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천마는 떠올렸다.
이 의식의 바다 곳곳에서 터지는 세찬 물방울 하나하나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그날의 기억을.
다시 말해,
감히 ‘고금제일진’이라 불리던 만형진법을 자신이 처음 접했던 시기에 대한 기억을 말이다.
“·········빌어먹을.”
이건 꽤 불쾌한 경험이었다.
단순히 의식 어딘가에 있는 기억으로만 끝나지 않고, 촉감을 포함한 모든 감각, 그러니까 그때 느꼈던 모든 것들이 지금 다시 피부에 직접 와 닿는 듯한 지금.
그래.
새삼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느낀다.
“이게 대체 몇 년 만인 건지.”
천마는 불쾌하다.
망할 새끼들.
애써 잊고 있던 그 기억을 강제로 불러일으킨 것도 모자라, 그날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는 건.
“······만형진법.”
그것밖에 없지.
으득!
천마가 어금니를 씹는 순간 다시 폭발하는 의식의 바다.
바닷물이 하늘로 터져 오른다.
솟구친 바닷물은 사방팔방 사정없이 쏟아진다.
바다는 하늘이 되고.
하늘은 바다가 된다.
마치 검은 우주처럼,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랜지 구별할 수 없는 공간이 된 이때.
“·········.”
어느새 씁쓸함이 묻은 천마의 눈동자에, 사방에 튀기는 수많은 물방울들이 비친다.
파바바바밧-!
그리고, 그 수많은 물방울 하나하나에 비친 풍경이 있었다.
똑같은 풍경.
그 풍경에 들어선 건, 천마의 주위에 펼쳐진 이 이질적인 공간도 아니었고, 이 공간에 홀로 군림하고 있는 천마조차도 아니었다.
묘한 풍경.
그건, 천마가 자신이 깃든 백창규의 상태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시선을 저버릴 수 없는, 그 날의 기억이었다.
“············.”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미묘하게 바뀌어 버린 그 날에 대한 잘못된 재현(再現).
다시 말해.
세간에 잘못 퍼져 있는, 자신의 최후에 대한 그 망할 기억들 말이다.
* * *
번쩍-!
설산의 바람은 차갑다.
무림(武林)의 종말에 어울리는 이 삭막한 눈보라도, 하지만 북해빙궁주의 입에 맴도는 뜨거운 미소만은 삭히지 못한다.
“북해의 바람이 그렇게 춥나? 달변으로 유명한 그 천마의 혀가 완전히 얼어 붙었군.”
“너···.”
달빛에 은발 머리가 반짝이는 한 여인이, 눈을 부릅뜬 채 남자를 노려본다.
천마.
중원을 공포로 몰아넣은 천마신교의 수장이자 단신으로 무림맹을 초토화시킨 천하제일의 악귀를, 드디어 잡는다.
“···죽는다.”
“어차피 우리도 살 생각은 안 했어.”
씁쓸한 웃음을 짓는 북해빙궁주.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는 천마의 묘한 눈빛을 애써 외면한다.
중원의 칼 든 동료들은 이미 다 죽었으니까.
이 새외(塞外)의 북해빙궁조차도 좌우 호법과 마지막 세 제자를 제외하고는 멸문하다시피 한 와중에, 추억이나 목숨 따위를 부지할 생각은 진작 버렸다.
“진을 펼쳐라!”
동귀어진을 명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천하무림인의 내기를 모조리 흡수해 날마다 아득히 강해지는 저 천마는,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막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그건, 남은 5명도 마찬가지였다.
“존명!”
달빛 아찔한 설산 곳곳으로 다섯 인영이 펼쳐진다.
번-쩍!
밤하늘에 새겨지는 은빛 결계.
이를 본 천마의 눈이 커다래진다.
“···모산파?”
“그래, 기억해야지. 네놈에게 처음 멸문당한 문파의 마지막 제자가 넘겨 준 술법인데.”
“그럴 리가 없다.”
우르릉!
설산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치켜뜬 천마.
수백 개의 얼음 사슬에 팔다리가 묶인 상황에서도 여유로웠던 그의 태도가, 처음으로 바뀌었고.
“만형진법? 이건 분명히 내가 깬···.”
“세상 누구도 만형진법을 깬 적이 없다.”
이를 본 북해빙궁주가 씩 웃음을 지었다.
만형진법.
무림 전체를 봉인할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이 모산파의 비전술법은, 고금을 통틀어 단 한 번도 펼쳐진 적이 없었다.
“왜냐면, 진짜를 본 적 없으니까.”
천하에 퍼진 영기를 찰나에 만 번이나 변화시키는 이 진법을 펼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그릇이 있어야 했으니까.
천마 정도 되는 괴물을 봉인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 그릇 역할을 할 매개체가 중요했지만, 북해빙궁주는 걱정하지 않았다.
“이게, 진짜 만형진법이다!”
우직!
허리띠의 장식을 깨부수자 그 안에서 나온 만년빙정(萬年氷晶). 대륙과 북해의 가장 순수한 기운을 담은 이 얼음 결정은, 북해빙궁이 대대로 모셔온 신물답게 만형진법의 그릇이 되기엔 충분했으니까.
“···이, 이런 미친 새끼가!”
“북해빙궁 전원! 봉진을 시작하라!”
“존명!”
콰콰콰-
황금빛 천둥 번개가 번쩍이고.
설산 위로 눈보라가 몰아치며.
하늘에는 팔괘가 새겨지기 시작한다.
“감히 중원 무림 그 자체인 나와 함께 봉인되겠다고? 너희는 나랑 갇히게 되는 것이다!”
“관점의 차이군.”
“좋아, 배짱을 인정하지! 네게 천마신교 부교주의 자리를 줄 테니, 나와 함께 천하를 누리자!”
“천마치고는 너무 진부한 말인데.”
“이 멍청한! 만형진법을 펼치면 천하의 영기가 봉인된다! 세상에서 무(武)가 사라지게 된단 말이다! 그래도 좋은가!”
“그놈의 무림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다.”
“세상은 강자존이다! 무공이 없어도 죽을 사람은 죽어!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천하(天下)의 단전을 폐하겠다고!”
대답 없이 천천히 만년빙정을 들어 올리는 북해빙궁주를 향해, 천마가 울부짖듯 사자후를 내질렀다.
“후대의 무인들이, 네놈들을 뼈저리게 원망할 것이다!”
“북해는 그따위 사소한 비에 젖지 않는다.”
“으아아아아!”
만년빙정을 둘러싼 공기가 일그러진다.
하늘에선 낙뢰가 거미줄처럼 번쩍이며, 시선 닿는 곳마다 쪼개진 빙산들이 거대한 화살처럼 날아온다.
콰콰콰-
수백 개의 빙갑에 팔다리가 묶인 채 사투를 벌이는 천마를 보던 북해빙궁주가, 가만히 고개를 돌린다.
- 그렇지 않은가?
만년빙정에 이 모든 게 봉인되어도 괜찮냐는 전음.
궁주의 마지막 물음에, 저 멀리 빙하가 솟구친 설산의 양쪽 봉우리에서 각각 부엉이 같은 안광(眼光)이 번쩍인다.
“···답할 필요도 없다 이거군.”
좌우 호법 사이에 염화미소가 오간 것이다.
북해궁주의 뜻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그건, 낙뢰가 떨어지는 밤하늘을 밟아 가며 진법의 마무리를 새겨 가던 나머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궁주님의 판단을 따를 뿐.”
“어차피 마지막일 것 같아서 말하는데! 저번 달 궁주님 술 창고에 오줌 싼 거 접니다! 화끈하게 용서해 주십쇼, 크하하!”
“고금 최초의 냉동인간이라, 저는 기대됩니다.”
“좋아.”
중간에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지만, 뭐 상관없다.
만년빙정에 봉인되는 일이다.
존재만으로 세상의 무공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저 천마와 함께.
“그럼, 전부 동의하는 걸로···.”
이제, 저런 사소한 일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
“···아니, 근데 넌 진짜 또라이냐?”
“와하하하! 달빛이 너무 좋아서 그만! 화주를 과하게 조져 버렸지 뭡니까!”
“네가 과하지 않은 날이 어디, 하.”
평소처럼 욱하려던 북해빙궁주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안다.
백호의 저 도깨비 같은 행동에 열을 올리는 것도, 연화의 충정 어린 쓴 소리를 듣는 것도, 가후와 함께 바둑을 두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다들!”
솔직히, 이런 건 처음이라 잘 모른다.
북해빙궁의 전부라 할 수 있는 만년빙정에 만형진법으로 이 전부를 봉인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부족한 궁주와 함께 하느라 고생 많았다.”
바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저 천마와 함께 끝나지 않을 영원한 싸움을 할 수도 있고, 어쩌면 미쳐 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어떤 결과가 나타나건, 그건 이 세상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각오하기로 한 일이니까.
“혹시,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자는 거리낌 없이 하도록.”
콰콰콰-
풍경이 일그러진다.
설산도, 하늘도, 구름도, 천마도, 궁주도, 시계(視界)가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세상이 만년빙정을 향해 쇄도한다. 천하가 품고 있던 수많은 영기가 밀려온다.
“궁주님.”
“말하라.”
끝이 보인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잔인했던 천마와, 그를 토대로 재편된 이 무림의 끝이.
“언젠가 봉인이 풀리는 날이 올까요?”
“연화야.”
“솔직히, 아쉽습니다. 이리 융성했던 무학(武學)이, 지금도 제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이 내공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는 게.”
“죽음은 흔한 것이다.”
“아뇨, 죽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협을 행할 무인이 사라지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건 기우구나.”
콰콰콰콰-
먹물이 스며드는 화선지처럼, 만년빙정은 북해빙궁의 영역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빨아들인다.
“세상에 다시 무학이 피어나는 일이 올지는 모르겠으나, 무 없이도 협행은 가능한 일이다.”
“정말 그럴까요?”
“뭐,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이제 그림처럼 왜곡되기 시작한 궁주의 말을 마지막으로.
“···후대의 협사들을 더 믿어 보자꾸나.”
북해빙궁의 모두는 천마와 함께 만년빙정에 봉인되었다.
툭.
바닥에 떨어진 만년빙정.
그건 단순한 얼음 결정이 아니었다.
힘으로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천마의 야심, 무림의 역사를 거두면서까지 세상을 지키려 한 북해빙궁의 의지, 그리고 이를 위해 무림연맹의 무수한 영웅들과 모산파의 도사들까지.
이건, 구(舊) 무림 그 자체였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이 모든 기운들이 봉인된 이 만년빙정이 발견되는 날은, 그야말로 신(新) 무림이 다시 피어나는 날이······.
* * *
철벅.
“·········아니.”
맨몸뚱이 하나로 러시아 사할린에서 일본 홋카이도 사이의 바다를 건너, 방금 막 홋카이도에 상륙한 남자.
말 그대로.
상륙(上陸)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의 거구를 가진 그는, 세간에 잘못 알려진 저 천마의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 자식은 뭐 그리 같잖은 얘기를 지어 냈는지 모르겠네.”
세차게 쏟아지는 폭설.
한밤인 데다가 오늘따라 평소에는 보지도 못할 정도의 눈까지 내리는 이 홋카이도의 최북단 소야 곶은, 관광객들에게는 사진은커녕 제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할 정도의 험난한 날씨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어디 보자.”
남자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가만히 멈춰선 남자.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며, 다시 길게 호흡을 내뿜는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느끼기라도 하듯 천천히 호흡을 들이마시며 기도를 갈고 닦으려던 그였으나.
“······.”
자신도 모르게 씩 웃음을 지었다.
저 멀리.
굳이 안력(眼力)을 돋우지 않아도 될 정도로 거대한 구름의 움직임이, 저 멀리 하늘 어딘가에서 희미하게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푸하핫!”
웃음을 터뜨린 남자가, 그대로 진각을 찍는다.
사방에 솟구치는 눈보라.
하늘에 치솟은 눈과 흙먼지가 내려갈 즈음, 이미 남자의 거구는 한참 먼 곳을 향해 쏘아진 지 오래.
콰콰콰콰-!
그야말로 경지에 달한 경공이었다.
경공을 행하는 자신의 좌우로 주위 풍경들이 쏜살같이 슥슥 밀려나고, 그 자신도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바람을 화살처럼 맞아야 했지만, 남자의 입에는 그저 웃음만이 걸려 있을 뿐이었다.
“스다, 이 새끼.”
삭월(朔月)의 룰을 깨뜨린 그 빌어먹을 배신자, 스다를 잡아 죽이기 위해.
“······오늘 잡아 죽인다.”
오무답문 중 가장 위험하다는 삭월의 정식 멤버, 이고르가 홋카이도 삿포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