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엘리자베스가 절명한 그 시각.
“(··················!?)”
“(··················!?)”
“(··················!?)”
그 순간 엘리자베스의 시점에서 그녀가 느낀 감각을 각자의 심상(心想)에 이미지로 받아들인 이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8명 남은 혈교 제사장들.
“(뭐야, 이거.)”
그들 중, 아무도 보지 못했다.
지금 엘리자베스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그녀의 의식이 꺼지려고 한 찰나의 순간, 제사장 모두에게 새겨진 혈교의 문신을 통해 전달받은 감각만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었으니까.
볼 수 있던 건 오직 하나였다.
눈앞에 명멸하듯 깜빡인 불빛과, 그 뒤에 있던 흐릿한 잔상.
“(이게 다라고?)”
모스크바의 지하수로에서 때를 기다리던 5명의 혈교제사장들이 서로를 쳐다본다.
“(너무 순식간에 의식이 끊겼다. 너무 빨리 죽어 버려서 전달된 게 아무것도 없어.)”
시각뿐만이 아니다.
후각이건, 청각이건, 죽기 직전의 순간이 너무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물론 건진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도화지처럼 피가 새겨진 저 하늘 가운데.
뒤에서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던 의수 낀 남자.
그 주위,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는 수많은 원숭이들 아래 보이는 열차의 흔적.
“(맞지? 시베리아 횡단 철도.)”
“(각도가 애매해서 잘 안보이긴 한데···.)”
“(흠.)”
“(모스크바로 온다는 백창규 녀석이 확실해.)”
“(속단하긴 이르지 않나.)”
지금 중요한 건 하나였다.
방금, 엘리자베스라는 혈교 제사장을 단번에 죽인 놈이 혈마 강림을 위해 필요한 그 제물인지 아닌지.
백창규.
천마의 환영을 등에 업고 다니는 그 녀석이 강해지는 바운더리를 어느 정도 정해두긴 했지만, 만약 지금 엘리자베스를 절명하게끔 만든 녀석이 그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만약 이게 그 제물이라면, 계획을 다시 분석해 봐야 할지도 모르겠군.)”
“(이쪽은 다섯이야. 무슨 걱정을 해?)”
“(아냐. 위험에 빠질 확률은 최소한으로 낮추는 게 맞지.)”
“(엘리자베스를 그렇게 쉽게 잡은 게 진짜 그 백창규라면, 조심하는 게 맞아. 우리가 산속에서 녀석을 잡을 것도 아니고 결국 여기서 잡을 거잖아.)”
“(잠깐. 아직 저게 백창규라는 확신도 없잖아?)”
그렇게 갑론을박을 하는 중.
누군가가 입을 연다.
“(잠깐만.)”
한곳으로 모이는 혈교 제사장들의 시선.
입을 연 자는, 심상에 날아 든 이미지 중 다른 이에 주목한다.
한쪽 팔에 의수를 든 자.
엘리자베스의 숨통을 끊은 잔상이 허공에 그어지는 붓질처럼 빠르게 다가오기 전에, 멀리서 흘깃 보였던 그 얼굴.
“(나 저 새끼 알아.)”
혈교 제사장 중 누군가가 인상을 찌푸린다.
분명히 본 기억이 있다.
그것도 미국에서.
정확히는, 모습을 감춘 채 미국 중앙정보국 소속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파악하던 중 보았던 미국과 러시아 양국 마피아들의 한 거래 현장에서 말이다.
미국의 마피아들은 물론, 웬만한 무림인들조차 무서워하지 않던 러시아의 대형 마피아 소속이었지 아마.
“(미하일, 그래, 볼크 미하일이라고 했었지.)”
“(아.)”
“(나도 그 이름은 들어 봤어.)”
그러자 몇몇 제사장들이 입을 연다.
볼크 미하일.
이쪽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들어 본 이름이다.
“(저놈 아빠가 여기 마피아 대가리 아냐?)”
“(볼크 마피아라는 벌레들?)”
“(맞네. 근데 왜 의수지? 내가 봤던 정보에 의하면 외팔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잠깐만.)”
누군가가 말을 가로막는다.
“(볼크 마피아면, 북해빙궁 하수인 아냐?)”
“(나도 얼핏 들은 적이 있어.)”
“(백창규 그놈이 지금 이 러시아에 온 것도, 분명 녀석이 업고 있는 천마의 환영이 찾고 있을 북해빙궁의 ‘그것’ 때문일 텐데···.)”
“(그럼.)”
답이 나왔다.
북해빙궁의 하수인이나 다름없는 벌레의 새끼랑 같이 다니면서 엘리자베스를 압도적인 실력으로 베어 버린 놈.
여러 정황상, 북해빙궁을 찾기 위해 이 러시아로 온 백창규인 가능성이 크다.
100%는 아니지만 90% 이상의 확률로 맞아떨어지는 이 추측을 마주한 그들은, 곧 이어지는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모여야겠군.)”
여기 있는 다섯뿐만이 아니다.
혈교 제사장들은, 완전한 혈마 강림을 위해서는 지금 밖에서 단독 행동을 하고 있을 나머지 3명의 혈교 제사장들이 이곳에 합류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고 있다.
“(그 제물놈이 강해지는 속도가, 우리 예측보다 훨씬 빨라. 그렇다는 건, 녀석이 업고 있는 천마의 환영과 녀석 사이에서 감응이 있었다는 거야.)”
“(‘그것’ 없이도 말이군.)”
“(게다가, 그 벌레 새끼들이랑 같이 손이라도 잡았다면. 그러니까, 녀석이 나름대로 ‘그것’에 다다르는 힌트를 얻었다면···?)”
“(혼자가 아닌, 병력이 되었다는 건데.)”
모두의 표정이 굳어진다.
결국.
백창규는 이 모스크바까지 오게 될 것이다.
천마와의 감응을 통해 북해빙궁을 찾으러 러시아에 오는 이유?
그건 딱 하나일 테니까.
천마가 관심 있을 ‘그것’이 있는 이 모스크바.
이 모스크바에서도,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북해빙궁의 진짜 병력들이 맴돌고 있기에 혈교 제사장들조차 혼란을 틈타 접근하기 위해 이렇게 대기만 하는 그곳.
“(우리만으로는 안 돼.)”
다섯으로 괜찮다고 생각한 건, 일단 기본적으로는 제물인 백창규의 성장한 수준이 상정범위 안에 들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녀석이 혼자 여태까지처럼 혼자 움직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러니까, 러시아 최대 규모라는 볼크 마피아를 수족처럼 부리며 북해빙궁의 ‘그것’을 얻기 위해 이 모스크바에서 혼란을 피우기로 했다면?
그건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다.
골치 아픈 표정을 짓는 이들 사이에서, 핸드폰을 꺼내든 누군가가 침착하게 중얼거린다.
“(뭘 그렇게 걱정해? 간단한 문제야. 제물이 우리 생각보다 강해지긴 했지만, 아직 우리도 다 모인 게 아니잖아. 나머지 3명을 이리로 불러내서 대기하면 돼.)”
“(하지만 놈은 혼자가 아니야. 하나하난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녀석이 그 인원수를 이용해서 우릴 헷갈리게 만든다면, 우린 북해빙궁에 더해···.)”
“(글쎄.)”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메시지를 보내며 이죽거리는 혈교 제사장.
“(내 정보에 의하면, 지금 녀석이 데리고 있는 건 그 벌레 새끼들의 대가리가 아니야. 그렇다면, 만약 추후 녀석이 그 벌레 새끼들을 모아서 이쪽으로 쳐들어온다고 해도 오히려 그 벌레들에 의해 잡아먹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거지.)”
“(방법이라면.)”
“(그 대가리를 우리가 구워삶는다.)”
“(뭐?)”
“(볼크 페트라코프. 그러니까, 러시아 마피아들의 두목을 우리가 먼저 잡는다고.)”
빠르게 돌아가는 혈교 제사장들의 머리.
“(······그런 거군.)”
“(그래, 그러면 그 백창규라는 제물이 감히 함부로 그쪽 병력을 미리 움직이지 못하게 되겠지.)”
“(녀석이 움직이는 놈보다 한 끗발 위에 있는 대가리를 우리가 잡고 있을 테니 말이지.)”
“(그래.)”
맞다.
무림인이든, 동네 깡패건, 삼합회나 마피아건, 결국은 그 대가리를 잡아야 수월하게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 있는 혈교 제사장들은 모두 알고 있지 않나.
“(기다려. 내가, 너희 모두 눈깔이 뒤집어질 만한 희소식을 가지고 올 테니까.)”
러시아에서의 정보 수집에 능한 혈교 제사장 하나가, 전화기를 들어 올리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오랜 세월 암약하고 있던 혈교의 일은 잘못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만만한 웃음.
그 웃음이, 마치 바이러스처럼 이 음습한 공간에 가득 차 있는 혈교 제사장들의 얼굴에 조금씩 번질 무렵.
━━━━━━━━!
모두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친다.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제사장이 죽을 때마다 몸에 새긴 혈교 특유의 문신 진법으로 남은 모든 제사장들에게 전해지는 심상의 이미지.
“(······뭐, 뭐야!)”
그러니까, 밖에 남아 있는 3명의 혈교 제사장 중, 또 한 명의 혈교 제사장이 방금 사망했다는 얘기다.
* * *
후두둑.
꽁꽁 언 전신이 부서진 채 철도 좌우로 부서져 내리는 이미지가 심상(心想)에 날아 온 그때.
서로를 바라본 두 남녀가 한숨 쉰다.
방금 들어온 이미지에 의하면, 또 한 명의 제사장이 북해빙궁 녀석에 의해 죽어 버렸다.
“(······멍청한 새끼.)”
도시 변두리, 한 폐건물의 옥상.
그 난간 위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둘이나 죽었는데도 조심하지 않고 그딴 식으로 죽어 버리다니.)”
“(바보같이 겁먹은 거지.)”
난간에 걸터앉아 있던 여자가 그의 말을 받는다.
“(혼자선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니까 이제 와 다시 ‘그쪽’으로 돌아가려다가 말이야.)”
“(최소한의 판단도 안 되나?)”
“(공포로 머리가 새하얘진 탓이지. 적어도 이 러시아에서는 항상 북해빙궁을 경계해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마음만 급해져서 그런 경공을 펼치다니, 참 한심해.)”
서로를 바라본 남녀가 피식 웃는다.
남은 건 둘뿐이다.
모스크바의 ‘그쪽’ 근처에 남아 있는 다섯이 아닌, 그 제물을 혼자 차지하겠다고 단독행동을 취한 다섯 중 말이다.
이젠, 모두가 안다.
“(백창규···.)”
그 탐스러운 제물은, 아무리 혈교의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혼자서는 잡아먹으려다가 배가 터질 정도로 존재감이 커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그야말로 최고 난이도의 게임이다.
녀석 자체도 위험한데, 놈을 잡으려고 이 대도시에서 움직임을 키웠다간 북해빙궁 쪽에 의해 목숨이 위험해지지 않은가.
하지만.
“(······짜릿해.)”
그 위험성을 상기할수록 서로를 마주한 남녀의 얼굴에는 진한 웃음만이 배일 뿐이다.
“(그런 걸, 다섯이서 나눠 먹겠다니 참 한심하지.)”
“(그러니까 말이야.)”
둘은 알고 있다.
확실히, 혼자서는 위험하다.
하지만 모스크바까지 되돌아가서 그 다섯의 얼간이들과 나눠 먹는 것은 더더욱 위험하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의 생리를 아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에서는 그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 우리 둘이면 돼.)”
서로의 볼을 쓰다듬는 남녀.
여태까지 다른 제사장들 몰래 밀회를 나눠오던 이들은, 적어도 상대방만큼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제사장들은 이 둘이 지금 같이 있는 줄조차 모르고 있겠지만, 이미 그들 사이에 키워온 애정은 너무나 뿌리가 깊었으니까.
물론, 여태 보내진 이미지에 의하면 그 제물은 제사장 둘이 덤벼도 이길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것 같았지만.
“(죽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더 재밌지.)”
“(흐.)”
전신에 소름이 돋는 만큼 짜릿해진다.
동시에 궁금해진다.
그 둘이 펼치는 합공(合攻)은, 상대의 입장에서 똑같은 적만 하나 더 늘리는 정도의 합공이 아닌, 초식은 물론 서로의 숨소리와 맥박 및 사소한 습관까지 익숙한 연인의 합공.
가능성이 영 없지는 않았다.
“(도박이라면 도박이지.)”
“(하지만, 성공하면 우린 세계의 모든 고수들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어.)”
“(세상 모든 게 우리 발밑에 엎드리겠군.)”
성공 이후의 세상을 상상하며 씩 웃음 짓는 두 남녀가, 잠시 서로의 눈을 마주친 뒤 입을 맞추려고 하려던 순간.
“(······왔다.)”
느껴진다.
저 멀리, 심상으로 들어온 이미지로 상상한 것과 비슷한 종류의 기운이 넘실대는 것이.
“(지금 못한 건.)”
“(다녀와서 하자고.)”
서로를 보며 탐욕스러운 웃음을 지은 두 남녀가, 그렇게 폐건물 난간 아래로 몸을 날렸다.
파파팟-!
허공에, 눈 덮인 들판 너머를 향해 거대한 핏줄기가 죽죽 그어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