는 싶겠지.’
겁을 주기 위해 밝혀선 안 되는 비밀까지 말해주었다.
알아봐야 자신의 터럭 하나도 건들 수 없는 놈이기에 말해준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번 일이 밝혀지면 나도 곤란해지니 기회를 봐서 확실하게 입을 막아야겠어.’
이제 문이 닫히기까지는 반 각도 남지 않았다. 설령 놈이 나타난다 해도 밖에는 혁련장의 무사가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었다.
그는 만족한 표정으로 지필묵을 펴놓았다.
시간이 다 되었는지 앞에 선 관리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문을 닫아라! 닫힌 후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 되느니라!”
“예이!”
끼이이이.
정문을 지키던 위사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부터…….”
앞에서 관리가 다시 입을 열자, 모든 학사들이 앞을 주시했다.
혁련휘도 관리의 말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 바람에 한 사람이 반쯤 닫힌 문 사이로 뛰어 들어오는 걸 보지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안으로 들어선 자는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는데, 맨 뒤쪽의 빈자리에 재빨리 앉았다.
위사들은 그를 보고 혀를 차며 마저 문을 닫았다.
“그 사람, 운이 좋군.”
“저렇게 게을러서야 어디… 그런데 얼굴을 많이 다친 모양이군. 손도 그렇고. 쯔쯔쯔.”
두 시진에 걸친 시험이 끝나자 학사들이 답지를 제출하고 마당을 나섰다.
혁련휘도 중간쯤 답지를 제출했다.
‘제길, 그놈을 신경 쓰느라 정신을 집중하지 못했어.’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탐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맨 뒤쪽 구석에 앉아 있던 청년은 그가 나간 걸 확인하고 난 후에야 답지를 냈다. 그러고는 다른 사람의 뒤에 바짝 붙어서 밖으로 나갔다. 마치 그 사람과 친구라도 되는 것처럼.
다음 날.
자금성 앞에 방이 내걸렸다.
전시의 합격자 이름이 적힌 방이었다.
[장원(壯元) 이청운]
거북이처럼 고개를 쑥 빼고 방을 쳐다보던 사람들에게서 환호성이 터졌다.
“와아! 연중삼원이 나왔다!”
“뭐? 연중삼원? 정말이야?”
“이청운이 누구야?”
수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이청운의 이름을 거론할 때, 한 사람만큼은 방을 보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었다.
움켜쥔 주먹에서는 힘줄이 툭툭 튀어나왔다.
‘이… 아비어미도 없는 천애고아 거지새끼가 감히…! 죽여버리겠어!’
여전히 더러운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린 이청운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분노한 혁련휘를 지켜보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는데 혁련휘 때문에 합격자를 확인하러 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굳이 가서 자신의 눈으로 확인할 것도 없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연중삼원!
그런 말도 했다.
청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이제 됐어!’
혁련장이 아무리 개봉성의 유지라 해도 황궁에 대항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연중삼원을 했으니 최소한 종육품의 관직은 따 놓은 당상.
이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파헤칠 수 있으리라!
만약 혁련장이 그 일에 연루되어 있다면 절대 용서치 않으리라!
* * *
전시에서 장원을 한 청운은 종육품의 통정사(通政司) 경력(經歷)에 임명되었다.
통정사는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나 칙령을 총괄했고, 경력은 그 통정사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직위였다. 덕분에 황제는 물론 고위관리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청운은 그 점을 최대한 이용해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는 이제 갓 황궁에 들어온 신입관리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내막을 파헤치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다행히 황제는 연중삼원을 한 그를 무척 아꼈다. 고위관리들도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자주 불러댔다.
넉 달이 지나서야 고향에 다녀올 기회가 생긴 것도 그 때문이었다.
청운을 아낀 황제는 행여나 그의 신상에 이상이 생길까 염려하여 금의위를 호위로 붙여주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조사해보려던 청운으로서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 할 수 있었다.
금의위의 호위를 받으며 황도를 나선 청운은 곧장 개봉으로 향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제법 세찬 바람이 부는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청운은 금의위와 함께 하남성의 깊은 산중에 들어섰다.
관모(官帽)를 쓰고 검은 피풍의를 걸친 금의위 십여 명이 말을 탄 청운을 호위하며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로 봇짐을 멘 사내들이 따라갔다.
그들이 산중에 진입한 것은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였다. 석양이 어느새 산머리에 걸려 있었다.
산속은 평지보다 빠르게 어둠이 내려앉는 법. 더구나 먹구름이 갑자기 밀려와 서쪽 하늘을 덮기 시작하자 스산한 느낌마저 들었다.
“대인, 비가 오려나 봅니다. 비가 오기 전에 산을 넘으려면 걸음을 빨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떠신지요?”
관모를 쓴 무사 중 사십대 초반의 중년인이 말하자, 말에 타고 있던 청운이 온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시게.”
“예이! 무얼 하느냐? 어서 길을 재촉하지 않고!”
길게 이어진 우마차 길을 따라 얼마나 갔을까,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떨어졌다.
우르르릉! 꽝꽝!
기어코 우려한 일이 벌어졌다.
투두둑,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가 어느새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대인, 어찌하시겠습니까. 쉽게 그칠 비는 아닌 것 같은데, 근처에서 쉴 만한 곳을 찾아 하루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아니네. 비 피할 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엄한 고생을 하느니 힘들어도 그냥 가는 게 좋겠네. 저 산만 넘어가면 곧 장강이 나오지 않겠는가.”
“예, 대인!”
금의위 백호장인 중년 사내가 대원들을 향해서 명령을 내렸다.
“속보로 전진한다!”
일행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빗길을 걷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드물었다. 비로 인해서 온몸이 젖었고, 체력 역시 빠르게 소진되었다.
그렇게 이각쯤 더 시간이 흘렀다. 빙 둘러가는 골짜기를 벗어나자 평탄한 길이 나왔다.
다행히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졌다.
걷기가 편해진 사람들은 그제야 숨을 골랐다.
그런데 그때,
피이잉-
섬뜩한 파공성이 허공을 갈랐다.
퍼버벅!
“헉!”
“컥!”
선두에서 길을 재촉하던 금의위 대원 셋이 날아든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웬 놈들이냐! 어느 간 큰 놈이 감히 황궁에 대항을 하려는 것이냐!”
중년 사내가 노성을 내질렀다.
호위하던 금의위 대원들은 검을 뽑아들고 사방을 경계했다.
슈슈슈슉!
대답 대신 화살이 다시 날아들었다.
“철강시다. 빗겨서 쳐내라!”
일반 화살과 달리 철강시는 빠르고 위력이 강력했다. 그래서 정면에서 막지 않고 빗겨서 튕겨내는 게 나았다.
하지만 어둑해지기 시작한 시각, 빗속에서 날아오는 철강시는 막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이 더 화살에 맞고 쓰러졌다.
“대인을 보호하라!”
백호장의 호통이 주변에 쩌렁쩌렁 울렸다.
살아남은 금의위 대원들이 말을 타고 있는 청운을 가운데 두고 원형진을 만들었다.
그 직후 사방에서 복면을 쓴 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백호장은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빠르게 살폈다.
단순한 산적이 아니었다. 놈들은 자신들이 황궁의 금의위라는 걸 알고도 공격하고 있었다.
‘오늘 길보다 흉이 많겠구나.’
백호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상대의 숫자나 위세가 대단했다. 살기가 사방에서 압박해왔다.
찌르르 살갗을 파고드는 살기에 절로 검병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 발 앞으로 나선 그가 포위하고 있는 자들을 향해 호통 쳤다.
“네놈들은 누구기에 감히 금의위의 길을 막고 공격하는 것이냐?”
앞을 막아선 복면인들 사이에서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키는 물론 덩치 역시 큰 사내였다. 그러나 어둑한 데다 방갓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자가 살짝 눌러쓴 방갓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폭사되었다.
“모두 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서는 안 된다!”
사내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공격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