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시계(視界)를 뒤덮은 하얀 빛.
시간이 지나자.
달빛처럼 하얀 섬광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허공에서 고속으로 엮이고 있는 모습이 조금씩 시야에 잡힌다.
백창규.
자신이 담고 있는 천마의 영혼과 북해빙궁주와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그는, 방금 있었던 순간을 떠올린다.
‘대체···.’
만년빙정 주위로 섬광이 터진 순간.
전신에 퍼진 엄청난 기파(氣波).
거대한 구(球)의 형태로 퍼진 엄청난 그 거대한 기파는, 깊은 공동(空洞)을 넘어 크렘린궁이 있는 지상까지 빠르게 퍼지고 있었는데.
콰콰콰콰콰-!
그 모든 것을 창규가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딱 하나.
‘아.’
그 모든 기파를 만들어 낸 것이, 창규의 몸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창규와 북해빙궁주.
쉴새 없이 움직이는 그 둘이 충돌하며 일으킨 아득한 횟수의 검격(劍擊)들이, 점과 선을 넘어 원과 같은 형태의 기파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얘기다.
━━! ━━! ━━! ━━! ━━!
달빛처럼 영롱한 무형의 검을 휘둘러 창규의 전신을 만년빙정이 있는 쪽으로 처박으려는 북해빙궁주의 공격. 그리고, 창규의 전신을 이용해 이를 받아치며 싸움을 밖으로 끌고 나가려는 천마의 공격.
점점 확대되는 기파들.
그것은, 원의 바깥쪽과 안쪽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압력을 밀어내기 충분한 것이었다.
바깥쪽으로부터는 묘한 구름이 밀려듦과 함께 세상의 모든 것들이 흡수되듯 날아오고 있었고, 저 안에서는 번쩍이는 만년빙정이 밀어내는 기묘한 빛이 다가오는 지금.
안과 밖에서 만들어진 이중의 막 사이에서, 오직 북해빙궁주와 만드는 검격만으로 그 모든 공간을 늘려가고 있는 천마.
굉장한 공격이었다.
창규는 기가 막혔다.
자신이 휘두르고 있음에도 도저히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빠르고 강맹한 공격들.
자기 멋대로 움직이는 전신을 본 그는, 기억한다.
‘그래, 이번엔 선배 차례였지.’
지난번 자신의 의지에 의해 몸에 강림했던 천마를 떠올렸다.
그와 천마 사이의 계약서에 의하면.
이번엔 천마가 원하는 때 창규의 몸에 마음대로 강림할 수 있는 차례.
‘뭐··· 상관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둠 속에 빠지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적응하는 시야처럼, 지금 그의 눈은 사방에서 피어나는 검격들의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 ━━! ━━! ━━! ━━!
그는 기억한다.
강원도에서 혈교 제사장인 진백현에게 죽을 뻔했을 때, 자신과 계약을 맺은 후 강림해, 놈을 하늘과 함께 터뜨려 일격에 죽여 버렸던 천마의 무위(武威)를.
그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천마의 무(武)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르는 북해빙궁주의 공격을 빠르게 걷어 내는 검.
‘이렇게 비껴치는구나.’
숨 막힐 것 같은 압박과 함께 쏟아지는 상대의 잔상을, 칼날을 돌리는 것만으로 무효화시키는 동작.
‘내공을 이렇게 잘게 나눠서···.’
여태껏 시도해본 적 없는 식으로 내공을 운용하여, 경공을 펼치는 동시에 적재적소에 힘을 뿌리는 방식까지.
‘아아.’
이 모든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아름답고, 즐겁다.
이 순간을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이것이야말로 창규가 평생 원해 왔던 진짜배기 무(武)였으니까.
물론.
창규의 감상과는 별개로, 천마와 북해빙궁주 사이의 전음은 계속 이어진다. 입을 사용해 소리를 내는 것으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빠른 속도의 대화가.
섬광과 섬광 사이, 이어지고 있다.
- 당신도 많이 약해졌네.
- 누가 할 소리.
- 진작 이래야 했어. 무림의 크기가 줄어들어야 사람은 비로소 사람다워진다고.
- 오만이다.
-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당신이 그 입으로 오만을 담다니.
창규는 자신의 이맛살이 구겨지는 걸 느낀다.
- 자신의 기분에 따라 수천수만의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들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던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당신과 같은, 아니, 당신과 나 같은 괴물은 존재하는 것 자체가 부조리야.
- 부조리라.
스치는 눈빛에 빠르게 담기는 주변.
궁이 무너지고, 탑이 무너지고.
빠르게 이동하는 천마와 북해빙궁주을 향해 뭔가가 쏟아진다.
- 그래. 발달한 과학과 진보한 문명조차 무시할 수 있는 개인의 존재가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무림의 부조리다.
- 정말 우스운 소리군.
- 당신이 이해할 것이라 생각 안했어.
- 아니, 네가 말하는 무림의 부조리는 원래 예부터 존재하던 세상의 이치다.
무엇이 쏟아지는지 알 수 없다.
미사일이 날아왔는지, 폭탄이 터졌는지.
그도 아니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다른 무림인들이 이쪽으로 합공을 펼치고 있는지.
하지만 상관없었다.
천마와 북해빙궁주가 부딪치며 형성하는 잔상만으로, 지금 주변에 닿는 모든 것들이 터져나가거나 나가떨어지고 있으니까.
- 문명, 과학, 사회 체계. 그 모든 게 개인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게, 무림의 부조리라고? 아니!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야!
콰콰콰콰콰쾅!
- 무림이 사라진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 같아? 한마디만 뱉어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이들을 봐! 놈들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세상의 많은 것들을 보라고!
- 그것과는 다르다.
- 아니, 오히려 지금은 더하지. 저들 중 밑바닥부터 올라온 이가 몇이나 되나? 탄탄한 배경 없이 홀로 저 자리를 쟁취한 자가 몇이나 되냐고!
부서지는 주변의 풍광 속에서.
- 무(武)는 그에 비하면 낫지. 재능만 있으면 문파의 힘을 얻지 않고도, 밑바닥에서도, 그 외의 어떤 배경이 없이도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꼭대기에 선 자들이 견고하게 세우는 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건, 오직 무(武)의 세상뿐이란 얘기다!
- 설득력이 없군.
창규는 느낀다.
- 그런 건 당신 같은 이가 할 얘기가 아니야.
- 뭐?
- 당신은 재능이 뛰어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武)의 천재. 만년에 나올까 말까한 재능을 가진 주제에, 배경과 밑바닥을 논해 봤자 그건 의미가 없어.
- 하지만.
-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지. 빙천구음지체(氷天九陰之體)란 체질 역시, 재능이라는 평범한 단어로 수식할 수는 없으니까.
- ······
- 애초에 당신이나 나처럼 기형적인 강함을 타고난 자가 아니면 이 바닥에 수술칼을 들이밀 수 없다는 것 자체가, 무림이 끝나야 할 이유라는 거야.
번쩍하는 빛과 함께.
천마의 활약을 가만히 지켜보던 자신의 의식이, 순간 빠르게 움직이는 자신의 전신과 천천히 연결되는 것을.
- 이자가 있다.
- 뭐?
- 이 녀석이 있단 말이다! 무(武)의 재능으로 따지면 티끌만큼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자신의 빛으로 반짝이는 동공을 느끼며.
- 이 녀석이 그 증거다! 재능이 없이도! 배경이 없이도! 타고난 건 아무것도 없이 무(武)의 끝까지 오를 수 있는!
- 확실히 그 몸은···.
- 증명하지.
창규는, 천마가 자신에게 몸의 주도권을 넘겨줬음을 깨닫는다.
- 무(武)가, 어떻게 사람을 빛나게 하는지.
* * *
창규는 떠올린다.
고수를 우러러보던 순간들을.
무림인들 사이에 일어난 비무의 뒤처리를 하면서도, 분석과 체력 단련을 끊이지 않던 옛 시간들을. 없이 살았음에도 항상 무공을 배우고 싶어 했고, 향상된 실력을 갖추고 싶어 노력했던 그 모든 시간들을.
또한 떠올린다.
고수가 되었던 시간들.
죽을 고비와 기절할 것만 같은 고통을 수도 없이 넘겨, 우러러만 보던 고수들의 칼끝에 자신만의 별을 보탰던 순간을. 강물을 뛰어다니고, 콘크리트를 뒤집고, 바라던 바대로 몸을 움직이던 순간을.
그리고, 떠올린다.
자신에게 죽음의 위기를 느끼게 했던 고수를. 어떻게 이길 것인가 눈앞이 깜깜했던 그 고수 수준의 상대를 동시에 상대해도 가볍게 이길 수 있었던 자신의 경지를. 그러니까, 스스로가 상정했던 한계가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을.
또한 기억한다.
방금 있었던 움직임들.
북해빙궁주를 맞서, 천마가 자신의 몸으로 손수 펼쳐준 이 모든 가르침들을. 그래, 이건 가르침이었다. 앞서 무(武)의 길을 걸어간 선배가 정성스럽게 알려 준 그만의 가르침.
긋는다.
움직인다.
막는다.
비껴친다.
피한다.
바로 벤다.
기억한 움직임들을, 이 꿈 같은 세상에서 천천히 행하던 창규의 의식을 무언가가 두드린다.
- ━━, ━━━, ━!
몸을 돌려준 천마의 지시.
하지만.
이제, 창규는 어렴풋이 알 것만 같다.
여태까지 선배가 알려 준 가르침과, 지금 손수 보여 준 가르침. 이 모든 가르침만이 무(武)의 극(極)으로 가는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무의 끝을 향하는 최단거리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를 느꼈을 때.
슈우우우욱!
순식간에 원래 속도로 되돌아온 세상.
순간, 쏟아지는 수많은 정보 속에서.
━━━━━쾅!
북해빙궁주에 맞서 몸을 움직인 창규는,
비로소 깨달았다.
- ············그렇지!
여태까지 천마가 자신에게 말하고자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 * *
국가 재난 사태였다.
핵이 폭발한 것보다 더 큰 반경까지 영향을 미치던 공기의 움직임. 전세계에 실시간으로 보도가 될 정도의 대형사태. 그런 상황에서도,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는 기묘할 정도로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대의를 위한 것이다.)”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대통령의 몇몇 측근은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들이 북해빙궁주였던 삭월(朔月)의 리더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하지만, 모든 북해빙궁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다른 무림인들과 같이 행동했다.
그러니까, 점점 묘하게 힘이 빠지던 자신들의 단전을 느낀 후부터 지상 위로 퍼진 그 기묘한 장막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반구형(半球形)의 장막.
아니, 이건 초기의 이야기.
지하에서부터 시작해 크렘린궁 위로 부풀어 오른 그 반구형의 장막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늘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즉.
구형(球形)의 장막.
-이 되었다는 말이다.
마치 풍선처럼 하늘 위로 솟구친, 태양처럼 강한 섬광을 뿌리던 그 거대한 기운의 집합체.
경공까지 펼쳐가며 이를 쫓아 합공을 뿌리던 무림인들은,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그 기운을 쫓아가지 못했다.
힘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단전의 힘.
즉, 내공의 형태로 가두어두었던 기운이 조금씩 사라져간 그때.
구형(球形)의 기운이, 날아가 버렸다.
아직 단전에 남아 있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경공을 펼치려던 무림인들은, 곧 구름처럼 보일 정도로 멀리까지 두둥실 날아 가버린 그 동그란 빛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가장 먼저 변화를 눈치챈 건 세계무림맹주 코엔이었다.
절반 남짓.
그는, 자신의 단전에 남아 있는 내공을 포함해 주변에 있는 자연지기의 밀도가 그 정도로 낮아졌음을 느꼈다.
하지만 기묘했다.
또다시 찾아올 무림의 공백기를 예상한 코엔은, 그러나 그 이하로는 내려가지 않은 기운을 느꼈으니까.
어쨌든, 그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지금 자신이 느낀 변화를 다른 이들도 느꼈다는 가정하에, 세상은 급격하게 변할 테니까.
무림의 약화.
이 사태에서, 그는 기존에 세웠던 질서를 다시 점검해야 했다. 그동안의 힘으로 유지했던 다른 나라들과의 역학관계나, 무림의 질서 등을 다시 세우기 위해 세계무림연맹의 회의를 수집했다.
각국의 수장들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무림 세력에게 친화적이었던 국가와 적대적이었던 국가. 또한 무림인들 위주로 보안 시스템을 구축했던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 각 국가의 정부 아래 존재했던 파워의 역학관계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론 보도 역시 마찬가지.
사회면과 문화면을 포함해, 스포츠와 정치까지. 여태까지 무림인들을 다루었던 논조가 날이 갈수록 조금씩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사회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는 줄어든 무림인의 입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듯했다. 공중파에서 코미디언들이 무림인들을 비꼬는 듯한 농담을 해도 그 소속사가 테러를 당하지 않았고, 밑바닥 무림인들의 힘든 삶을 찍는 다큐멘터리도 나오기 시작한 어느 날.
콰콰콰콰콰콰-!
태평양 어딘가.
하늘 위에서부터 거대한 무언가가 낙하하고 있었다.
혜성이라기엔 조금 작지만, 미사일이나 인공 발사체라고 하긴 너무나 번쩍였던 그 구체.
그렇다.
거대한 구체.
사방이 섬광으로 빛나는 그 거대한 구체가, 태평양의 수면 위로 떨어진 그때.
촤아악-!
태평양이 갈라진 그대로.
바닷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겨울이었다.
* * *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온 어느 날.
그들은 동해에 있었다.
“담배 끊으쇼. 그 나이까지 잘 견뎠으면서 왜 또 담배를 배워.”
“맞는 말씀입니다.”
차가운 동해 바람을 맞으며 담배 연기를 흩날리는 남자와, 그를 질책하는 남자.
“그렇긴 한데, 제 천···마음이 영 답답해서요.”
“와, 이 말투도 이제 적응이 되네.”
눈을 질끈 감은 남자, 그러니까 서정우가 김두광에게서 고개 돌려 중얼거렸다.
그 변치 않는 반응에 피식 웃은 김두광.
그가 마지막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저 멀리 항구에 세워진 배를 바라보았다.
“걱정마십시오. 당분간은 듣고 싶어도 듣지 못하실 테니.”
“······진짜 가려고?”
“왜, 섭섭하십니까?”
“개소리. 섭섭은 개뿔.”
하지만 말과 달리 서정우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1년 넘는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보다 옅어진 무(武)의 세상에 적응을 마친 과정에도 여전히 적응하지 못했던 서정우.
강호에 출두해서 사귀었던 첫 친구도 잃어버린 것도 모자라, 좀 이상하긴 해도 두 번째 친구라고 여겼던 이마저 떠내 보내려니 마음이 헛헛한 까닭이었다.
“전, 메시아와 함께 돌아올 겁니다.”
“걔가 어딨는 줄 알고.”
“이 썩을, 무엄한-!”
“아니, ‘그분’이 어딨는 줄 알고.”
“그건 모르겠습니다.”
백창규를 ‘걔’라고 말하니 발작하려던 김두광이, 다시 온순해진 태도로 백창규를 찾기 위한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하지만 다른 계파들의 대장로들을 마주하면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후우. 그래, 뭐 네 뜻이 그렇다면.”
한숨을 쉰 서정우.
또 그 얘기다.
참하늘주님성회의 세 계파 중 나머지 두 계파의 대장로들까지 포섭해서 세력을 일통하면 백창규가 나타날 것이라는 이야기.
창규가 어떤 사람인지 직접 겪은 정우는, 놈들이 벌써 1년 동안 지껄인 저 택도 없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잘 갔다 와라.”
“네.”
굳이 티는 내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이 녀석과 꽤 친해졌기도 했고, 지금 여기 모인 저 수많은 사람들을 굳이 실망시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다들, 뭐 해! 너희 장로님 출발하신단다!”
“의리!”
“의리!”
“의리!”
등 뒤에서 울려퍼지는 거대한 고함.
뒤돌아본 정우의 눈에, 부둣가를 메운 수많은 참하늘주님성회의 신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내지르는 함성소리가 들린다.
“의리!”
“의리!”
“의리!”
“의리!”
“의리!”
누군가는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감격스러운 웃음을 터뜨리고,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방언을 터뜨린다.
이것이 참하늘주님의 성회.
여전히 사이비 같은 그 모습에 기가 막히다는 듯 한숨을 내쉰 정우가, 자신의 발 옆에 있던 가방을 김두광에게 전해준다.
“참, 이건 영감님 선물이야. 그 양반이 전해달래.”
“이런 건···.”
“성의는 거절하는 거 아니야. 애초에 이 밀항선도 백검단 쪽에서 해준 거잖아.”
“아.”
“받아도 돼. 그리고, 어차피 한국 무림이 이렇게 잘 자리잡은 것도 너희들 덕분이잖아. 충분히 받을 자격 있다고. 그치, 하루?”
서정우가 뒤편에서 담배 피고 있는 하루와 눈을 맞춘다. 그러자, 김두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하루.
받으라는 뜻이었다.
봤냐는 듯, 농담 섞인 말을 건네며 달러 가득한 가방을 건네는 서정우.
“이건 백검단이 아닌, 무림맹주의 선물이야. 칼 맞기 싫으면 빨리 받으라고.”
그의 생각에도 김두광은 이걸 받을 자격이 있었다.
작년.
그러니까 한국 무림이 혼란에 빠지고, 무림 맹주인 곽용범을 필두로 한 소수세력들이 중국 쪽 문파를 포함한 한국의 수많은 문파들에게 공격받았을 때.
적들조차 질릴 만큼의 기백으로 목숨조차 아끼지 않고 필사적인 도움을 주었던 게, 바로 이 김두광이 이끌던 참하늘주님성회였다.
다시 한국 무림이 안정화된 지금.
맹주 곽용범은 물론, 백검단장 박웅태와 부단장 한주빈까지, 먼 길 떠나려는 김두광을 향해 넉넉한 노잣돈을 준비해 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눈물을 글썽인 김두광이 서정우가 주는 가방을 건네들었을 때.
“그럼, 천···마음을 감사히 받겠···.”
“뭐야.”
문득 동해 저편으로 고개 돌리는 서정우.
동시에, 뒤편에 가득했던 참하늘주님성회의 신도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림이 일어난 그때.
담뱃불을 비벼끈 하루가, 부둣가 바로 앞의 난간까지 급하게 걸어나갔다.
“·········!”
그리고, 모두가 그의 뒤를 따라온다.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번쩍이는 햇볕이 부서지는 동해 바다 위로, 누군가가 ‘걸어’ 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모두의 내공이 약해진 요새는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서정우가 생각했을 무렵.
“·········어?!”
점점 가까워지는 사람을 본 그의 눈이 번쩍 떠졌을 때.
그는 곧 자신의 뒤에 가득한 사람들이 터뜨리는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의━━리!”
“의━━리!”
“의━━리!”
“의━━리!”
“의━━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인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 채로.
“하, 하···, 그래, 의리다, 의리.”
“메, 메시아시여━━━━!”
혼비백산 소리지르는 김두광의 옆에서,
그는 곧 마주할 수 있었다.
찰랑, 찰랑, 찰랑.
등 뒤로 부서져 내리는 햇볕을 업은 채, 바다 위를 아무렇지 않게 걸어오며······.
“왔냐?”
“어, 왔다.”
······씩 웃음 짓는 백창규를.
<현대 무림 견문록>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