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송출 끊긴 홀로그램처럼 지직대는 천마.
처음이었다.
팔이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릴 정도로 흥분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 ···진······ 개···! 저···!
부들거리는 손끝이 향한 곳은 저 앞.
마천루의 깨진 창문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지고, 아래에서는 검붉은 연기가 솟구치는 가운데, 스다 마사오를 아슬하게 쫓는 하루의 뒷모습이 보인다.
“(크히히히! 잘 따라오는데?)”
“(곱게 죽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멈···.)”
“(그럼 일단 서비스부터!)”
거리낌 없이 터지는 스다의 검격에 와장창 깨지는 빌딩 숲의 유리 벽. 하지만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머리 위로 쏟아지는 유리조각들을 검에 실어 비표처럼 뿌리는 하루.
그조차 예측한 듯 허공에서 몸을 틀어 가볍게 공격을 피한 스다였으나.
부욱.
유리 조각에 찢어진 녀석의 상의가 나풀거린 순간, 창규는 비로소 볼 수 있었다.
“···············!”
찢어진 상의 너머로 드러난 스다의 등.
그 위로 선명하게 새겨진 문신을 본 창규는, 자신이 저것과 똑같이 생긴 문양을 본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인천.’
혈교의 난동을 겪었던 인천.
정확히 말하면, 핏기 가득한 모든 상황이 끝난 뒤 김두광과 함께 모산파 출신 혈교 술사를 심문했던 인천 앞바다. 혈강시들의 뼈를 이용해 만형진법을 모방한 진을 펼쳤던 그 여자의 등에는, 분명 저 스다의 등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렇다는 건···.’
확실히, 그녀는 자백했었다.
한번 시범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1,000명의 사람들을 제물로 받는다던 그 만형진법의 전달자가 존재하는 곳의 좌표를.
‘·········저놈이다.’
그 좌표와 일치하는 이곳에서는 지옥도가 피어나고 있고, 그 한복판에서는 그녀와 똑같은 문양을 등에 새긴 놈이 활보하고 있다.
이 모든 게 의미하는 건 단 하나.
‘스다 마사오.’
저놈이다.
지금 콘크리트 숲 위로 경공을 펼치는 저 스다라는 놈이, 창규가 이 일본에 온 이유. 그 옛날 천마를 봉인했다는 만형진법과 녀석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경공을 펼쳐 갈수록 선명해진다.
- 당······! 멈···! ···고···!
지직대는 천마 주위로 보이는 풍경.
와장창 창문이 깨져가는 콘크리트 숲 사이로 흩날리는 눈보라와 그 아래에서 타오르는 검붉은 불길.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총탄이 박히는 소리, 그리고 행인들이 지르는 비명들이 들리고. 이를 연료 삼아 피어난 붉은 피 안개가 대로 위로 피어나는 가운데.
퍼퍼퍼펑-!
그 곳곳마다 하얀 회오리가 솟구친다.
상가 옥상 위로,
창문 깨진 마천루 위로,
무너진 콘크리트 벽 위로,
금 간 횡단보도 위로,
백색의 기둥들이 올라간다.
피와 뼈, 그리고 칼바람이 만들어 내는 풍경들.
나부끼는 함박눈을 휘감고 하늘 높이 솟구치는 그 회오리마다, 희미한 피 냄새가 피어나는 그때.
“·········!”
창규는 떠올렸다.
몇 달전, 인천.
수백의 뼈 기둥들 사이로, 혈교 제사장의 음파(音波)가 천지 사방에 공명하던 개천가에서의 경험을.
꽝-!
충격파에 문득 흔들리는 시야.
마천루 위로 솟은 보름달이 두 개 세 개로 보이나 싶더니, 귓가에 왱하는 소음이 들린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찌릿한 뭔가가 통과하는 순간, 그는 전신에 돋는 닭살을 느낀다.
“······헛.”
경공을 펼치는 도중 한 빌딩의 창틀 아래로 발을 헛디딜 뻔한 창규. 찰나였지만 다리가 비틀거렸고, 칼 쥔 손끝이 찌르르 떨렸다. 문득 식은땀이 쭉 나고, 헛구역질이 식도를 때린 지금.
본능은 경고한다.
당장, 이곳에서 탈출하라고.
- ━, ━, ━━━! ━━!
천마의 말소리도 지직대는 잡음처럼 들리는 이때, 빌딩 아래로 미끄러지려던 창규의 귓가에 하루의 거친 외침이 꽂힌다.
“(뭐 해, 이 멍청한 새끼야!)”
간신히 정신을 붙잡는 창규.
눈 쌓이는 마천루 외벽을 따라 경공을 펼치다 힐끔 뒤를 돌아보는 하루의 모습이 보인다.
“(빨리 와! 스다 새끼 사라지잖아!)”
뭔가 이상하다.
발을 헛디딜 정도로 전신의 기운이 진탕하는 자신과 달리, 하루는 여전히 멀쩡하게 경공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이 도시에 만형진법이 펼쳐지고 있다면, 왜 저 녀석은 자신과 달리 저리 멀쩡한 것인가.
“(계속 그렇게 멍 때릴 거면, 그 반지나 내놓고···!)”
멀어지는 스다와 창규가 낀 반지를 번갈아 쳐다보는 하루.
아까 본 창규의 활약을 반지 덕이라고 생각했기에 나온 행동이었겠지만, 그 시선을 따라 다시 반지를 바라본 창규는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반지.’
아까처럼 찌르르 떨리는 손끝.
다시 보니 파도가 너울 치듯 수많은 기운의 파동을 만들어 내는 그 중심에, 천마의 약혼반지가 있다. 눈보라를 흡수했을 때와는 달리 점점 검게 변하기 시작하는 반지.
‘······이것 때문이다!’
이 천마의 약혼반지가, 지금 이 도시에 퍼진 모든 악의(惡意)와 살기(殺氣)를 끌어들이고 있다. 만형진법이 구축된 삿포로와 함께 박동하듯 우르르 공명(共鳴)하던 그 반지의 기운이, 파동으로 변한다.
‘빨리 빼야······!’
반지를 뺄 틈조차 없었다.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한 묘한 파동.
반지에서 비롯된 그 파동이 손가락을 타고, 손등을 타고, 손목, 팔뚝과 어깨를 타고 번져 전신을 뒤덮었을 때.
“···············!!!”
창규의 몸을 따라, 평생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종류의 고통이 펼쳐졌다.
“큭,”
굳이 말하자면.
“크아아아아아아!!”
인간의 때가 벗겨지는 느낌.
* * *
밤하늘에 높이 박힌 보름달.
그 달빛이 내려앉은, 소금기 가득한 바다 위로.
‘사람이었던 존재가 벗겨지는 느낌··· 이라고 했었지, 아마.’
하얀 달을 등대 삼아 경공을 펼쳐가는 한 인영(人影)의 입가에 희미한 곡선이 그려진다.
‘오랜만에 좋은 구경 하겠군.’
발을 놀릴 때마다 일어나는 거친 물보라.
소금기 가득한 바다 짠내가 코끝을 사정없이 찔러대지만, 그는 인상 한번 구기지 않고 등평도수(登萍渡水)의 경지에 이른 경공술을 펼쳐갈 뿐이다.
좌우로 솟구치는 물보라들의 모양과 기세를 힐끗 본 그가, 슬슬 자신의 위치를 가늠한다.
촤촤촤촥-!
방금 막, 러시아의 영해(領海)를 지났다.
러시아 최남단의 사할린 섬과, 일본 최북단의 홋카이도 사이의 거리는 50㎞ 남짓. 저 멀리 보이는 희끄무레한 육지는, 그 일본의 애송이가 헛짓거리를 하고 있을 홋카이도가 분명하다.
‘그나저나, 그 녀석 이름이 뭐였더라···.’
스다? 소다?
‘아시아 놈들 이름은 다 비슷비슷해서 헷갈린단 말이지···.’
솔직히,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긴.
비단 국적을 막론하고, ‘멤버’ 중에서 그깟 사자(使者) 역할을 하는 놈들의 자세한 이름을 기억하는 놈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지금 중요한 건 하나다.
[만형진법萬形陣法]
멤버들이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온전하게 복원하려 했던 구 무림 제일의 봉인진. 그 봉인진을 역으로 펼쳐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망치려 하는 건방진 배신자 새끼.
‘하여간, 칼 쥔 새끼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조금만 틈을 주면 등에다 칼을 꽂으려 한다니까.’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랬다.
아프리카에서도, 유럽에서도, 세계의 질서를 뒤바꾸겠다는 혁명에 순수한 의도로 합류하려는 멤버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들, 이렇게 일신의 무력이 강해질 조금의 틈만 주면 저 일본의 애송이처럼 배신을 해댔다.
‘중요한 건 힘이 아니라 메시진데 말이야.’
불쌍하고 멍청한 것들.
러시아 말로 욕설을 뇌까린 남자가 문득 웃음을 터뜨린다. 한껏 일그러진 입가에서 새어 나온 웃음은, 곧 그의 단전에서 터진 기운에 실려 사방을 진동케 할 거대한 충격파로 탈바꿈한다.
콰콰콰콰콰-!
해수면에 파도를 일으킬 정도의 거친 웃음.
쏟아지는 물보라 너머로, 빠르게 모여드는 삼각의 지느러미들이 보인다. 이 바다의 포식자를 자처하는 상어들이, 자신들의 영역에 등장한 낯선 존재에게 적개심을 품기 시작한 것이다.
우뚝.
아직도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있는 남자가, 경공의 속도를 늦춘다. 그에 따라 해수면에 퍼지기 시작한 조그마한 동심원들. 그 동심원들을 하나하나 망가뜨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상어들을 보며, 그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그 일본 애송이랑 똑같군.’
다를 게 없다.
천적들이 없는 곳에 풀어둔 채 얼마간 먹이를 먹으며 성장하게 만들어 놓으면, 자신이 ‘진짜’ 포식자인 줄 착각하는 멍청이들과. 하늘에서 살아본 적 없는 물고기나 잡아먹는 주제에 자신들이 세상의 강자인 줄 착각하고 있는 저 멍청이들과.
‘우리가 내버려 두지 않았다면 그렇게 크지도 못했을 텐데 말이야.’
아직 실험은 끝나지 않았다.
일본의 그 애송이가 전부 복원됐다고 믿고 있는 그 만형진법은, 아직도 100%가 아니다. 놈을 일본에 보낸 건,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프로젝트를 위한 실험을 하기 위함이었다.
‘봉인진을 역으로 펼치는 걸 알아 낸 건 꽤 칭찬해 줄 만하지만···.’
고금제일진이라 알려진 만형진법을 역으로 펼쳐 힘을 얻어 내기 위해서는, 유물들이 필요하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그 ‘천마’의 힘이 담긴 유적과 유물들이.
‘그 반지 하나로 세상을 얻은 것처럼 행동하는 건 좀 우스운데.’
세상에 다시 없을 기회라 생각했을 것이다.
수백 수천의 사람들을 재료로 바치고, 뼈로 된 회오리들을 터뜨리고, 팔괘와 별자리의 움직임에 맞춰 살아 있는 재료들을 배치하며. 또한 그에 따라 공명하는 도시 내의 공기를 보며, 자신이 뭔가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기껏 심부름꾼밖에 되지 않는 놈들이 생각한 걸, 우리들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 게 정말 우스워.’
이미 다 해 봤던 실험들이다.
각국에 퍼져서 옛 구무림 때 만들어진 강시들의 DNA를 채취하기도, 심해에 박힌 구무림 시대의 신병이기를 복각해 본 경험이 있던 ‘멤버들’의 하나인 그로서는 그저 수가 전부 보이는 수작질일 뿐이라는 애기다.
‘그래도, 오늘 새로운 실험체가 만들어지겠어.’
사실, 프로젝트 차원에서 보면 나쁘진 않다.
미완성된 만형진법을 역으로 흡수하려다 죽어 버린 배신자. 결국은 이런 놈들의 인체가, 만형진법의 완전한 복원을 위한 실험에 딱 알맞은 표본이 되니까.
‘이제 추가 멤버는 그만 모집해야겠군.’
다만 씁쓸할 뿐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대의(代議)를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이빨을 꽂아넣어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마구잡이로 아가리를 펼쳐대는 저 상어처럼 무식한 것들.
촤악-!
촤악-!
촤악-!
해수면 위로 솟구친 수십 마리의 상어 떼.
고래조차 순식간에 뜯어먹을 수 있는 수백수천의 이빨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기 시작했지만.
‘후.’
가만히 발을 들어 올린 남자가 해수면 위로 동그란 원을 그리자, 그대로 퍼져나가는 하얀 직선.
츠츠츠.
남자를 중심으로 동심원처럼 피어난 그 직선이 닿자, 사방에서 뛰어든 상어 떼들의 하얀 배가 그대로 베어진다.
퍼벅! 퍼버버벅!
마치 풍선 터지듯 터져 버린 상어 떼.
하얀 달빛이 내려앉았던 해수면 위로, 검붉은 내장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
‘그나저나.’
피를 뒤집어쓴 채 떨어지는 상어 내장 하나를 받아 낸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으적으적 상어 고기를 생으로 씹으며 다시 경공을 펼치기 시작한다.
콰콰콰콰콰-!
점점 가까워지는 홋카이도.
그 하늘 위로 희미하게 피어난 하얀 회오리들을 본 그가, 비릿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 배신자는 어떻게 처리하면 좋으려나······.’
이제 곧이다.
자신들을 배신한 애송이의 전신을 입맛대로 실험할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