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식은땀을 흘리는 구향회의 원로들.
순식간에 죽어 버린 동료를 애도할 시간 따윈 없었다.
지상에 떨어진 채 스다를 향한 합공을 준비하려던 그들의 쩍 벌어진 입에선, 어느새 침묵만이 머물고 있을 뿐.
“(·········.)”
지금 삿포로 밤하늘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은, 오랜 세월을 홋카이도에서 살아온 그들로서도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으니까.
칠흑 같은 밤하늘.
그 곳곳에 덧칠된 걸쭉한 핏줄기.
매캐한 연기.
미처 쓰러지지 않았던 고층 건물들이 간헐적으로 무너져내리는 소음들.
그 위로, 아니, 이 땅 전역에 떨어지고 있는 백골 부스러기들까지.
물론.
내공을 이용해 안력(眼力)을 돋울 수 없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그저 까만 암흑(暗黑)으로 보일 뿐이었지만.
“(분하지만, 싸움의 수준이 달라.)”
“(저건···.)”
“(우리 손을 떠났다.)”
누군가가 말한 것처럼, 지금 펼쳐지고 있는 저 광경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싸움의 현장.
거대한 손?
그딴 건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그나마 자연과 도시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검붉은 하늘의 모든 것들이, 직육면체의 검붉은 큐브들로 재편되어 버린 지금 놀랄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때.
“(·········저 새끼는 뭐야.)”
굉장한 기도가 등장했다.
구향회 원로.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연합 문파의 고수인 그들은, 둘셋만 뭉치면 혈교 제사장도 무섭지 않은 이들이었지만.
━━━━━꽝!
천둥 번개가 내리치듯, 이 기묘한 풍경을 주먹 한 방으로 찢어 버린 초고수의 등장에는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만 것이다.
그뿐인가.
삿포로 하늘을 채우던 그 기괴한 그림이 찢기고 하얀 달빛이 보일 무렵, 빠르게 주변 공간을 일그러뜨려 다시 하늘의 기운을 흡수하는 스다와 그런 녀석을 향해 일권을 날리는 초고수.
그리고.
순간, 지진이 일어났나 싶을 정도로 발밑의 땅이 부르르 떨리더니 허공에서 터져 버린 파열음.
━━━퍼퍼펑!
━━━퍼퍼펑!
소닉붐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일순 검붉은 하늘 곳곳이 부풀어 오르더니, 어느새 저편에는 빠르게 날아가는 거대한 도끼 두 개가 있었다.
“(저건 또 뭐야.)”
“(······심판자다.)”
격돌과 함께 귀가 찢길 정도의 굉음이 이 지면까지 울려 퍼졌을 때, 그 도끼가 되돌아가는 곳에 있는 이들을 본 구향회 원로 몇몇이 중얼거렸다.
심판자.
오무답문 중 유일하게 세계무림연맹이 직접 움직이는 암행조직의 정예 요원들.
도쿄 출장 당시, 수상 관저에서 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바 있는 원로 몇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을 때.
“(그럼 저건···.)”
“(삭월의 정식 멤버라는 얘기지.)”
꿀꺽.
나머지 원로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삼킨다.
당연히 알고 있다.
삭월이 뜬 곳에 세계무림연맹의 하늘이 움직인다, 이건 이 바닥 고수들 사이에서는 이미 낡고 낡은 소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몇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잠깐. 스다도 삭월의 일원이라며.)”
“(전혀 달라. 삭월의 정식 멤버는 전 세계에서도 손으로 꼽는다고.)”
“(그럼.)”
“(끽해 봐야 하수인이나 심부름꾼 아니었겠어?)”
“(스다가 하수인이라니. 말도 안···.)”
“(저걸 보고도 모르겠어? 소문이 진실이라면, 삭월, 저 빌어먹을 곳의 정식 멤버는 하나하나가 국가 재난 사태를 불러일으킬 정도의 절대 고수들이라고.)”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군. 하수인이건 뭐건, 삭월 그 염병할 새끼들이 왜 남의 땅에 와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건데.)”
“(그건, 스다 저 새끼가 알겠지.)”
원로들 모두가 고개를 든다.
달무리처럼 주변에 몽글한 기운들이 모여들고 있는 스다가 보인다.
“(녀석이 오랫동안 우리 구향회 소속으로 있었던 게, 어쩌면···.)”
하지만 말은 끊긴다.
다가오는 공격을 피해 뒤로 슬쩍 빠진 스다와, 방금까지 놈이 있던 자리에서 터진 대격돌.
그와 동시에 검붉은 하늘 곳곳에서 무언가가 번쩍인다.
불똥처럼 솟구쳐 흩어지는 무언가.
강기(强氣)를 씌운 두 도끼와 엄청난 속도로 부딪친 공격이 피운 마찰열이 사방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다.
반짝-!
그리고, 그 반짝이는 격돌의 장은 곧 하늘에 지그재그 거대한 섬광의 선을 그리기 시작한다.
삭월의 정식 멤버와 세계무림연맹 비밀집행부의 요원들이 경공을 펼치며 삿포로 여기저기로 빠르게 이동하며 부딪치는 바람에 마찰열의 진원지가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번쩍-!
번쩍-!
번쩍-!
번개가 치는 것처럼 사방에 피는 섬광.
“(피해!)”
순간, 땅에 섬광처럼 꽂힌 강기.
방금까지 구향회 원로들이 있던 땅이, 매캐한 냄새와 함께 웅덩이처럼 패여 버렸다.
이를 짓씹으며 각자의 병장기를 쥔 손에 힘을 주는 원로들이었지만, 이미 격돌지는 하늘 저편으로 옮겨간 지 오래.
동시에.
저 어딘가에서 비명이 들린다.
삿포로 곳곳에서 스다가 부리는 오타쿠들의 백골을 상대하던 구향회의 다른 무림인들. 갑자기 피어오른 지옥에 영문 모르고 헤매고 있던 그들이 단말마를 내지른다.
방금처럼 초고수들의 격돌지가 빠르게 이곳저곳으로 옮겨짐과 함께, 그곳에 ‘자리하기만 하던’ 이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 미친···.)”
병장기를 쥔 구향회 원로들의 손이 떨린다.
모두 직감한 것이다.
이건, 감히 자신들 정도의 수준으로는 끼어들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 구향회의 원로들.
그들 중 음공(音功)에 강한 누군가가, 사방을 향해 사자후를 터뜨린다.
“(현 시간부로! 구향회 전원! 각자 안전구역을 향해 철수한다!)”
그럴 수밖에.
구향회 원로들이 각자의 수하들을 이끌고 여기까지 모인 목적은, 어디까지나 배신자인 스다를 죽이기 위해서.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과정에서 구향회가 전멸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저기서 시선이 닿는 곳마다 섬광을 터뜨리며 싸우고 있는 이들은, 구향회의 수하들에겐 상대할 수 있긴커녕 자취조차 쉽사리 쫓지 못할 고수 중의 고수들.
마음만 먹으면 스다조차 죽여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저런 이들의 싸움에, 수하들이 말리게 해선 안 된다.
“(돌아가라! 어서! 여기서 개죽음당하지 말고!)”
사자후를 터뜨린 지 무섭게 곳곳에서 번쩍이는 섬광들.
콰콰콰콰-!
번쩍-!
퍼퍼펑-!
그 섬광이 비추는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던 구향회의 수하들이 하나둘씩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원로 중 몇이 중얼거린다.
“(하, 가란다고 바로 가 버리다니.)”
“(의리 없는 자식들.)”
“(하여튼 밑에 있는 것들 키워 줄 필요 하나도 없다고.)”
하지만 말과 달리 그들의 입엔 웃음이 고인다.
피식.
애초에 여기서 구향회가 전멸하는 것을 원치 않던 그들 아닌가.
“(구향회에서 우리의 명령은 아직까진 절대적이야.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지.)”
“(알아.)”
“(그럼, 우리도 우리 일 하자고.)”
그리고 살기(殺氣)를 피워 올린 원로들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각자가 쥔 병장기에 내력을 흘린다.
번쩍-!
하늘 곳곳에선 여전히 절대 고수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지금 이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스다.)”
저 멀리 사라지는 스다 마사오의 모습이 보인다.
역시.
스다, 그 배신자도 저 고래들 사이에 끼인 채 등이 터지고 싶진 않을 것 아닌가.
“(지금이 놈을 잡아 쳐죽일 기회야.)”
저렇게 도망치는 듯한 스다의 뒤통수를 쪼개 버리는 것.
그것이 방금 구향회 원로들이 세운 목표.
물론 아직도 이곳에서 싸우고 있는 저 괴물들의 공격들이 위협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녀석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아니니 해 볼 만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괴물들이 나타난 이후로, 스다 녀석은 자신들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있지 않은가.
“(천하의 구향회가 이런 취급을 받다니, 자존심 상하는군.)”
“(이제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아.)”
“(그래, 어떤 쪽으로 가건 우린 우리를 더럽힌 그 배신자 새끼만 쳐죽이면 되는 거라고.)”
배신자 처단.
그 한 가지 목표를 되새김질하며 침을 꿀꺽 삼킨 원로들.
파파팟!
지면을 박차고 오른 그들이, 사방에서 터지는 공격의 흔적들을 피하며 스다가 있는 곳을 향해 경공을 펼쳐가는 그때.
번쩍-!
━━━번쩍!
번쩍-!
뭔가 이상하다.
삭월의 멤버와 세계무림연맹의 두 요원들이 부딪쳐가는 하늘 곳곳에서 터지는 섬광들.
번쩍-!
━━━━━번쩍!
번쩍-!
그 섬광들 가운데, 뭔가 결이 다른 기운이 느껴진다.
괴물들끼리 부딪쳐 생겨나던 빛무리.
그 사이사이에서.
그 모든 번쩍임을 잡아먹을 것 같은 섬광이 빠르게 터지기 시작한다.
퍼퍼퍼펑-!
으스스하면서도 이질적이던 그 기운.
스다를 쫓아 경공을 펼치던 구향회 원로 중 이를 느낀 몇몇의 시선이 사방으로 나뉜다.
다시 한번 섬광이 터졌을 때.
마치 벼락이 달을 쳐서 떨어뜨린 듯한 기묘한 빛이 삿포로의 어둠을 몰아냄과 함께.
━━━━━━━번쩍!
누군가는 도망치던 스다의 얼굴에 머문 웃음기를 보았고.
“(·········어?!)”
누군가는, 저 섬광들 사이에 섞인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루?!)”
“(·········백 상?!)”
* * *
검붉은 밤하늘.
그 아래, 더없이 느려진 공간이 있다.
뼛가루 하나하나.
핏방울 하나하나.
먼지들 하나하나.
그뿐인가.
도끼날과 내공 두른 주먹이 부딪치며 생긴 충격파가, 마치 바닷물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삿포로 곳곳으로 퍼지는 게 선명하게 보이는 지금.
너무나 익숙한 이 경지에 다시 들어섰을 창규를 바라보며, 천마가 피식 웃음을 짓는다.
- 좋아, 우리 후배님은 오랜만에 온 주제에 여전히 파이팅 넘치니 다행이네.
여기서 오직 홀로 자유로운 존재.
천마.
창규를 향해 윙크한 그는, 곧바로 녀석과 등을 맞댄 이를 향해 몸을 날린다.
- 자, 딱 보니까 넌 이런 게 처음일 테고.
하루.
그의 눈동자에서 천천히 경악이 피어나는 것을 본 천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머리가 복잡할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는···.
일일이 말하기는 힘들었다.
그가 깃든 창규도 아닌 외부인인 하루에게 어떻게 그의 모습이 보이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녀석까지 이 경지를 체험시켜 줄 수 있었는지.
다시 말해.
어떤 얼간이가 삿포로 전체에 역으로 펼친 만형진법과, 창규가 끼고 있던 반지를 매개로 현세에 남겨놓은 천마의 기운, 거기에 더해 위급한 순간 창규와 천마가 마주하며 반 정도 강림한 자신까지.
- ···뭐, 나한테 은혜를 입었다 정도로 생각하자고.
그 모든 걸 교주다운 말투로 끝내 버린 천마.
그는 바로 볼 수 있었다.
- 그래, 바로 접수하니 얘기가 빨라지겠군.
광기가 퍼지고 있는 이 하루라는 녀석의 눈동자.
그쪽을 향해 엄지를 치켜든 천마가, 여태껏 지시만 했던 모든 움직임들의 이유를 설명해 주기 시작한다.
- 잘 봐. 저놈의 타격은 주먹 끝에서 터지지만, 그건 핵심이 아니야. 놈의 단전 쪽으로 눈동자를 돌려 보라고.
털북숭이 러시아인.
벌써 지척에서 주먹을 날리고 있는 녀석의 복근 쪽에서 미세한 충격파가 공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 보일 터.
- 놈은 내공을 진동시킬 줄 아는 놈이야. 단전부터 진동시킨 내력을 끝에서 터뜨리는 스타일이지.
백창규와 등을 맞댄 채 천천히 회전하면서도 털복숭이 러시아인의 단전을 향해 조금씩 움직이는 하루의 눈동자.
그쪽을 바라본 천마가 기특하다는 듯 입을 연다.
- 좋아. 그럼 이제 곧바로 5시, 8시 방향으로 고개 돌려봐. 어떻게 해야겠어?
이번에는 도끼날들이 보인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러시아인을 쪼개기 위해 터지는 남녀의 강공들. 지척에 다가온 강공을 바라보며, 천마가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 그렇지. 지금처럼 회전력을 유지하면서 5시 방향 쪽 도끼날을 먼저 그쪽으로 쳐 내야겠지? 그렇게 하면 단전 쪽으로 도끼 방향이 바뀔 테니 이 털북숭이 녀석은 자신도 모르게 진동폭을 줄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천천히 움직이는 풍경.
그곳에서 느릿하게 자신의 지시를 따르는 하루와 백창규를 보며 천마가 웃음 짓는다.
- 그래, 그렇지. 이번에는 좀 낫네.
그러니까.
아까부터 도끼를 든 두 고수와 털북숭이 러시아 고수가 격돌하는 그 사이사이마다 톱니바퀴처럼 끼어들어 무공과 움직임을 습득하고 있는 녀석들을 보면서 말이다.
- 자자, 조심해. 네 반대편에 있는 녀석이 잘해 주고는 있지만, 네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너희 둘 다 박살 나는 거니까.
그렇다.
지금 하루는, 이고르와 세계무림연맹 소속 두 요원이 목숨 걸고 싸우는 격투 사이에서 그 셋의 공격 궤적을 절묘하게 흘리며 천마의 즉석 과외를 받는 중이었고.
- 그래, 이제 대충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참하늘주님의 복음 아래.
이제, 혼자라면 상대하기 힘들었을 괴물들을 몽땅 잡아 버릴 참이다.
- 제대로 놀아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