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대 무림 견문록-116화 (116/150)

116화.

수백의 검광(劍光)이 번쩍이는 밤하늘.

창규와 하루를 감싼 채 만들어진 거대한 군집체 바깥에서, 안광을 빛내는 오타쿠들이 하나둘씩 허공 아래로 떨어지고 있다. 목숨조차 내던져가며 군집을 형성하는 이 광인들에게 칼을 박고 있는 건, 하루를 따르는 구향회의 조직원들.

“(여기 비었다! 손 남는 놈 이쪽에 칼 박아!)”

“(하루 상 꺼내!)”

“(오타쿠 새끼들, 전부 다 죽여버려!)”

마치 사냥감을 물어뜯어 해체하는 개미 떼처럼, 그들은 창규와 하루를 감싼 이 거대한 군집체를 하나씩 떼어 낸다. 군집체 바깥쪽에서 위아래로 어지러이 경공을 펼치며 대열을 유지하는 오타쿠들은, 목숨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버릴 정도로 미친놈들이었지만.

“(끄아아악!)”

광기와 물량이라면 이쪽도 만만치 않다.

“(야, 여기 지원 필요···!)”

“(됐어! 이 새끼랑 같이 떨어질 테니까 빨리 파고들어!)”

부상 당한 채로도 상대하던 오타쿠들을 끌어안은 채 동반 낙하하는 조직원들의 칼이, 한칼 먹고 추락하는 동료들의 어깨와 머리를 밟으며 위로 솟구친 조직원들의 칼이, 적들에게 박힌다.

콱! 콱! 콱!

군집체의 바깥 대열에 있던 오타쿠들의 가슴과 등이 쩍 벌어지고, 팔다리가 하나둘씩 떨어져 나간다. 창날, 도끼날, 칼날 등 검은 정장 위로 부러진 채 박힌 냉병기의 날이 번쩍이지만, 녀석들을 떼어 내려는 조직원들의 칼끝은 흔들리지 않는다.

조금씩, 하루와 창규를 중심으로 형성된 거대한 인(人)의 장막이 해체되기 시작한다.

나부끼는 하얀 눈은 붉은 보슬비로 변하고, 조직원들이 입은 검은 정장이 피에 젖어 빨갛게 물들고, 거칠게 잘린 사람들의 살점과 뼈가 마치 우박처럼 내리고 있는 이때.

감 좋은 조직원 하나는, 느낄 수 있었다.

“(하루 상-! 거기 계십니까-!)”

수많은 오타쿠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인파(人波) 구체의 껍질이 조금씩 벗겨져 가는 가운데, 저 안쪽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범상치 않은 기감을.

동시에, 보았다.

자글자글한 벌레의 이빨처럼 오타쿠들이 휘두르는 칼날들이 드글대는 군집체 저 안쪽에서, 희미하게 하얀 선이 그어지는 묘한 광경을.

“(하루 상! 그쪽입니까!)”

“(━━━가!)”

“(걱정 마십쇼! 저희가 곧 그쪽으로···.)”

“(━, ━새끼들아!)”

“(······예?!”)

쏟아지는 오타쿠들의 칼날을 막으며 군집체 바깥으로 빠져나가 지원을 요청하려던 그는, 곧 선명하게 들리는 하루의 함성을 들을 수 있었다.

“(다 도망가라고, 새끼들아!)”

무슨 소리냐며 되물을 새도 없었다.

저 군집체 깊은 쪽에서 우글거리며 하루와 백창규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오타쿠들. 놈들의 등 뒤로, 방금 본 희미한 하얀 선이 점점 짙어지기 시작하더니.

팟━━━━━━!

이내, 과즙 같은 핏방울들을 튀기며 터져 버리고 말았으니까.

“(·········!)”

후두둑 붉은 피를 뿌리며 잘려 버린 오타쿠들의 팔다리. 깔끔하게 베인 머리 위로 희미하게 보이는 경악스러운 표정. 멀리서도 느낄 수 있는 오타쿠들의 소리 없는 비명.

“(미, 미친···!)”

또다시 예의 하얀 선이 그어지기 시작했을 때, 경악한 조직원이 취한 행동은 적절했다. 하루가 있을 저 너머로부터 몸을 돌려, 애써 뚫고 들어온 군집체의 바깥까지 다시 경공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 하루 상의 명령이다! 철수! 다들 철수해!)”

“(그게 무슨 소리야?)”

“(미친 새끼야! 하루 상의 명령이라고! 빨리 내려가!)”

“(지금 뭔···.)”

“(빨리!)”

동료들이 있던 군집체 바깥까지 겨우 헤쳐나와 윽박지르는 조직원. 하지만, 소리 지를 필요도 없었다. 새로운 입구를 찾기 위해 바깥의 대열을 이루는 오타쿠들과 어지러이 칼을 나누던 조직원들은, 곧 볼 수 있었으니까.

“(·········저게 뭐야.)”

이백을 훌쩍 넘는 저 오타쿠들이 대열을 이룬 저 거대한 구체 위로, 희미한 실선이 그어지는 것을. 그 선이 담고 있는 익숙한 살기(殺氣)를 느낀 조직원들 사이에서 하루의 명령이 전파되었을 때.

“(일단 후퇴다!)”

“(다들 내려가!)”

경공을 펼쳐 지상으로 내려간 그들은, 볼 수 있었다.

밤하늘에 떠 있는 인파의 구체.

수많은 오타쿠들 서로가 서로를 향해 경공을 펼치며 하루와 백창규를 감싼 채 꿈틀거리는, 다시 봐도 괴이한 저 군집체 위로.

한 개의 실선이 그어지고.

두 개의 실선이 그어지고.

세 개의 실선이 그어지고.

이어 양손으로 세기 힘든 수의 실선들이 빠르게 저 거대한 군집체 위로 그어진 후, 그 모든 선에서 가늠하기 힘든 살기(殺氣)가 그대로 터져 버리는 모습을.

“(·········저게 뭐야.)”

“(·········다들 칼이나 들어.)”

허공에서.

“(아무래도, 곧 쏟아질 것 같으니까.)”

사지가 잘린 오타쿠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린다.

* * *

사방에서 조각나 쏟아지는 오타쿠들을 보면서, 창규는 여전히 검을 휘두르는 박자를 줄이지 않았다. 본디 완전한 합공(合攻)은 같은 호흡을 바탕으로 하는 것.

그는 단지 등 뒤에서 함께 낙하하는 하루의 호흡에 집중할 뿐이었다.

━━━━━━스걱!

━━━━━━스걱!

━━━━━━스걱!

피로 목욕한 듯 붉게 젖은 전신.

뜨거워진 근육은 비명을 내지르고, 입 밖으로는 핏기가 담긴 붉은 김이 새어 나오고, 사방에서 분수처럼 터지는 핏물에 시야가 가려지기까지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 허, 이게 되네.

천마의 중얼거림조차 희미하게 들릴 정도로 정신이 고양된 상태였으니까.

- 나도 생각만 했던 거거든. 뭐, 세상천지에 나랑 합을 맞출 수 있는 놈 자체가 없었으니···.

파천검법의 합공.

비록 아류라고는 해도, 같은 결을 가진 초식의 사용자와 검을 겹친다는 건 여태까지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또한 그건, 창규뿐만이 아니라 하루 역시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타닥.

타닥.

피투성이가 된 눈밭 위로 착지해 고개 돌린 창규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하루를 볼 수 있었다.

“(어때.)”

“(······.)”

하루의 뒤로, 아직 목숨을 부지한 오타쿠들이 안광을 빛내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베이는 순간 재빠르게 대열을 흐트려 사방으로 경공을 펼쳐 목숨을 부지한 오타쿠들.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창규가 다시 칼을 들었을 때.

“(가지 마.)”

하루가 그를 막았다.

“(이제, 쟤들 정도는 우리 애들도 막을 수 있어.)”

말 그대로다.

이미 이 주위에는 오타쿠들이 떨어져 내리길 바라던 하루의 조직원들이 우글거리는 상태. 그들에게 있어서, 부상까지 당한 채 산개하여 떨어져 내린 오타쿠들을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

“(그것보다, 말해.)”

“(뭘.)”

눈에 띄게 약해진 오타쿠들의 기세.

다시 하루와 창규를 덮치려는 그들과, 놈들을 향해 쏟아지는 조직원들의 괴성.

고개 한번 돌리지 않은 채 뒤편에서 들리는 그 소음들을 감상하던 하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그는,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이었다.

“(말했잖아. 난 복음을 직접 듣는다니까.)”

“(말도 안 돼. 정말로, 네가 ‘그분의 복음’이 듣는다고?)”

“(직접 느끼지 않았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단 몇 마디 조언으로 오랜 기간 성취가 없던 자신의 자세가 교정된 것도 모자라, 여태껏 단 한 번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 양 검의 합일을 이끌어냈으니까.

“(여태까지 네가 쓰던 건 전부 엉터리야. 방금 너와 내가 펼친 게, 진짜 참하늘의 검이라고.)”

“(그러니까···.)”

“(그래. 바로 나, 백창규가 그분이 내린 진정한 사자다.)”

“(······.)”

고개를 갸우뚱하며 뭔가를 고민하는 듯한 하루를 향해, 창규가 입을 열었다.

“(이번엔 내가 묻지.)”

그 역시 궁금했다.

분명 김두광의 말에 따르면, 세계에 퍼진 참하늘주님성회의 3가지 계파를 이끄는 대장로들은 모두 복음을 듣는 자들이라고 했다. 이 하루라는 놈은 그중 ‘의리’ 계파를 이끄는 대장로.

“(하루 너는, 복음을 들을 수 있나?)”

분명 천마와 소통하는 것은 자신뿐인데, 그렇다면 이 대장로란 놈들이 듣는다는 복음은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 그래. 그러고 보니 저번부터 궁금했었어. 내가 지금 여기 있는데 저것들은 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다니는 거야?

천마 역시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하루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정말로···? 하지만 신탁에서는··· 아니야, 그래도 방금 그건 분명···.)”

“(중얼대지 말고, 똑바로 얘기하라고!)”

창규의 일갈에, 하루가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으려 할 즈음에.

“(나는···.)”

“(끄아아아아아-!)”

문득, 뒤편에서 소름 돋는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심상찮은 살기가 파도처럼 이쪽을 덮친다.

“(하, 하루 상!)”

시선을 돌린 하루와 창규에게 곧바로 보인 건, 눈밭을 녹이는 피가 만들어 낸 흥건한 웅덩이와 군데군데에 동산처럼 쌓인 오타쿠의 시체들. 중요한 대화를 방해받은 하루가 순간적으로 인상을 팍 구겼으나.

“(저, 저쪽을 보십쇼!)”

좀 더 멀리, 삿포로의 외곽 쪽으로 시선을 던진 그의 얼굴빛은 분노로 바뀌었다.

━━━━━콰직!

저 멀리서부터 총알처럼 쏘아진 암기.

지금은 시체가 되어 버린 저 오타쿠들이 던지던 그것과는 달리, 하나하나가 공기를 찢을 정도의 기파(氣波)를 자랑하며 하루 쪽 조직원들의 머리를 하나하나 터뜨리는 가운데.

“(············!)”

희미하게, 피 안개를 두른 고수 하나가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스다! 스다 놈입니다!)”

“(이런 망할!)”

곧바로 칼을 거꾸로 쥔 채 경공을 펼치는 하루.

- 하이고, 타이밍 참 좋네.

창규 역시 주저하지 않고 그를 따라 경공을 펼쳤다. 아직 그는 참하늘주님성회의 대장로인 하루에게 정체 모를 복음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한 상태. 거기에 더불어 천마를 봉인했던 만형진법의 전달자를 찾기 위해서는 그의 힘을 빌려야 하는 지금.

‘하필 지금···.’

갑자기 나타난 저 스다 마사오와 하루 사이에 일어나는 싸움에서 하루를 도와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스다, 저 개 같은 새끼가!)”

“(답은 이후에 들어야겠군.)”

“(뭐야, 넌 왜 따라···.)”

“(지금 고개 돌릴 여유 있어?)”

한데 이상했다.

파파파팟-!

분명 생사결(生死決)이라도 벌일 기세로 나타났던 스다 마사오가, 정작 자신과 하루가 칼을 쳐들고 따라가자 다시 고개 돌려 도망가고 있지 않은가.

“(어이! 스다! 도망가는 거냐, 이 비겁한 새끼야!)”

사자후를 터뜨리며 스다를 따라 삿포로로 진입하는 하루. 역시 그를 쫓아 경공을 펼치던 창규는, 곧 자신의 전신을 휩싸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뭐야, 이거.’

사방에서 불길이 넘실거리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가득한 삿포로의 외곽 지대. 도로마다 뒤집힌 차량들과, 쓰러진 가로등과, 무너진 벽이 가득한 대로변.

또한, 경공을 펼치는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도심 내에서의 전투. 밖에서는 미처 보지 못했던 수많은 오타쿠들과 제복 입은 경찰 병력들과의 싸움들과, 도심 곳곳의 건물 위로 솟구쳐오르는 예의 회오리들.

파파파팟-!

뿌득 이를 깨문 채 그 위로 하루를 따라 경공을 펼쳐가던 창규는, 문득 깨달았다. 아까부터 자신을 덮친 위화감은, 이 끔찍한 도시 속의 지옥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 잠···깐···.

지금 창규가 느끼는 위화감은,

- 저··· 새끼야··· 저 새끼라고··!

여태껏 본 적 없는 태도로 몸을 떨기 시작한 천마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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