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네보 극장.
볼크 페트라코프와 백창규가 만나기로 한 이곳은, 인구가 북적대는 모스크바에서도 나름 중심부에 있는 극장이었다.
모스크바가 어떤 곳인가.
러시아의 수도이자, 전 세계를 따져도 Top 10위 안에는 넉넉하게 들어가는 초대형 도시 아닌가.
크기만 큰 게 아니다.
대형 시가지의 중심부에는 모스크바강이 흐르는 왼편에 크렘린 궁전이 있고, 바로 근처에는 수많은 도로 및 거리가 모여드는 붉은 광장이 있으며, 곳곳에 도서관과 박물관, 극장을 포함한 여러 문화시설들이 즐비하다.
그 말인즉.
웬만한 대도시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그리고 모여들 수 있는 도시라는 얘기다.
빵빵-!
도시 곳곳에 울려 퍼지는 자동차 경적 소음은 물론, 인도를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오는 대화 소리와 발자국 소리들이 어지럽게 얽혀 대도시의 교향곡을 만들어 내는 이 모스크바.
극장 거리, 카페 거리, 유흥 거리, 업무 시설이 있는 거리.
그 모든 거리들이 모였다 사라지는 이 모스크바의 한 중심부에.
네보 극장이 있다.
이 극장 역시 모스크바의 다른 극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페라와 발레를 취급하는 극장이 있는 곳답게 싸구려 술집이나 초고층 마천루가 가까이 있지는 않았지만, 오래된 업무용 빌딩이나 분위기 좋은 카페,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미술관이 인근에 있는 덕에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이 꽤 많은 이 근처에.
그러니까, 맞닿은 차도에는 택시나 버스, 승용차나 SUV 등 수많은 차량들이 오가고 있는 이 네보 극장 근처에.
그 모든 곳에, 마피아들이 배치되어 있다.
볼크 마피아.
남미의 카르텔 따위는 상대도 안 되는, 심지어 러시아 정부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규모와 파워가 큰 러시아 제일의 범죄조직, 볼크 패밀리 말이다.
철컥, 철컥, 철컥.
버스 정류장이 있는 대로변에서 조금만 들어가면 있는 카페 뒤편의 골목길에서 담배를 핀 저 마피아들은, 지금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간 뒤 표적을 보면 언제라도 쏠 수 있게 권총을 장전한 참이다.
털썩, 털썩, 털썩.
인근 호텔의 옥상.
네보 극장의 입구가 대각선 아래로 바로 내려다보이는 호텔의 옥상에 모인 저 저격수들은, 지금 미세하게 조금씩 다른 스팟에 가져온 짐을 풀어놓은 뒤 저격 위치를 잡고 있다.
터벅, 터벅, 터벅.
아까부터 사람들과 섞여 네보 극장 근처를 계속 걷고 있는 저 다양한 복장의 암살자들은, 그들이 여태껏 배워왔던 검술을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단도를 허벅지에 차고 있으며.
부우우-
차를 탄 채 몇 번이나 이 근처의 차도를 오가고 있는 저 마피아들은, 저격총은 물론이고 조명탄과 독침 및 마취총까지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보조 무기들을 뒷좌석에 그득하게 실은 상태.
그뿐인가.
투명한 유리창을 한 저 길거리 카페들에도, 가까이 보이는 저 업무용 빌딩의 창문 안쪽에도, 그 외에 인간이 앉을 수 있는 수많은 공간에도.
볼크 패밀리는 존재한다.
무공을 익힌 칼잡이들은 물론이요, 은퇴한 특수부대 출신 저격수까지. 조직의 엘리트 킬러들은 당연하고, 그 외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력들을 모두 이 거리에 풀어 놓은 상태다.
그러니까, 근방을 오가는 인파 전체의 1/3이 볼크 마피아로 구성된 지금.
“(지금 출발한다고? 알았어. 예상시각은··· 좋아. 들어오면 무대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내가 보일 거야. 그래··· 남자답게 약속해라. 난 혼자 있을 테니, 넌 미하일을 반드시 산 채로 데려와야 한다고.)”
네보 극장 안, 빈 좌석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전화를 끊었다.
뚝.
볼크 페트라코프.
감히 아들을 납치한 개자식을 죽여 버리기 위해 패밀리의 병력을 잔뜩 투입한 이 뒷세계의 거물이, 비로소 한숨을 내쉰 그때.
“(후우.)”
“(이 새끼 지금 감히 누구 앞에서 건방지게 한숨을 쉬는 거야?)”
천장에서 살벌한 말이 들려왔다.
섬찟한 표정을 짓는 페트라코프.
그 순간, 극장 천장의 어딘가에서 그가 앉아 있는 옆 좌석으로 무언가가 파밧 떨어진다.
“(너, 북해빙궁 쪽에다가는 확실히 얘기한 거 맞지?)”
뒤이어 파바바밧!
눈으로 쫓기 힘든 무언가가 그의 주변으로 연달아 떨어져 내린다.
“(했겠지. 아까 전화하는 거 우리도 들었잖아.)”
“(문자도 확인했고.)”
“(혹시 몰라, 딴 마음 피우는 거 아냐? 북해빙궁에 연락할 또 다른 수단이 있다던가···.)”
“(다들 의심이 지나치네. 새끼랑 자기 목숨이 걸렸는데 헛짓거리 하겠어?)”
장난기 가득한 말투에 가득 담긴 살기(殺氣).
자신을 둘러싼 5명의 무림인들 사이에서.
굳은 얼굴을 한 페트라코프가 말했다.
“(·········걱정 마.)”
그는 어젯밤, 어떻게 알았는지 자신의 집까지 들어와 목숨을 위협했던 이들의 요구를 완벽히 들어준 상태였다.
“(어젯밤, 당신들이 본 그때부터 북해빙궁 쪽 사람들은 반경 1㎞ 밖으로 나가 있기로 합의가 되었으니까.)”
“(확실한 거지?)”
“(통화도 들었고 문자도 봤잖아. 애초에, 그쪽 사람들은 원래 절대로 우리 대신 손 더럽혀 주지 않아. 기껏 해 봐야 이렇게 상황이 터졌을 때 자릴 옮겨서 적극적으로 모른 척하는 것밖에는 없다고.)”
“(그래, 그게 무림인이지! 크히히히.)”
다섯 명의 혈교 제사장들.
섬찟한 웃음을 터뜨리는 그들을 바라본 페트라코프가 공포심과 함께 느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안도감이었다.
차라리 잘 됐다.
사실, 이미 북해빙궁 쪽에게 거절당했었다. 미하일을 공격한 녀석을 네보 극장까지 유인해 올 테니 대신 잡아 달라는 부탁 말이다.
생각해 보면, 놈들이 움직이는 건 딱 하나다.
저 크렘린궁까지 들어가는 얼음 수급에 차질이 생겼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
볼크 패밀리가 러시아 제일이 된 이유는 딱 그것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매번 그렇게 방해물을 대신 제거해 줄 때마다 우리 쪽 사업의 책임자들을 죽였었지.)’
매번 방해세력들을 대신 박살내 주면서도, 다음번에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하라며 이쪽에서도 목숨을 취해 가던 북해빙궁.
녀석들은 이런 개인적인 원한 같은 경우는, 그게 아무리 보스의 부탁이라고 해도 들어 주지 않았다.
자신들을 부리지만, 특별히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는 얘기다.
그에 반해, 어쩌면 이들은 더 나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에 당신들이 성공하면 내 전 재산의 반을 줄 수도 있소. 그러니 제발 그 녀석을···.)”
“(몇 번을 말하게 해?)”
전신에서 끔찍한 피비린내를 풍기는 이놈들.
혈교 제사장이건 뭐건, 상관없다.
“(네가 이 녀석을 우리 앞에 완전히 데려오기만 하면, 너 같은 놈한테 볼일 따윈 없어.)”
“(그래. 이제 우리 세상이 올 테니까.)”
“(뭐, 정 원한다면 우리가 네놈들을 대신 부려줄 수 있고. 어차피 북해빙궁은 우리가 싹 다 죽여 버릴 거고, 우리도 새로 펼쳐질 세상을 움직이려면 번거로운 게 한둘이 아닐 테니.)”
욕망에 눈을 번뜩이는 강한 무림인들.
이들이라면, 자신과 함께 아들을 건드린 그 망할 새끼를 잡아 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으니까.
목표가 맞아떨어졌다는 것이다.
백창규라고 했나.
미하일과 함께 다니며 난동을 부렸던 지역 중 볼크 마피아 소속의 건물이 있는 곳에 설치된 CCTV에서 녀석의 실력을 봤을 땐, 대체 어떻게 잡아야 하나 속만 끓어올랐지만.
‘(이 정도면 충분해.)’
밖에 세워놓은 저 엄청난 병력에, 여기 있는 혈교 제사장들까지.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여차하면 아예 이 건물과 이 거리째 폭발시킬 정도의 위력을 가진 폭탄을 터뜨릴 수도 있고.
일반인이 죽건 말건, 그딴 건 애초에 고려할 요소에 넣지도 않는 페트라코프.
애초에 그가 마피아 생활을 하며 죽인 무고한 사람이 몇이던가.
지금 그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딱 하나다.
복수.
감히 볼크 가문의 명예에 흠집을 낸 그 개자식을 잡아, 산 채로 죽는 것보다 못한 놈으로 만들어 주리라고 생각한 그 순간.
띠리리리.
다시 울리는 전화벨.
다섯 혈교 제사장들의 살벌한 눈빛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은 페트라코프.
“(·········뭐? 장난해?)”
전화기 너머에서 들린 상대방의 통보에 가까운 제안에, 그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제 와서 장소를 바꾸겠다고?)”
* * *
할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백창규.
- 하··· 그거 완전 양아치 새끼네···.
한시라도 만년빙정의 위치를 알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천마의 입에서, 한숨처럼 맥없는 욕설이 흩어져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네보 극장이 시야에 잡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창규가 보았던 건 누가 봐도 그를 잡아 죽이려는 녀석들의 함정.
총은 물론 나름대로 내공까지 있는 마피아들이 바글대는 모습이 훤하게 보이는 게 꽤 우스웠지만.
‘거기까진 그럴 수 있어.’
그 정도는 예상했다.
애초에 놈들은 마피아.
남자답게니 뭐니 포장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어쨌든 기본적으로 뒤통수를 칠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혈교 새끼들은 선 넘었지.’
네보 극장의 지붕 위로, 혈교 제사장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내공 수치들이 보였다.
희미하게 붉은 기운이 그 위로 살짝 넘실거리는지 아닌지, 그것까지는 확실하게 단언하기 힘들었지만, 사실 그게 혈교 제사장이건 아니건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하나.
볼크 페트라코프.
혼자 극장에서 기다리겠다며 호언장담한 녀석이, 극장에 준비시킨 고수들이 5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다섯이라···.’
애매하다.
사실, 무리해서 싸우면 못 이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일단 그만한 내공 수치를 가진 혈교 제사장들은 2명까지 그렇게 무리하지 않고 잡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녀석들만 있을 때의 얘기고.
‘마피아들이 꽤 많아. 준비시킨 무기도 꽤 있을 테지.’
저긴 지금 마피아들의 밭이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싸움 도중에 찰나의 틈이 발생할 수도 있고, 하나나 둘도 아닌 다섯 고수들과의 싸움에서는 그 틈이 치명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지 않은가.
창규가 신경 쓰는 건 본인의 안전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저 모든 과정에서, 민간인이 다칠 수도 있다.
길거리에서 주먹만 들면 옆에 있는 사람이 맞을 정도로 민간인들이 밀집해 있는 저곳에서, 칼 들고 깽판을 친다?
죄 없는 사람이 수십 수백은 죽어 나갈 것이다.
그뿐인가.
‘지금 놈이, 저 극장에 있는지 없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렇다.
다섯 고수를 극장 안에 숨겨둔 것만 알 수 있는 창규로서는, 이제 페트라코프가 저 안에 있는지 믿을 수 없다.
아무런 보물이 없는 함정.
그곳에 아무 생각 없이 돌진할 정도로 창규는 멍청한 놈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래서 혼자 와 본 거지만.’
처음부터 놈들이 어떤 수작질을 하나 간을 보기 위해 혼자 움직였던 창규였다.
“(······그래서 돌아왔다.)”
“(이런 망할!)”
다시 되돌아온 호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한 뒤 미하일의 혈도를 점한 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았던 노끈과 재갈을 풀자, 녀석은 쉬지 않고 욕지거리를 쏟아 냈다.
그를 묶은 창규를 향해선지, 아니면 상황을 이렇게 만든 자신의 아버지나 마피아들을 향해선지, 아니면 그 모두를 향해선지.
계속해서 욕을 해 대던 미하일.
짜증과 울분, 분노와 같은 감정을 전부 토해 내듯 마지막 욕설을 쏟아 낸 그의 입에서, 곧 단어 하나가 튀어나온다.
“(······크렘린궁이야.)”
“(뭐?)”
여태까지 창규가 궁금해하던 그 질문에 대한 답 말이다.
“(못 들었어, 새끼야? 우리 얼음 사업의 최종 목적지, 그 빌어먹을 크렘린궁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