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마존
# 1
1화
서장
콰과과과광!
쩌저저적!
천둥번개가 내리친 듯 귀청을 찢는 굉음이 거대한 삼 층 전각을 뒤흔들었다.
시뻘건 혈룡과 흑룡이 뒤엉킨 채 이백 평 대전 안을 휩쓸자, 아름드리 기둥이 부러지고 벽이 터져 나갔다.
수십 명이 피곤죽이 되어 쓰러져 있는 대전 안.
그 중앙에 핏빛 붉은 장포를 걸친 한 사람이 오롯이 서 있었다.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 펄럭이는 장포,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네놈들이 감히……!”
일성을 내뱉던 그가 비틀거렸다.
‘크읍! 이놈들이 쓴 독 때문에 공력이 흩어지고 있어.’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휘돌던 혈룡들도 흐릿해지고, 기운도 약화되었다.
“우하하하! 이제 그만 포기하고 지옥 구경이나 가시구려!”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아홉 사람 중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대소를 터트리며 소리쳤다.
그들에게서 일어난 흑룡의 기운이 언제든 혈룡을 잡아먹을 것처럼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웠다.
혈의장포를 걸친 자는 이를 악다물었다.
배신자들을 모두 찢어 죽이고 싶었다.
감히 천하 마도의 제왕인 혈황을 비열한 술수로 암격하다니!
그것도 원수나 다름없는 놈들까지 끌어들여서!
그러나 마음만 앞설 뿐 당장 자신의 목숨부터 부지해야 했다.
자신을 지키던 삼십육위도 전멸한 상태. 혼자서는 놈들을 모두 상대할 수 없었다.
자존심도 살아 있을 때 이야기다.
‘일단 여기서 살아나가자. 복수도 살아야 할 수 있으니…!’
결심을 굳힌 그는 전신 세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선천진기를 깨웠다.
선천진기는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 때가 아니면 절대 깨워서는 안 된다. 선천진기를 깨우고 사흘 안에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설령 조치를 취해서 목숨을 구한다 해도 십 년은 노력해야 겨우 본연의 진기 중 삼 할 정도를 되찾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목숨을 건 모험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나 배신자 놈들을 씹어 먹고 말 것이니라!’
고오오오오.
그에게서 뻗어 나온 혈룡의 기운이 다시 강해지자,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이 멈칫한 순간, 혈황이 바닥을 박차고 위로 솟구치며 쌍장을 휘둘렀다.
콰광!
그의 손길을 따라 뻗어 나간 혈룡이 삼 장 높이의 천장을 터트리며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혈황은 그 구멍을 통해서 순식간에 대전을 빠져나갔다.
포위하고 있던 자들이 악을 쓰며 몸을 날렸다.
“놓치면 안 된다! 잡아!!!”
* * *
구름이 잔뜩 낀 어느 날, 어둑해진 시각.
“헉, 헉, 헉… 개 같은 놈들…….”
한 사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깊은 산속을 빠르게 내달렸다.
붉은 장포, 산발한 머리카락.
그는 자신이 믿었던 수하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도망친 혈사천교의 교주 혈황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천하 마도는 물론 중원무림 전체를 좌지우지했던 천하제일의 마도고수.
그러나 지금은 천라지망을 벗어나기 위해서 하룻밤에 천 리를 달린 도주자에 불과했다.
“죽일 놈들…… 심장을 씹어 먹을 놈들…… 헉, 헉, 헉…….”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등을 보이고 도주한 것만 해도 자존심이 상하는데, 원수 같은 놈들에게 비 맞은 생쥐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진기가 바닥나서 더 달릴 수도 없고.
마침 서로 몸을 기대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보였다.
기이하게도 선혈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는 그 바위 사이에는 제법 넓은 틈이 있었는데, 잠시 동안은 비를 피할 수 있을 듯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바위 사이로 들어갔다.
그곳은 생각보다 넓어서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그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운공조식을 취했다.
바위는 유난히 따뜻했다. 바위에 있는 열기가 고스란히 몸으로 스며 들어오는 듯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바위와 자신이 한 몸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
마음과 기운이 안정된 그는 이 또한 기연이라 여기고 전력을 다해 운기를 했다.
콰과광!
밖에서 내리는 비는 점점 거세져서 이제 번개마저 내려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등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기운을 받아들이기 위해 오직 운공조식에만 몰두했다.
잘하면 무리를 해서 깨운 선천진기를 일부라도 만회할 수 있을 듯했다.
바위의 기운은 대자연의 기운이니 헛된 욕심만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번쩍!
눈앞이 환해지고,
콰아아앙!
굉음이 귀청을 찢을 듯이 울리더니, 등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쏟아져 들어오며 그의 몸을 관통했다.
벼락이 정통으로 바위에 떨어진 것이다.
쿠억!
쩍 벌어진 그의 입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콰르르릉.
밑을 받치고 있던 바위가 부서지고, 위쪽의 거대한 붉은 바위가 그의 몸을 짓눌렀다.
‘아, 안 돼……!’
아득해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았지만,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수만 근 거대한 바위가 점점 미끄러져 내려오며 그를 덮었다.
‘여기서 죽을 순 없어. 안 돼에에에!’
휘익!
혈황은 바위 밑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휴우, 겨우 빠져나왔다…… 응?’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바닥에 붙어 있어야 할 몸이 구름처럼 허공에 붕 떠 있었다.
‘뭐, 뭐야?’
혈황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바위 밑에 이르러 얼어붙었다.
그곳에…… 머리를 제외한 몸뚱이 모두가 바위에 짓눌러지고 으스러진 한 사내가 누워 있었다.
처절한 고통과 분노에 일그러진 얼굴의 그는 놀랍게도 혈황 자신이었다.
‘서, 설마?’
혈황은 몸을 덜덜 떨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세 걸음을 물러선 후부터는 이상하게 더는 물러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반복했다.
이상함을 느낀 그는 힘을 주어 발을 뒤로 뺐다.
그래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시신에서 아무리 멀어지려고 해도 세 걸음 이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그로부터 삼백 년 후.
◈ ◈ ◈
천년고도 개봉의 천향서원은 천하의 수많은 서원 중에서 열 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서 또 다른 자랑거리가 생겼다.
천향서원에는 수십 년, 아니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가 둘이나 있었다.
동갑내기인 두 천재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삼 년마다 열리는 동시와 향시를 봤다.
두 사람 모두 급제했다.
이청운은 일등인 해원(解員)을 차지했고, 혁련휘는 이등을 했다.
이청운은 심지어 황도에서 치러지는 회시에서조차 일등인 회원(會員)을 차지했다.
천향서원은 들뜬 분위기 속에서 전시(殿試)를 기다렸다.
만약 전시에서조차 장원이 나온다면 그거야말로 경사 중의 대경사였다.
네 단계의 시험을 한 번도 낙방하지 않고 연속으로 합격한 사람을 삼원진사(三元進士)라 한다.
이 삼원진사들 중에서도 장원급제를 연속으로 한 사람을 연중삼원(連中三元)이라 하는데, 역대로 연중삼원은 백 년 전에 나오고 그 이후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청운이 이번 전시에서 장원을 하면, 백 년 만에 연중삼원을 이루는 삼원진사가 탄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분위기에 휩쓸려 환호만 했지, 그 영광의 그늘에서 싹트고 있는 비극은 미처 보지 못했다.
* * *
천향서원 뒤편의 어둑한 그늘 아래.
이제 갓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학사 차림의 두 청년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청운, 이번 전시는 나에게 양보해라.”
“그럴 수 없다는 걸 자네도 알잖아.”
“정말 양보하지 않을 거냐?”
“미안하지만 양보할 수 없어.”
두 청년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꾹 다문 입과 일자로 뻗은 눈에서 고집이 엿보이는 청년, 이청운이었다.
강하게 보이는 각진 얼굴에 눈초리가 살짝 치켜 올라가서 독기가 느껴지는 청년은 혁련휘였다.
둘 다 묘령의 소녀들이 대하면 얼굴을 붉힐 만큼 준수했다.
“거지새끼가 독하기는…. 좋은 말로 할 때,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시험에 나가지 마. 아니면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날 이기고 싶으면… 공부를 더 해서 실력으로 이겨.”
“이 자식이 진짜……!”
혁련휘가 갑자기 주먹을 휘둘러 이청운의 가슴을 후려쳤다.
퍽!
가슴을 얻어맞은 청운은 얼굴이 일그러진 채 앞으로 꼬꾸라졌다.
혁련휘가 재빨리 발을 뻗어서 꼬꾸라지는 청운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히는 걸 막았다.
그도 잠시 이번에는 발로 청운의 옆구리를 찼다. 발끝이 갈비뼈 사이를 강타했다.
쓰러진 청운이 떼굴떼굴 두어 바퀴 굴렀다.
청운은 숨을 쉬지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봤을 때 신음은 혁련휘의 폭행 의지만 더해 줄 뿐이었다.
청운을 향해 허리를 숙인 혁련휘가 얼굴을 들이밀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청운, 우리 친구잖아. 친구가 한 번만 양보하라는데, 그게 그렇게 무리한 부탁이냐?”
청운은 힘들게 고개를 들어 혁련휘를 바라보았다.
친구?
그렇다. 두 사람은 친구였다.
그동안 남들이 모두 그렇게 말했다.
자신도 삼 년 전까지는 그런 줄 알았다.
어릴 때 돌아가신 선친과 혁련휘의 아버지가 친구였기에 더더욱 친구처럼 잘 지내려고 했다.
하지만 삼 년 전, 개별 스승이 정해진 이후 혁련휘의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혁련휘는 묘청 선생 위진천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묘청 선생은 자신을 제자로 삼았다.
그 후 혁련휘는 자주 화를 내고 자신을 괴롭혔다.
자신은 가진 것 없는 천애고아, 혁련휘는 서원의 유력한 후원자이자 개봉성의 유지인 혁련장의 후계자였다.
맞상대하면 천향서원에서 쫓겨날지도 몰랐다. 은인이나 다름없는 스승님께 누가 될지도 몰랐다.
그래서 때리면 맞았다.
자신이 먹는 음식에 장난을 쳐도 꾹 참았다.
언젠가는 음식 속에 섞인 썩은 생선대가리를 씹은 적도 있었다. 혁련휘가 넣었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했다.
차라리 당하는 게 마음 편했다.
몸은 고통스러워도 스승님께 학문을 배울 수 있으니까.
그렇게 지낸 지도 어느덧 삼 년째.
이제 맞는 것 정도는 이골이 나 있었다.
“왜 대답이 없어? 이 아비어미도 없는 거지 자식아!”
혁련휘가 으르렁거리며 재차 발을 뻗었다.
퍼벅! 퍽!
청운은 몸을 웅크리며 충격을 최대한 완화시켰다.
그가 버티는 것은 단순히 고집이 센 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어릴 때 아버지는 전시를 보러 가던 중 산적을 만나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그다음 해 병마에 시달리다 아버지 곁으로 떠났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남은 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문의 이름과 자신의 몸뚱어리뿐이었다. 스승님께서 제때에 거두어주지 않으셨다면 길거리에서 굶어 죽었을 것이다.
‘넌 많은 걸 가졌지만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그런 나에게 이번 전시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야. 반드시 장원이 되어야만 연중삼원이 될 수 있어. 절대 양보할 수 없어!’
청운이 입을 꾹 닫은 채 버티자, 혁련휘의 눈에서 독기가 번들거렸다.
“X새끼… 독사 같은 새끼… 아비어미도 없는 고아 새끼가 고집만 세서는….”
휘두르는 손발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퍽! 퍼벅! 퍼버벅!
청운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냈다.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구타였다. 그나마 혁련휘가 손발에 공력을 주입하지 않아서 뼈는 부러지지 않았지만, 온몸의 살이 다 찢겨져 나가는 듯 고통스러웠다.
아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정말 맞아 죽었을지도 몰랐다.
“거기 누구냐? 어떤 놈들이 감히 서원 뒤에서 싸우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