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이고르.)”
검은 천 덮인 유리관.
천 아래로 보글보글 끓는 방울이 슬쩍 보이는 유리관들이 오와 열을 갖춰 꾸려진 이 연구실 한가운데.
“(그놈 하나로 괜찮을까?)”
“(불안해?)”
“(아무래도. 뭐든 확실한 게 좋잖아.)”
“(걱정은.)”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웃음 지었다.
피식.
오무답문 중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삭월(朔月)에서도, 순간 무력만큼은 손에 꼽히는 멤버가 바로 이고르.
정식 멤버도 아닌 스다, 그 배신자는 어떤 짓을 하더라도 이고르의 무력을 넘어설 수 없다.
“(하지만 스다 그놈, 이번엔 꽤 치밀하게 계획을 한 것 같아. 아까 홋카이도 쪽 사진 봤잖아?)”
“(어차피 기껏해야 60%야.)”
“(복원도가 중요한 게 아니야. 놈은 지금, 그 진법을 역으로 펼쳐서···.)”
“(얼마나 기특해?)”
“(뭐?)”
“(우리가 그 만형진법으로 실험하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잖아. 그동안 어떤 재료를 써서 연습한 건지, 어떤 결과를 도출하려고 한 건지, 기대 만큼의 성과는 나왔는지, 이런 것들이 너무 궁금하지 않아?)”
또각, 또각.
가만히 중얼거리며 연구실을 걷던 하얀 가운의 여자. 그녀가 빙그르르 돌며 웃음 짓는다.
“(우리 대신 그 번거로운 짓들을 해준 거 아냐. 나, 이번에 이고르가 걔 잡아 오면 많이 예뻐해 주려고.)”
고개 돌리자 허공에 날리는 은발.
그 좌우에 놓인 검은 천 덮인 유리관들 위에 양 손을 올린 그녀가, 과감하게 양 유리관을 덮고 있던 검은 천을 걷어올린다.
팔락.
그러자 드러나는 유리관의 내부.
그 안에 있던 것은 사람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신이 근육으로 꽉꽉 들어찼음에도 태아처럼 웅크리고 있는 상처투성이의 인간들.
무림인(武林人)이었다.
어깨, 등, 가슴, 다리를 가리지 않고 칼에 베인 자국이 있었던 그들은, 입에는 기묘한 모양의 산소마스크를 낀 채 기절한 사람처럼 이 공간에 있었는데.
“(흠. 스다의 몸이 얘네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누가 그 역겨운 몸 써먹는대?)”
“(예뻐해 준다며.)”
“(우리가 진행하는 실험이 좀 많아? 저번에 그 해구도 그렇고, 화산도 그렇고, 그 배신자 새끼의 애매한 몸을 녀석보다 유용하게 쓸 방법은 차고 넘치잖아.)”
“(취향 참 괴상하군.)”
“(대의를 위한 한 걸음이라고 해 줄래?)”
“(쯧.)”
천장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숨.
고개 든 은발 여인의 눈에, 천장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이 올라간 연구실의 하얀 벽 어딘가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노인이 보인다.
안대를 쓴 왜소증의 노인.
정확히 말하면, 발 디딜 틈 하나 없어 보이는 반질반질한 벽 위에 두 다리만으로 올라선 채 붓으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는 노인이 말이다.
“(리더씩이나 되어서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구만.)”
“(글쎄? 같은 멤버 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자신의 실력이 의심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이고르가 더 서운해할 텐데 말이야.)”
“(그래서 하는 말이야.)”
피식 웃으며 벽에서 붓을 뗀 노인.
고개 돌려 은발의 여인을 쳐다보는 노인의 뒤로, 방금 막 스케치를 끝낸 천마의 모습이 보인다.
천마.
그러니까, 스다가 홋카이도에서 피규어를 만들 때 참고했던 그 고금제일인의 얼굴이 묘사된 그림이 말이다.
그리고 그건 하나가 아니었다.
노인이 스케치를 끝낸 천마의 그림 위로,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천마의 그림들이 드넓은 연구실 벽 곳곳에 피어나 있는 가운데.
“(저거 안 보여?)”
벽에서 붓을 뗀 노인이 연구실 아래쪽을 가리킨다.
그곳에 붙어 있는 수많은 사진들.
사막, 밀림, 바다, 산, 들판···.
각기 배경은 다양했으나, 마치 운석에 충돌한 것처럼 거대한 구멍이 패인 것만은 똑같은 그 사진들을 바라보며, 노인이 말을 이었다.
“(난 지금, 이고르가 아니라 흥분한 놈에 의해 여기까지 잡혀 오지도 못하고 터져 나갈 스다 새끼의 전신이 아까운 거라고.)”
그러니까, 이고르의 일권(一拳)이 찍힐 때마다 크레이터처럼 터져 버렸던 세계 각지의 자연경관을 보면서 말이다.
* * *
검붉은 하늘.
━━━━━━━쩍!
그 아래 있던 스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자신이 만들어 낸 거대한 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대한 공격에 의해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다.
본능적으로 기운을 끌어올린 스다가 양손 들어, 공격이 온 쪽을 향해 거대한 손의 형상을 만들어 내었으나.
“(스다! 스다! 스다! 스다!)”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오싹한 기운이 스다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리고.
━━━━━━━━━━━━━━━━꽝!
검붉은 큐브들로 재편되었던 공간에, 거대한 균열이 났다.
“(스다, 이 귀여운 새끼!)”
“(·········뭐야.)”
크레파스로 아무렇게 칠해놓았던 종이에 구멍이 난 것처럼, 스다가 역으로 펼친 만형진법이 세워두었던 기괴한 풍경의 일부가 찢긴 그때.
재빨리 양손으로 인을 맺는 스다.
그의 시야에 이고르가 잡혔다.
어느샌가 하늘에 솟구쳐,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빠르게 두 번째 공격을 날리는 삭월(朔月) 정예 멤버의 모습이.
그러나 예측 못 한 건 아니다.
‘(그래, 왔구나.)’
크게 숨을 들이마시는 스다.
순간적으로 그 주변에 있는 공간이 일그러진다. 그가 펼친 진법이 잡아먹고 있었던 이 삿포로의 기운들. 그 기운들이, 순식간에 소용돌이치더니 스다의 호흡에 딸려 들어간다.
짧은 들숨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흡수한 공간의 기운은 꽤 강력해 보였다.
푸스스스-!
스다의 상체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입과 코, 그리고 귓구멍은 물론.
단전부터 전신 세맥까지.
마치 증기처럼 피어오른 그 기운들이, 스다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한 그 순간!
스다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이고르의 공격에 대응한다.
“(크하하하하! 재밌는 짓거리를 하는구만!?)”
“(멍청한 새끼. 네가 알던 내가 아니···.)”
역으로 펼친 진법을 이용해, 주변 오타쿠들의 자연지기는 물론 인근의 지기(地氣)까지 끌어올린 스다가 방어동작을 취하지만.
━━━━━━━━━━━━━━━━꽝!
이고르의 두 번째 권에 박살 난 공간.
스다 주위로 피어올랐던 검붉은 거대한 손들을 포함한 강대한 방어막이, 마치 유리가 깨지듯 터져 버렸다.
“(내가 알던 네가, 뭐? 똑같은데?)”
“(············?!?!?!)”
그대로 입과 귀에서 피를 토하는 스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귀에서 나는 이명.
방금,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갔다.
“(스다, 스다, 스다.)”
조금 전까지 품고 있던 생각들도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
하루?
백창규?
천마?
찾고 있던 것들, 품고 있던 생각들, 그리고 지금 필요한 것들 따위가 날아갈 정도로 강했던 공격.
아직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스다의 귀에, 이고르의 음성이 꽂힌다.
“(네 문제가 뭔지 알아? 고작 견습 주제에 우리 삭월의 힘을 파악했다고 착각한 거야.)”
아직도 동공이 흔들리는 스다.
어떻게?
첫 번째 공격과 달리, 이번에는 만형진법의 묘리를 역으로 펼쳐 수많은 기운을 주입했는데?
“(우린 정식 멤버가 된 사이가 아니라면, 죽일 놈들을 제외하고는 절대 100% 전력을 노출하지 않지.)”
“(············!!!)”
“(여태까지 우리가, 네 앞에서 전력을 다한 모습을 단 한 번이라도 보여 준 줄 알았어?)”
겨우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몸을 회복한 스다를 향해, 입꼬리를 말아 올린 이고르가 이죽거리며 다음 공격을 장전한다.
콰콰콰콰콰-!
허공에서 허리를 비튼 이고르.
단순한 동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공기 흐름이 그를 향해 모여든다.
“(죽이진 않을테니까 안심하라고.)”
자신의 몸을 스치는 미풍을 느끼며 손가락을 꿈틀 움직인 스다.
망할 삭월 새끼들.
계산을 잘못했다.
나름대로 강한 힘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까지 수준 차이가 날 줄이야.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창규, 하루.
지금 놈들은 어디 있지?
“(너 같이 부지런한 배신자는, 지금 죽여 버리기엔 너무 아깝잖아?)”
그가 흡수한 건, 천마의 기운이 옅게 퍼진 이 삿포로 하늘의 공기. 잠깐 숨을 들이마신 것만으로 훨씬 더 강해진 기운을 전신에서 뿜을 수 있는 그였다.
놈들이 갖고 있는 천마의 기운.
어차피 여기 만형진법을 역으로 펼친 삿포로는 자신의 영역 아닌가.
그 직접적인 기운을 감지만 한다면···.
“(단전 정도만 부수고, 오늘 바보 돼서 연구실 가는 거야. 알겠지?)”
공격 직전의 이고르.
자신의 머리카락까지 흩날리게 할 정도로 거대한 기운을 모은 이고르의 동작을 본 스다가, 이를 짓씹었다.
빌어먹을,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만 집중하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저 공격을 맞는다면···.
“(뭐야!)”
그때, 순간적으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스다의 양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날아왔다.
━━━━━콰직!
━━━━━콰직!
일순 스다의 눈앞에서 검붉은 기운이 폭발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저 뒤편으로 날아가버린 이고르.
스다의 눈이 커진다.
이고르, 녀석이 입고 있던 상의가 갈가리 찢긴 것도 모자라 양 어깨에서 피가 맺혀 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방금 이고르를 타격했던 거대한 병장기가 부메랑처럼 다시 날아왔을 때.
“(이고르?)”
“(맞아.)”
고개를 두리번거린 스다의 좌우로, 검은 정장을 입은 남녀가 보인다.
‘(·········요원이다!)’
스다 역시 알고 있다.
오무답문 중 유일하게 세계무림연맹이 움직이는 비밀조직에서, 심판자의 역할을 맡고 있는 초고수들.
원래 삭월의 정예 멤버들이 움직일 때마다 나선다는 저들이 이번에도 움직일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좋은 타이밍이라니.)’
이 기회를 살려야 한다.
타탁!
타탁!
부메랑처럼 돌아온 도끼를 각자 잡은 남녀가, 스다 자신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한 태도로 서로 짧은 대화를 나눴을 때.
“(생포 가능?)”
“(해 볼 만할 것 같은데.)”
좌우에서 주변을 불사를 듯 뜨겁게 타오르는 살기(殺氣)를 느꼈을 때.
“(갈까?)”
“(가자.)”
퍼퍼퍼퍼펑!
허공에서 폭발적이 파열음과 함께 이고르를 향해 쏘아지는 두 고수의 신형.
하지만 상대 역시 만만치 않다.
하늘이라 불리는 단체의 두 요원이 퍼부은 합공에 밀려났음에도, 곧바로 전신의 기세를 끌어모은 이고르.
“(이, 싸이코 새끼들이! 감히 누굴 방해해!)”
그의 살기가 하늘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아까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기운을 주먹에 실은 그가, 자신을 향해 몸을 쏘아 낸 두 요원들을 향해 권을 터뜨린다.
콰콰콰콰콰콰쾅!
기이하게 일그러진 공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강공들이 부딪힘에 의해, 안 그래도 어두웠던 삿포로의 하늘이 점점 엉망이 되어가지만.
‘(어차피 이건 내 공간이다.)’
결국 이곳은 스다가 만형진법을 역으로 펼쳐낸 곳.
‘(빨리, 빨리!)’
이곳에 자신의 감각을 예민하게 펼쳐낸 스다가, 빠르게 목표물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백창규.
하루.
그러니까, 자신이 흡수할 수 있는 천마의 기운을 담고 있는 녀석들을 찾기 위해 기감을 기울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곧 느낄 수 있었다.
‘(·········어?!)’
기이할 정도로 괴상한, 무언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