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대 무림 견문록-141화 (141/150)

141화.

뚝뚝.

마치 소나기가 한차례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설원 위에 흥건하게 고인 새빨간 핏물들.

“(······말도 안 돼.)”

이를 본 미하일의 얼굴엔 어이없다는 표정만이 새겨져 있었다.

아직도 코를 쑤시는 자욱한 피냄새.

그리고 사방에 보이는 내장과 시체 조각들.

저것들은, 방금까지만 해도 사람이었다.

사람 중에서도 무림인.

무림인 중에서도 혈교(血敎).

자신이 이 바닥에서 들었던 그 무시무시한 소문의 주인공이자, 당연히 무림인 중에서도 쉽게 보기 힘든 마스터.

그것도, 자신은 로켓런처나 저격총 따위로 무장한 부하들을 데리고 습격해도 잡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지 않는 최고 수준의 마스터가 둘이나 습격해 오는 상황이었다.

‘(얼추 아까랑 비슷한 놈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보다 심각했다.

폭탄이 설치된 괴상한 원숭이들과, 그것들을 조종하며 사슬낫을 쓰는 여자, 그리고 주변에 떨어진 모든 피가 하늘로 솟구쳐 이상한 장벽이 만들어지고 괴이한 공격을 해대던 그 사술까지.

그것들과 비슷한 무언가를 느끼긴 했지만, 농도 자체가 달랐다.

허공에 새겨지던 육망성의 별.

그리고 일순 하늘이 까맣게 변하나 싶더니, 별똥별처럼 떨어지기 시작하던 핏방울들.

단순한 핏방울이 아니었다.

총알과 같은 느낌의···.

아니, 총알이 아닌 화살이었나?

돌멩이?

사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 이후 등장한 것에 비하면 말이다.

적중당한 바위가 그대로 뚫릴 정도로 기묘한 에너지가 담긴 채 뭉친 그 핏방울들이 어두워진 하늘에서 쏟아지는 가운데 등장했던 정체불명의 살기(殺氣)들.

기묘한 일이었다.

각각이 허공조차 진동시킬 만큼 강력한 살기를 내뿜는 두 마스터들. 그 묵직한 존재감 사이에서, 마치 끈으로 연결이라도 되어 있는 것처럼 이어진 긴 살기가 있었다.

마치 두 칼자루와 칼자루 사이에 단단한 밧줄을 연결한 것처럼 말이다.

‘(그게 뭐였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 둘은 각자의 방식대로 좌우에서 이쪽을 향해 각자 맹렬한 공격들을 퍼부었지만.

그 둘이 ‘존재하지 않는’ 그 사이에도, 직감적으로 절대 닿으면 안 될 것이란 생각이 드는 무언가가 살기(殺氣)의 형태로 이곳을 휩쓸었다는 얘기다.

가만히 고개를 돌아보는 미하일.

뒤편에, 마치 동시에 같은 면도기에 잘린 것처럼 절단면이 깔끔하게 잘린 침엽수림이 보였다.

그 옆으로, 이 도시 외곽에 설치되어 있던 한 공장의 굴뚝 부분이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잘라나간 광경이 보인다.

저 모든 것이, 그 남녀 마스터가 펼치던 공격의 ‘사이’에 있던 것들이었다.

서로의 공격뿐 아니라 그들 사이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무형(無形)의 살기는 물론, 이를 제대로 확인하고 감지조차 할 수 없게 이 싸움터 사방에 거센 핏방울들을 마치 총알처럼 쏴 내리던 말도 안 되는 자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일언반구의 말도 없이 눈앞에 쏟아진 이 엄청난 공격들을 마주했던 미하일의 등줄기에 소름이 쭉 돋았던 순간.

“(뭐 해, 정신 차려.)”

“(······아.)”

이자가 움직였다.

촥.

허공에 칼을 휘둘러 묻어 있던 피를 뿌린 뒤, 자신을 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대는 이 남자.

이 남자가 칼을 뽑은 순간, 모든 게 끝났었다.

원숭이 몇이라도 상대했던 아까와 달리, 이번엔 미하일이 뭔가를 해 보지도 못했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뭐가.)”

“(이 둘, 어떻게 잡은 거냐고.)”

“(아아.)”

“(아아가 아니라···!)”

“(말하면 알아먹을 수 있겠어?)”

입을 다문 미하일.

솔직히, 말해도 모를 것 같다.

이 녀석이 방금 펼쳤던 움직임은 아까와는 달랐으니까. 아까 보았듯 순간 잔상처럼 움직였던 것은 물론, 허공에 하얀 무언가가 피어나나 싶더니 순간 저들이 만들어 냈던 빨간 색의 공격을 ‘지워가는 듯’ 펼쳐졌던 이 남자의 거센 공격들.

아직도 그 광경이 생생한 미하일은, 다시 질문을 바꾼다.

“(너, 뭐야.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이런 괴물 같은 혈교 새끼들이 널 쫓는 거고, 대체 뭐하려고 북해빙궁을 찾는 거냐고.)”

“(글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다.

대체 혈교는 왜 등장한 것인가.

애초에 러시아 안에서 볼크 패밀리에게 뭐라고 할 수 있는 놈은 북해빙궁 뿐. 나머지 세력들은 볼크를 건드리기만 해도 북해빙궁 쪽이 나서서 정리해 주는 상황에서, 혈교 녀석들이 괜히 얻는 것도 없이 북해빙궁과 척을 질 위험을 감수하고 자신을 건드릴 리가 없다.

아까 표적이 된 것도 그렇고, 이 모든 일이 이놈 때문에 일어난 건 확실한데. 볼크 패밀리를 타고 북해빙궁의 ‘그쪽’으로 올라가려는 이놈의 행동이 설마 관련이 있는 것인가?

“(젠장! 대답 좀 해 봐! 답답해 미치겠다고!)”

“(그럼 아까 내가 말한 질문에 먼저 답해 주던가.)”

“(그거···.)”

“(말 못 할 거면 그냥 닥치고 가. 어차피 그건 너희 아빠한테 들으면 되니까. 그리고 이제부턴, 경공으로 간다.)”

“(겨, 경공?)”

“(뭘 놀라. 여기 앞쪽 철도가 저 꼴이 났는데 어떻게 가?)”

터벅, 터벅.

말을 마치고, 화물 열차의 운전칸 문을 두드리는 남자.

이젠 뒤쪽의 모든 컨테이너 칸들이 떨어진 열차를 운전하던 기관사들이 나온다.

겁을 먹고 불안해하는 듯한 그들의 표정은, 그러나 남자가 주머니에서 꺼낸 무언가를 받자 활짝 웃음이 피어난다.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다시 이쪽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며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그 모습을 보니, 분명 현금이나 값나가는 무언가를 소란에 대한 사죄의 의미로 주고 온 모양인 것 같은데.

터벅, 터벅.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아까 처음 싸움이 터졌을 때도 그렇고 이번의 싸움도 그렇고 앞에서 운전하던 기관사들은 단 1명도 죽지 않았다.

처음엔 우연이겠거니 했지만, 그 모든 이들을 보호하면서 싸운 건가? 그 치열한 싸움의 순간 동안?

애초에 일반 열차가 아닌 화물 열차를 택한 것도, 더 빨리 출발할 수 있다는 이유가 아닌 저런 이유 때문이었나?

무고한 사람들이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

“(뭘 쳐다보고 있어. 따라와. 저 앞부턴 이 철도가 보이는 쪽으로 쭉 따라가기만 하면 모스크바라더군. 도착한 이후 약속장소까지는 네가 안내한다.)”

강한 힘을 가지면 군림하는 것이 당연한 미하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짓을 하는 이 남자.

상대가 일반인이건 마피아건, 필요하면 협박은 물론 수습할 수만 있다면 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던 미하일이, 자신에게 살기(殺氣)를 쏘아내며 말하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을 때.

“(도망칠 생각 하면 이 자리에서 죽인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궁금증이 고개를 쳐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모스크바의 ‘그곳’까지 들어가 딱 한 번 ‘직접’ 본 적 있었던 북해빙궁의 핵심인물.

마주한 것만으로도 손이 덜덜 떨리던 그 괴물과 이 남자가 붙으면, 과연 누가 이길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 * *

사방에 꽉꽉 들어찬 냉기.

숨을 내쉬기만 해도 하얀 얼음 결정이 맺힐 정도로 차디찬 기운이 가득하다.

여긴, 축구 경기장 몇 개는 가볍게 들어가고도 남을 만큼 깊고도 넓은 공동(空洞). 자연이 조성했다고 하기는 너무 깔끔하고,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하기는 너무나 광대한 이 초대형의 수직 동굴 안에서.

달칵.

어딘가에서 작동했을지 모르는 버튼음이 공동 아래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 순간.

철컥.

기계 장치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공동 저 위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한다.

마치 엘리베이터처럼.

일정한 속도로 어떤 흔들림도 없이 안정적인 움직임을 유지하며 내려오는 그것은, 하지만 승강기 따위의 단어로는 묘사가 불가능했다.

콰콰콰콰콰-!

일단 크기 자체가 달랐다.

드넓은 합판.

하지만, 축구 경기장 몇 개는 너끈하게 들어갈 만한 이 거대한 공간을 감히 ‘드넓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크기뿐 만이 아니다.

슈우우우-!

가운데에 뚫린 거대한 구멍.

바닥 전체가 내려가는 만큼, 그 가운데에서 얼음보다 차가운 한기(寒氣)가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저 공간 역시, ‘구멍’이란 단어로 표현하긴 애매했다.

적게 잡아도 아파트 두세 채는 들어간다.

가까이서 보면 이것이 구멍인지 광활한 공간인지 구별하기 힘든 이것 역시, 이 모든 걸 ‘승강기’ 따위로 수식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도넛처럼.

초합금이 포함된 듯 튼튼하고 이음새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게 만들어진 이 초대형 바닥의 한가운데 난 거대한 구멍.

그 주변에,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난간을 따라 놓인 수많은 모니터들. 다양한 형태의 측정 장비 및 기계들과 연결되어, 각종 수치들을 이런저런 지표들로 표현하고 있는 모니터들 앞에.

사람들이 있었다.

수십, 아니, 적게 잡아도 100명이 넘는 사람들.

군복을 입은 몇몇을 제외하면, 모두가 정장을 입은 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연령대는 꽤 높아 보였는데, 이 광대한 승강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그들의 얼굴에는 아이 같은 종류의 순수한 웃음이 머물기 시작한다.

우우웅-!

하강하면 할수록, 모니터 옆에 설치된 디지털 온도계에 기록된 온도가 점점 낮아진다.

사방의 벽에 깔린 얼음들.

제각기 다양한 결정을 안에 머금은 채 이 거대한 공간을 장식하고 있는 얼음들이 내뿜는 한기가, 승강기가 내려갈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다.

[ -12℃ ]

우우웅-!

[ -20℃ ]

우우웅-!

[ -32℃ ]

한겨울보다 심한 냉기가 쏟아지기 시작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 중 패딩이나 방한용품을 걸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들이 수련한 무공은, 고작 이 정도 추위에 덜덜 떨라고 있는 무공이 아니었으니까.

북해빙궁(北海氷宮).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무공보다 한기를 잘 다루는 이 문파의 일원들로서, 하강하는 승강기 위에 있는 그들은 그저 한 순간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철컥.

이 드넓은 승강기가 멈춘 지금.

가운데에 뚫린 저 구멍 위에 드러난, 저 아름다운 발광체를 보는 순간만을 말이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번쩍-!

새하얀 은빛의 수정(水晶).

생긴 것만 봐서는 평범한 수정과 다를 바 없는 ‘저것’을, 공동 아래에서부터 설치된 거대한 쇠사슬들이 전방위에서 묶어 감싸고 있는 광경은 말이다.

아니.

쇠사슬들이 묶은 건, 정확히 말하면 수정이 아니었다.

하얀 냉기.

사방 10m로 저 수정이 내뿜고 있는 하얀 냉기와, 그것이 만들어 낸 투명한 얼음 막.

쇠사슬들은, 그 주변에 ‘박혀’ 있었다.

공중으로 부유하려는 저 수정을 아래에서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 봐도 아름답군.)”

누군가 꺼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하지.

만년빙정(萬年氷晶).

북해빙궁의 알파이자 오메가로 불리는 이 만년빙정 앞에 서면, 항상 신전에 들어선 것처럼 경건한 마음이 들었으니까.

만년빙정이 있는 곳까지 하강한 승강기 사방에 있는 모니터들 앞에서, 급변하는 지표를 다양한 수치로 기록하는 연구원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 그때.

문득 고개를 돌린 연구원 하나가, 만년빙정 가장 가까이 있는 남자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얼음 투입량이 늘어남에 따라, 알파 파동이 저번에 측정했을 때에 비교해 15% 더 증가했습니다!)”

보리스.

자신처럼 이 만년빙정에 경외감을 느끼는 북해빙궁의 일원임과 동시에.

“(머잖아 완성됩니다, 각하!)”

밖에서는 현(現) 러시아의 대통령이라 불리는 사내를 향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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