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대 무림 견문록-130화 (130/150)

130화.

삿포로 외곽.

홋카이도 경찰본부가 긴급상황을 대비해 만들어 놓은 경찰 임시 본부의 복도.

저벅, 저벅, 저벅.

급하게 회의실로 향해 걷는 홋카이도의 경찰본부장이, 고개 돌려 입을 연다.

“(명부 쪽 지원 인원은 아직인가?)”

“(네.)”

“(이런 망할! 지금 여기는 국가 재난 수준인데,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출발은 했대?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건지 확실히 물어봐!)”

“(일단, 지휘 체계상 출동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니 양해를 해 달라고···.)”

“(이런 개 같은 새끼들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경찰본부장이 벽을 걷어찬다.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천황이랑 총리 승인만 있으면 어디에 있건 10분 안에 튀어나오는 게 명부 애들인데, 무슨 지휘 체계 같은 얘기 따위를 하고 있어!)”

“(그게···.)”

“(핑계를 대더라도 말은 되게 대야 할 거 아냐! 우리가 무슨 병신들인 줄 알아!)”

씩씩거리는 경찰본부장.

사실, 그 역시 알고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에 소속된 최강의 무림인들인 ‘명부’ 소속의 무인들이 지원을 나오지 못하는 건, 당연히 이번 사태가 국가 차원에서 도울 수 없는 사연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국가 차원에서 무림인을 보낼 수 없는 사연이란 건 보통 하나로 귀결된다.

“(세계무림연맹, 그 새끼들이 관련되어 있다는 거 아냐!)”

경찰본부장이 소리를 지르며 연거푸 벽을 걷어찬다.

콰직! 콰직! 콰직!

머리가 하얗게 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길질에 벽에 금이 가는 건 그 역시 소싯적에는 무공을 배우는데 열정을 투자했었기 때문.

하지만, 이젠 다 소용없다.

한때 자신의 자랑이자 목표이기도 했던 ‘무림인’이라는 정체성에, 그는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젠장! 아무리 그쪽 애새끼들이 외교 문제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그렇지! 지금 자국민이 죽어 가는 상황에서도 그 새끼들 눈치를 봐? 죽어 가는 사람도 제대로 못 구하는 새끼들이 고수가 되어서 뭐 하냐고! 죽어라 수련해서 무림인이 되면 뭐 하냐고!)”

“(본부장님. 하지만, 듣기로는 세계무림연맹 측에서도 사태 진화를 위해 사람을 보내서···.)”

“(그렇다고 우린 손가락만 빨라는 거야, 그럼!)”

그게 무슨 무림인인가.

그가 생각하는 무(武)는, 강자에 맞서고 약자를 돕기 위한 수단. 심지어 그렇게 수련한 무공을 통해 국가의 최고 목표까지 올라간 놈들이, 같은 국민들이 죽어갈 때 멍하니 있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자위대 새끼들은.)”

“(온다고는 했는데···.)”

“(됐어, 우리끼리라도 간다. 무공 쓰는 타격팀 중 여기 도착한 애들 인원 보고해.)”

“(본부장님! 그건 자살행위입니다!)”

“(닥쳐!)”

“(현장 보고 듣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저곳은, 어설픈 대원들 100명보다 절대 고수 몇 명이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오히려 잘못 보냈다간 저희 대원들의 목숨만 버리는 거라고요!)”

“(그렇다고!)”

노한 표정으로 소릴 지르는 경찰본부장.

회의실 문이 열리고,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경찰 간부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여기서 손가락만 빨면서 구경할 거야?! 삿포로가 부서지면 다음은 어디가 망가질지 몰라! 아무나 보내자는 게 아냐! 우리도 무공 쓰는 놈들 위주로···.)”

“(본부장님.)”

“(너희들 생각도 그래?! 계속 안 된다고만 할 거면 뭐 하러···.)”

“(그게 아니라, 이쪽을 보십쇼!)”

회의실 안에서 나온 경찰 간부 하나가, 문 열린 회의실 안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한다.

그쪽으로 시선 돌린 경찰본부장.

안력(眼力)을 돋우자, 드넓은 회의실 바깥쪽으로 난 넓은 창 너머로 무언가 익숙한 것들이 보인다.

타타타타타-!

헬기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 자위대에 소속되어 특수작전을 펼치는 무공팀들의 표식이 새겨진 헬기들이 말이다.

“(뭐야! 얘들 벌써 병력 보낸 거야?!)”

경찰본부장의 입이 벌어진다.

경찰 쪽이 그렇듯 군대 쪽에도 무공을 익힌 이들이 있다. 홋카이도에 주둔 중인 모든 군인들과 경찰들을 모아 삿포로 도심을 향해 작전을 짜서 들어가면 사태 진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지원 요청을 했었는데, 그 답이 온 것이다.

“(설마설마했는데, 바로 인원 투입했잖아?)”

심지어 헬기 수도 10대가 넘어간다.

“(봤지? 쟤들도 결심했는데, 우리라고···.)”

“(본부장님.)”

“(왜 자꾸···!)”

“(그게 아니라, 저쪽을 보십쇼.)”

다른 간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려던 경찰본부장의 눈에, 뭔가 이상한 것이 보인다.

“(뭐야, 쟤들? 왜 저래? 안 내리고 왜 다들 저러고 있는 거야?)”

헬기들이 모두 제자리에 떠 있다.

단 한 대도 빼놓지 않고, 동일한 방향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타타타타타타타-!

그 헬기들이 바라보고 있는 쪽을 향해, 그러니까 직전에 다른 간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쪽을 향해 고개 돌린 본부장은 곧이어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검붉기만 했던 삿포로의 하늘.

재앙처럼 보이던 그 하늘이,

“(···뭔가 해결된 것 같습니다.)”

동이 트는 새벽과 함께 맑게 개고 있었다.

* * *

일본 총리실.

세계무림연맹 쪽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총리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서를 바라보았다.

“(뭐?! 그게 말이 돼?)”

그의 말을 받는 비서 역시 황당함을 감출 수는 없었다.

“(저도 믿기지는 않습니다만, 네. 분명 이후 사태 수습과 분석에 대한 공동 연구를 요구했습니다.)”

“(줘 봐.)”

총리가 비서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챘다.

팔락.

세계무림연맹 쪽에서 팩스로 보낸 그 문서를 다시 읽은 총리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거 완전 미친 새끼들 아냐.)”

이유는 간단했으니.

“(자기네들이 혼자 다 해결하겠다고, 끝난 다음에도 알아서 지질분석부터 범죄자 인도까지 다 해 먹겠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

“(걔들만 믿고 명부 인원도 안 보냈는데, 지금 보니까 그냥 병신들이잖아, 그 새끼들!)”

홋카이도 삿포로에서 일어났던 정체불명의 재해.

그곳에 파견된 세계무림연맹 소속의 비밀 요원들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다.

물론 재해는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 괴상한 재앙이 끝나기 전에 자기네들의 요원들이 죽었다는 점. 그러니까, 그 해결 과정을 하나부터 끝까지 목격해서 세계무림연맹주에게 보고할 요원들이 사라졌다는 것만이 녀석들에게는 중요한 점이었다는 얘기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자기네들이 아쉬우니까 사태 수습 운운하면서 머리를 굴려?)”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는 총리.

“(됐고, 꺼지라고 해.)”

“(총리님. 그래도 괜히 세계무림연맹을 적으로 돌릴 필요는···.)”

“(명분도 없는 새끼들 말 계속 들어 줘봤자, 호구로 보이기밖에 더해!)”

“(그래도···.)”

“(그리고, 지금 보니까 그 새끼들 뭣도 아닌 거 아냐? 그 비밀요원이란 놈들, 소문에는 심판자니 뭐니 하더만 우리 명부 애들보다 더 약한 거 아니냐고.)”

“(그건 아닐 겁니다. 왜냐면···.)”

“(됐고.)”

그때 또 비서실의 전화가 울린다.

총리의 손짓에 전화를 받으러 간 비서.

홋카이도 쪽에서 온 연락이 분명한 이때.

총리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망할 세계무림연맹 새끼들.

사실, 녀석들이 뭘 원하고 있는지는 뻔했다.

‘(사태 수습 도와준다는 것도, 결국은 그 둘이랑 얘기하고 싶다는 거겠지.)’

자기네 비밀요원들조차 죽어 버린 그 재앙을 끝내 버린 이들. 그러니까, 국가적 재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기묘한 무림지사를 설명할 수 있는 두 명의 핵심인물들.

그들이 줄 수 있는 정보가 필요하다는 얘긴데.

‘(속 편한 소리들 하고 있네.)’

총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비단 세계무림연맹 쪽에 정이 떨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건 자기들도 얻기 힘든 정보였으니까.

다시 말해서.

“(총리님, 구향회 쪽 연락입니다.)”

“(어때, 찾았대?)”

“(아뇨.)”

그러니까,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킨 스다라는 녀석이 난리를 치던 삿포로의 중심부. 그 중심부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싸웠던 이들 중, 유일하게 살아 있는 2명의 남자는···.

“(자기네들도, 지금 수색 중이라고 합니다.)”

···이쪽에서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 * *

홋카이도의 최북단.

수북하게 내리는 눈송이들을 비추는 눈부신 햇살 아래.

파파파팟-!

군데군데 붉은 피가 묻어 있는 설산 위를 바람처럼 내달리는 두 사람이 있었다.

“네 말이 사실이었다니.”

“한국말 잘하네.”

“말했잖아. 내가 대장로직도 병행하면서 아시아 몇 개국을 내 집처럼··· 지금 이딴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백창규와 하루.

“아무튼 약속은 지키지.”

“뭔 약속.”

“내기했던 거 기억 안 나? 네가 제대로 된 복음을 알려 주면 내가 널···.”

“아.”

“이제부터 네가, 참하늘주님성회의 대장로···.”

“아니, 뭐, 그건 아무래도 좋고!”

그러니까, 스다와의 싸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 두 사람 말이다.

슈우우우우욱-!

시야의 좌우로 갈라지는 바람을 맞으며, 창규는 경공의 속도 역시 부쩍 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봉인진이 역으로 풀린 게, 적어도 내공에 있어서는 효과를 줬어.’

스다가 역으로 풀어 낸 만형진법.

홋카이도 전체의 자연지기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한 제물들을 괘로 삼아, 창규에게 봉인되어 있던 천마의 힘을 역으로 꺼낸 그 방법은, 오히려 싸움 막판에 검은 장막에 봉인된 창규와 하루에게 힘을 주었다는 얘기다.

‘그나저나, 선배님의 힘은 정말···.’

하지만 늘어난 힘을 감상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반짝-!

햇빛이 반짝이는 바다.

홋카이도 최북단 비석 너머로 보이는, 그러니까 이대로 쭉 건너면 러시아 땅이 나오는 바다를 보며, 그가 침을 삼켰다.

- 러시아, 러시아로 가야 돼.

“알았어요, 알았어. 지금 가잖아요.”

- 빨리···.

“아오, 선배님! 좀!”

우뚝 멈춰 마지막으로 몸을 점검하는 창규.

꿀꺽.

늘어난 힘을 토대로 등평도수의 묘리를 더 오래, 길게 펼치려는 생각을 하는 이때.

흘깃 고개 돌린 창규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천마를 보았다.

‘저럴 만도 하지.’

그리고 떠올렸다.

아까 전.

스다가 죽자마자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삿포로의 하늘 아래, 죽기 직전이었던 녀석과 대면했던 순간을 말이다.

‘이고르란 그놈···.’

한쪽 다리와 한쪽 팔이 터진 채 검은 장막에 휘말려 미라처럼 기운이 빠졌음에도, 곧바로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그 ‘이고르’라는 녀석. 바람 앞의 촛불처럼, 누가 봐도 생명이 위태로워 보이던 놈의 표정이, 창규를 봤을 때 바뀌었었다.

따로 물어 볼 것도 없었다.

죽기 직전, 천마의 기운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창규가 끼고 있던 천마의 반지를 느낀 것인지는 몰라도 창규가 가까이 가자마자 씁쓸한 웃음을 짓던 녀석.

‘진짜일까.’

놈이 유언처럼 뱉었던 마지막 말을 들은 천마는, 스다를 폭사시켰던 때에도 보였던 그 짓궂은 표정을 확 굳힌 뒤,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 ·········북해빙궁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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