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하루는 잠시, 입을 뗄 수조차 없었다.
그럴 수밖에.
지금 구향회의 차기 회장을 노리는 그는, 본래가 천마를 신으로 여기는 참하늘주님성회의 신도 아닌가.
아니, 신도 수준이 아니지.
전 세계에서 참하늘주님성회를 이루는 3개의 기둥 중 의리를 기치로 하는 계파의 무려 대장로인 하루는, 세상 그 누구보다 천마를 열렬히 추종하는 남자.
그런 그에게, 복음이 들린다.
- 마! 전음 아니니까 어리버리 까지 말고!
전율이 돋은 하루.
혹시 이 목소리가 이름 모를 고수의 전음(傳音)인 것인가, 하고 잠시 의심하던 자신의 마음조차 꿰뚫은 것인가.
하루는 직감했다.
이건 전음과는 다르다고.
이 사실은, 등 뒤에서 정신 차리고 자신과 함께 합공을 펼치는 백창규의 재촉이 아니더라도 알 수 있었다.
“(이봐, 하루! 들리냐고!)”
딱 짚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머리를 웅웅 울리는 일반적인 전음과 달리 의식에 명료하게 꽂히는!
아니, 정확히는 마음을 찡하게 울리는!
천박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신성(神性)이 철철 넘쳐 흐르는!
- 아···.
하루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보인다.
백창규와 등 붙인 채 회전하며 방울방울 흩뿌리는 그 눈물 사이로, 그토록 그리워하는 ‘그분’의 형상이 보인다!
여태껏 백창규에게만 보이던 천마.
백창규가 의식을 차림과 함께 난데없이 허공에 나타난 천마의 모습, 지직거리는 꼴이 꼭 싸구려 홀로그램의 그것 같았지만, 지금 하루에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이 새끼 눈깔 봐라···.
천마를 마주한 하루의 가슴이 벅차오른다.
느껴진다.
성물(聖物)을 얻기 위해 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느꼈던 그분의 고된 행적이! 그 위대한 업적이! 썩어 버린 세상의 하늘을 찢고 새 하늘을 열겠다는 그 확신에 찬 포부가!
이를 느낀 이상, 하루에겐 천마가 어떤 말을 하건 상관없었다.
- 야, 일단 무슨 말이건 해 보라고!
천마의 독촉에 한참 동안 달싹이던 그의 입술 사이에서 나올 단어는, 딱 하나였으니까.
“(······의리이이이이이이이이!)”
- ·········진짜 미치겠네.
동서고금을 통틀어 무(武)의 극에 달한 무림인이자, 인간을 초월한 자이자, 구 무림 그 자체이자.
“(참하늘의 진정한 주인을 뵙습니다!)”
- 하하, 개 같은.
참하늘주님성회의 신(神).
백창규와 등을 맞붙이며 빙글빙글 회전의 합공을 뿌리던 하루는, 참하늘주님성회의 대장로로서 보일 수 있는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였고.
“(야야, 일단 진정해! 너 몸 흐트러지잖아!)”
“(참하늘주님이시여!)”
“(의리! 의리이이이이이!)”
“(선배님, 얘 반응이 생각보다 더 센데요.)”
“(선배님이라니, 어디서 건방지···.)”
“(야, 일단 멈추지 마! 떨어져, 떨어진다고!)”
흥분한 하루 탓에 어긋나기 시작한 합공.
적들에 의해 덮인 검은 하늘 아래.
스다가 움직이는 오타쿠 무림인들 한가운데서 등을 맞부딪힌 채 팽이처럼 돌던 백창규와 하루의 합공이 비틀거림에 따라, 그 회전력을 이용해 사방에 날아가던 검기(劍氣)는 눈에 띄게 약해졌고.
콰콰콰콰콰콰-!
사방팔방에서 인해전술로 그들을 덮치다 잠시 주춤했던 적들의 칼이 다시 소나기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공기를 눅진하게 적시는 살기(殺氣).
그뿐인가.
스다가 이 땅에 구동시킨 진법이 지금 하루와 백창규가 있는 쪽을 향해 삿포로, 아니, 홋카이도의 지기를 끌어당기고 있는 지금!
- 하, 어쩔 수 없구만.
잠시 균형을 잃은 것만으로 마치 이불이 덮어지듯 어마어마한 살기와 벌레떼보다 많은 적의 칼날들을 마주하게 된 하루와 백창규 쪽을 향해, 천마가 인상을 찌푸린 뒤 고함을 내질렀다.
“(어찌 내게 이런 영광이···.)”
- 하루 대장로!
번쩍 눈을 뜬 하루.
그런 그를 향해 짐짓 근엄한 말투로 입을 여는 천마.
- 대장로는 정신을 차리라! 이교도들과의 전쟁터에서 갈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대장로가 할 짓인가!
그 일갈의 효과는 바로 나왔다.
잠시 횡설수설하던 하루의 안광이 다시 빛나고, 백창규와 등을 맞댄 자세를 다시 교정하고, 합공을 뿌리던 검에도 힘이 들어간 그때.
-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은 단 하나도 허투루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다!
“(·········존명.)”
백창규와 눈을 맞춘 천마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부터다.
아직 미완성된 채 잘못 펼친 만형진법와 저 빌어먹을 반지가 불러일으킨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백창규와 함께 합의한 것을 펼칠 수 있는 것은.
- 내가 너희에게 복음을 알려 줄 테니.
반(班) 강림.
백창규와 계약서로 명시한 것과는 다른 형태지만, 자신의 힘을 역으로 소환해내려던 저 어설픈 만형진법이 만든 틈을 자신의 분노로 뚫은 뒤 일부의 권능을 칼끝에 쏟을 수 있게 만든 지금.
번쩍-!
천마는, 눈에서 번개 같은 안광을 번쩍이는 백창규의 손에 끼워진 북해빙궁의 반지를 쳐다본다.
그래, 사실 예전부터 알고 싶었다.
비슷한 경지를 가진 두 무림인이, 자신이 완성한 무(武)의 극을 합공의 형태로 펼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 너희는, 이를 칼끝에 담을지어다.
그러니까, 2명이 함께 펼치는 천마의 무공 말이다.
콰콰콰콰콰콰-!
* * *
콰콰콰콰콰-!
피로 범벅이 된 설산, 곳곳에 부러진 칼자루가 꽂힌 눈 덮인 들판, 엉망이 된 채 부서진 오두막, 대파된 채 연기를 피우고 있는 국도의 자동차들과, 칼 맞아 가슴이 쩍 벌어진 채 죽었음에도 손에 든 칼을 놓고 있지 않는 무림인들.
파파파팟!
그 모든 경치들이 좌우로 쉭쉭 빠르게 변하는 와중에도, 그의 눈은 그보다 더 자극적인 경치들을 포착하고 만다.
삿포로.
홋카이도 제1의 도시였던 이곳의 상징적인 마천루 건물들이 부서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곳곳에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피어오르는 먼지와 연기가 검붉은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며.
찰칵.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은 거한.
삭월의 멤버, 이고르였다.
두꺼운 손가락을 간신히 놀려 막 찍은 사진을 어딘가로 전송하자마자 어딘가로부터 전화가 온다.
“(전화하지 말라니까. 그래, 맞아. 그래, 그거 맞다고.)”
건성건성 답하는 이고르.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입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는데.
“(흐, 그래, 그러니까··· 아니, 됐다.)”
잔뜩 부풀어오른 그의 근육질 팔과 다리는, 이 끔찍한 전쟁터의 감각을 진심으로 반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 끝나고 연락할 테니까, 방해하지 마.)”
뚝 전화를 끊자마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물 조각들. 사무실 하나는 될 법한 양의 콘크리트와 철근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굉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를 냈지만.
저벅, 저벅.
이를 뒤집어쓴 채 연기 밖으로 나온 이고르의 입에는,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비릿한 웃음만이 새겨져 있었다.
쿵쿵대기 시작하는 그의 가슴은, 이미 아까부터 말하고 있었으니까.
“(·········도착.)”
스다고 나발이고.
이 재미있는 전쟁터에서, 식욕보다 강한 자신의 투쟁본능을 마음껏 폭발시킬 수 있겠다고.
* * *
홋카이도 최동단.
그러니까 밀려오는 태평양의 바닷물과 함께, 홋카이도란 섬의 가장 동쪽 곶의 모래 위로 발을 옮긴 남녀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도착.)”
지금 그들에겐 별말이 필요 없었다.
세계무림맹주 코엔이 타고 있던 전용기에서 뛰어 내려, 터무니없는 경지의 등평도수로 태평양 수면 위를 질주해 홋카이도에 도착했음에도 평온한 표정을 하고 있는 이들.
심판자.
세계무림맹의 비밀조직이자 오무답문 중 가장 강하다고 자부하는 ‘하늘’의 정예 요원인 그들에게 있어, 지금 체크해야 할 것은 딱 하나뿐이었으니까.
“(이고르.)”
“(그리고, 스다.)”
딱 저 둘이다.
삭월(朔月)
이 홋카이도에서 그들이 잡아가야 할, 감히 세계무림맹이 이끄는 질서에 대항하는 그 건방진 단체의 멤버들은.
“(한 명당 하나씩?)”
“(그렇게 하지.)”
등에 멘 도끼의 자루에 손을 대며 무미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녀.
어려울 건 없었다.
아니, 어려워도 상관없었다.
감히 세상의 질서를 흔들려는 이들에게 심판을 내리는 것이, 바로 이 ‘하늘’의 요원에게 부여된 숙명이었으니까.
“(다른 놈들은?)”
“(알아서.)”
그제야 마주 보며 씩 웃음 지은 하늘의 두 요원.
그 둘이 각자 자신의 등에 멘 도끼를 뽑아 낸 후, 다리에 가볍게 힘을 주자.
━━━━쾅!
방금까지 서 있던 곳에 거대한 구덩이가 파이고, 그들의 신형은 어느새 하늘 위로 날아간다.
* * *
느껴진다.
자신이 역으로 해석한 만형진법을 펼치며 이곳으로 모여드는 홋카이도의 지기(地氣)를 감지하던 스다는, 지금 이 거대한 진법의 홍수 사이사이로 섞여드는 고수들의 기운을 느낀다.
‘(············.)’
피투성이가 된 스다의 얼굴.
얼굴뿐인가.
무너져가는 마천루 위, 공중에 떠 있는 그의 주변으로 회오리치는 핏물들이 마치 그를 혈교의 제사장 같은 모습으로 만들었지만.
씨익.
그는 그저 웃음 지을 뿐이다.
“(이 배신자 새끼!)”
“(스다아아아!)”
“(감히 네가 우리 구향회에게 어떻게 이런 짓을!)”
그건, 지금 그에게 세뇌된 수많은 오타쿠들의 핏물을 뒤집어쓰고 여기까지 다다른 구향회의 원로들이 우습게 느껴졌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멍청한 놈들···.)’
그건, 지금 그가 느낀 만형진법의 기운이 전달해 주는 규격외 고수들의 등장 때문만도 아니었다.
‘(일단 한놈은 삭월 쪽이고···.)’
그저,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고오오오오-!
자신이 역으로 펼친 이 만형진법.
실제 수많은 무림인과 이 땅의 지기를 제물 삼아 펼친 이 특수 진법의 효과는, 그가 그동안 국소적으로 실험해 오며 수백 수천번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 왔던 그것보다 훨씬 더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고오오오오오오-!
느껴진다.
그가 희생시킨 수많은 무림인은 물론, 방금까지 가지고 있다가 생으로 제물로 바친 오타쿠 새끼들의 피는 물론, 진법을 개진한 자신의 선천지기마저 바친 이 말도 안 되는 고금제일진의 기운이!
“(말해라! 대체 왜! 대체 왜 그런 거냐!)”
“(스다! 네놈은 처음부터 이걸 목적으로···.)”
“(이 괴물 같은 새끼가!)”
살기를 피우며 자신에게 날아오는 저 구향회 원로들쯤이야, 우스울 뿐이다.
그뿐인가.
지금 이쪽으로 맹렬한 기운을 풍기며 달려오는 다른 고수들도.
심지어.
저 멀리서 섬광을 뿌리고 있는 저 하루와 백창규라는 놈들까지도.
‘(다소 번거로웠지만, 결국은 내 뜻대로 됐다.)’
모두가 제물이 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단 하나를 위해.
천마.
구 무림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만년빙정과 함께 봉인되었다고 알려진 그 고금제일인의 힘을 가져오기 위해!
━━━━━━번쩍!
자신들의 수하들이 인해전술을 펼치고 있는 저 멀리서 다시 섬광이 펼쳐졌을 때.
그가, 손을 움켜쥐었고.
퍼퍼퍼퍼퍼펑!
순간 도시 곳곳에서 폭발하기 시작한 그의 수하, 그러니까 세뇌된 오타쿠들. 마치 불꽃 축제라도 하듯 폭발해 올라간 핏물들이 하늘 곳곳을 수놓았을 때.
“(크···!)”
그의 선천지기를 담은 핏물마저 진법의 매개로 뿌려짐과 함께.
“(······크하하하하하!)”
하늘이, 암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