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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림 견문록-133화 (133/150)

133화.

러시아의 한 항구 도시.

하얀 숨이 담배 연기처럼 뿜어지고, 길을 오가는 사람 중 두꺼운 외투의 옷깃을 여미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보기 힘들 정도로 추위가 일상인 이곳에서.

도시 외곽, 한 냉동창고가 있다.

수풀 너머 설산이 가득하고, 운 좋은 날이면 산 너머로 펼쳐진 바다 어딘가에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냉동창고 말이다.

꽤 넓은 부지였다.

누군가의 사유지임을 알려 주는 담벼락과 경고문구를 박은 팻말들이 빙 둘러 있는.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상하기 쉬운 물건들을 대량으로 유통하는 대형 물류회사라던가, 어선이 당일 잡아 온 고기들을 보관해놓는 선박회사의 그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끼이익.

깜깜한 냉동창고 안에 오랜 시간 묶여 있다가, 대형 철문이 열리며 쏟아지는 빛과 함께 걸어들어 오는 이들을 마주하게 된 한 남자.

저벅, 저벅, 저벅.

피투성이의 그 남자는, 당연히 이 냉동창고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불 켜.)”

불이 켜짐과 함께 드러나는 익숙한 얼굴들.

제일 선두에서 다가오는 깔끔한 인상의 남자 뒤로, 험상궂은 얼굴을 한 남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제각기 다른 복장이었다.

정장을 입은 이들, 뱃사람처럼 올이 나간 거친 스웨터를 입고 있는 이들, 전형적인 러시아 불량배처럼 위아래 삼선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들. 그리고 권총 쥔 이들, 기관단총을 든 이들, 무림인들처럼 기다린 칼을 든 이들.

제각기 입은 옷도, 쥐고 있는 무기도 다른 그들이었지만, 같은 게 하나 있었다.

모두,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진한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는 것.

남자는 알고 있다.

이 냉동창고에 들어온 이들 중 사람을 죽여 보지 않은 이들은 단 한 명도 없고, 그들이 쥔 무력을 아무 제약 없이 휘두를 수 있는 이런 잔악함이, 이들로 하여금 이 냉동창고를 포함한 ‘어둠의 부산물’들의 주인이 되게 만든 힘이라는 사실을.

저벅, 저벅, 저벅.

구둣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냉동창고 저편에서 부하들을 대동한 채 다가오는 턱수염의 남자. 그러니까, 이 일대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러시아 마피아가, 묶여 있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랬어.)”

“(사, 살려··· 크아악!)”

턱수염 난 사내의 뒤쪽에서 총소리가 난 뒤, 총알이 관통해 나간 남자의 어깨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흐른다.

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잠시, 총 맞은 남자가 턱수염을 향해 목숨을 구걸하기 시작한다.

“(미, 미하일 형제! 제발! 제발 살려줘! 우, 우리 같이 일하는 형제잖아! 같은 술잔을 나눈 형제잖아!)”

남자는 ‘같은 조직원’이라는 점을 어필한다.

러시아 마피아.

미국의 그런 매정한 놈들과는 달리, 보드카로 맺어진 이 북쪽 지방의 마피아들은 그래도 나름 끈끈한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나, 나도 마피아야! 우린 다 형제 같은 사이라고! 그, 그리고 기억 안 나? 작년! 그래, 작년에 우리 여행도 같이 갔잖아! 가는 길에 망할 놈의 그 폭주족 새끼들도 같이 쏴 죽이고! 추억을 나눈 형제를 이렇게 죽일 거야, 정말? 알잖아! 이건 단순한 실수야! 정말 간단한 실수일 뿐이라고, 내가 되돌릴 수 있······ 우웁!)”

턱수염의 고갯짓을 받은 누군가가 다가와, 남자의 입에 천을 욱여넣는다.

“(웁! 우웁! 웁웁웁!)”

턱수염, 그러니까 미하일이라 불린 이가 손을 올리자 어디선가 기계 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신음하는 남자의 양팔을 묶고 있던 줄이, 천장에 설치된 갈고리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우우우웅!

발버둥 치는 남자의 발끝이 미하일의 가슴께까지 올라갔을 때,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고 남자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가볍게 허리춤에 있던 칼집에서 칼을 빼, 양팔째 묶인 남자가 있는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두르는 미하일.

슈르륵.

더없이 간단한 몇 번의 칼질에 의해, 남자가 입고 있던 모든 옷이 잘려 나풀거린다.

졸지에 나신이 된 채 양팔이 위로 묶인 꼴이 되었지만, 여기 있는 이들 중 그를 비웃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 지금이 미하일의 교육 시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봐.)”

“(우웁, 웁웁!)”

칼을 든 채 묶여 있는 남자의 나신 곳곳에 새겨진 문신들을 차례로 가리키며 입을 여는 미하일.

“(우리 같은 놈들에게 문신이란 건, 살아가는 이유나 마찬가지야.)”

오른쪽 어깨에 새겨진 칼 문신.

“(이건, 무공을 배운 무림인이라는 표시지. 칼잡이에 아무런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는 건, 제대로 된 사부에게 도제 형식으로 가르침을 받지는 못했다는 거야.)”

가슴 가운데에서 시작해,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가는 권총 문신.

“(이건 이 녀석 같은 직계 행동대장이 새기는 문신이야. 고개 숙이는 자는 죽는다는 뜻이지. 이건 자존심을 지키라는 게 아니라, 경찰이나 경쟁 조직에게 잡혀 갔을 때 헛짓거리를 해서 우리 조직을 위험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뜻이야.)”

옆구리에 새겨진 조그마한 해골 문신들.

“(이건,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는 적들을 용서하지 말라는 행동대장의 문신이고.)”

배를 가로로 가로지르는 얼음 문신.

“(그리고 이건···.)”

이를 가리켰던 미하일이, 잠시 칼을 내리더니 뒤돌아서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에겐 이 문신이 제일 중요해. 이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아는 놈 있나?)”

냉동창고 안에 한 차례 침묵이 지나간 뒤, 미하일이 천천히 입을 연다.

“(이건, 우리의 시작이 얼음 사업이었다는 얘기다.)”

계속 말을 이어나가는 미하일.

“(그래, 고작 얼음 사업이었다. 체첸이나 아제르바이젠 같은 잔챙이들은 물론, 포돌스카야부터 솔렌쳅스카야 같은 쓰레기 새끼들까지. 러시아에 득실거리던 수많은 마피아 새끼들을 다 때려잡고 우리가 1등이 된 그 시작에는, 얼음 사업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 말이 단순한 상징인 줄 알았던 몇몇이 서로의 눈을 쳐다보았지만.

“(사실이다.)”

이건 간부들 사이에선 유명한 얘기였다.

솔렌쳅스카야 브라트바(마피아).

한때 전 조직원 수가 9,000명을 넘어선, 단일 조직 기준으로 러시아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비교할 조직을 찾기 힘들었던 그놈들 대신 이쪽 볼크 브라트바(마피아)가 러시아 최대 조직이 되었던 기원엔, 초대 두목의 얼음 사업이 있었다.

“(우리 볼크 브라트바가 러시아 최대 조직이 된 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얼음을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완벽한 형태로 지정된 장소에 가져다 놓을 수 있는 노하우 때문이었지.)”

“(웁! 우우우웁!)”

얘기가 거기까지 흐르자, 묶여 있던 남자가 사색이 된 채로 신음을 흘린다.

남자가 말한 실수.

그 실수라는 건, 냉동창고에서 배달 예정이었던 육각 기둥 형태의 얼음이 보관되어 있던 곳에다가 담뱃재를 턴 것이었으니까.

“(얼음이란 건 어떤 방식으로 얼었는지에 따라 그 안의 기포가 맺히는 방식이 달라지고,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따라 그 표면의 형태가 달라진다.)”

“(웁! 우우웁!)”

“(우리가 일어난 기반이 되었던 이 얼음에 담뱃재를 턴다는 건, 우리의 기반을 우습게 본다는 얘기겠지.)”

푸욱.

얼음 문신이 새겨진 남자의 배에 칼을 찔러 넣는 미하일.

“(우, 우, 우우우우우우우우웁!)”

남자가 눈을 번쩍 뜬 채 처절한 비명을 질렀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얼음을 크렘린 궁에도 납품한다. 자칫 잘못하면 애써 러시아 정부와 쌓았던 좋은 관계도 망가질 수 있었겠지. 이건, 조직을 위험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행동 대장의 원칙을 우습게 본다는 이야기.)”

푸욱.

가슴에서 목 아래까지 새겨진 권총 문신을 따라 칼을 긋는 미하일.

“(우우우우우우우웁!!)”

“(아, 조직을 위험하게 만든 이를 용서하지 말라는 이 원칙은 내가 대신 지켜주면 되겠군.)”

그가 곧장, 남자의 옆구리에 새겨진 해골 문신이 있는 쪽에 칼을 쑤셔넣는다.

“(우············우욱!)”

남자의 눈에 핏발이 서며 입을 막고 있음에도 끔찍한 비명이 새어나온 직후.

“(그리고, 너 같은 새끼는 제대로 된 무림인일 리 없으니 여기 새긴 문신은 가짜라는··· 뭐야.)”

남자의 어깨를 베려던 미하일이, 문득 칼을 내리고 남자의 까뒤집힌 눈을 쳐다본다.

“(벌써 죽은 거야? 한심하긴.)”

아닌 게 아니라 벌써 전신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남자. 그에게서 고개 돌린 미하일이, 칼에 묻은 피를 탁 털어 내며 모여 있는 부하들 쪽으로 한마디를 던진다.

“(치워.)”

그러자 우르르 달려가 시체가 된 남자를 치우는 부하들. 바짝 긴장해서 행동을 조심하는 그들을 본 미하일은, 생각했다.

이쯤이면 교육이 되었겠지.

안 그래도 요새 ‘윗선’에서 최근에 각 지부에서 납품되는 얼음의 질에 관련해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번 기회에 더 큰 실적을 내서, 집안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모스크바 쪽으로 진출하고 말겠다는 꿈을 지닌 미하일.

그가, 자신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한 계획을 다시 한번 되새길 때쯤.

탁탁탁탁!

냉동창고 안으로 달려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미, 미하일 형제!)”

옆의 다른 창고 경비를 맡긴 부하.

철문 안으로 들어온 그가, 이쪽으로 뛰어오면서도 황급히 등 돌려 창고 밖의 누군가를 향해 기관단총을 쏴제끼려던 순간.

“(미친놈이 나타났······ 커허억!)”

그대로 목이 날아간 부하를 보고, 빠르게 전투태세에 임한 미하일.

그는 곧 볼 수 있었다.

“(어떤 새끼야.)”

“뭐야.”

우득우득 얼음을 씹으며 나타난, 정체불명의 무림인을.

“와, 여기 얼음 왜 이렇게 맛있어?”

* * *

철컥, 철커덕.

기관단총, 권총, 개틀링건은 물론 수류탄과 섬광탄까지.

- 이 새끼들 진짠가 보네.

냉동창고 안쪽에서 온갖 무기로 무장한 채 이쪽을 바라보는 러시아 마피아들을 보며, 백창규가 웃음을 지었다.

- 얼음 때문에 사람을 다 죽이고, 걔가 한 말이 대충 맞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홋카이도에서 죽기 직전의 이고르가 내뱉은 말을 해석한 결과, 북해빙궁은 러시아에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것도 세상에 있는 모든 형태의 얼음을 안전하게 공급받으면서.

“뭐, 선배님이 해석한 방법이 진짜라는 가정하겠지만요.”

- 얌마, 난 틀린 적이 없어! ‘그걸’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얼음 종류는 원래 북해빙궁주 정도는 되어야 알고 있는···.

“알았어요, 알겠고.”

천마의 말을 자른 백창규.

어쨌든 중요한 건 하나였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해야 할 행동은 하나였으니까.

- 얘들이, 뭐? 볼크 마피아?

“네. 현 시점에서 러시아 1등 먹는 마피아 애들이래··· 오우!”

순간 불을 뿜은 총격들 쪽에서 살기(殺氣)를 느낀 순간.

타타타타타타!

그대로 경공을 펼쳐 벽을 타고 활보하는 백창규.

- 하여튼 얘들만 조지면 되겠네.

“그쵸.”

빠르게 벽을 타고 상대들을 관찰하던 그가, 저 한가운데서 검격을 펼칠 자세를 취하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정확히는, 쟤 조지면 될 것 같네요.”

여기 있는 마피아들 가운데 가장 강한 기도를 풍기고 있는 마피아.

볼크 미하일.

무공을 익힌 마피아인 동시에, 지금 러시아에서 가장 세력이 큰 마피아 세력 보스의 아들 말이다.

“저 새끼 타고 올라가면, 북해빙궁이 어딨는지 나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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