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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림 견문록-114화 (114/150)

114화.

스케치북이 넘어가듯 눈 덮인 거대한 들판이 바닥째 수직으로 뒤집힌다. 밤하늘 위로 팝콘이 튀겨지듯 솟구치는 오타쿠들을 보며, 창규가 입가에 호를 그렸다.

‘천마군림보.’

이건 평범한 군림보가 아니다.

‘·········진(眞).’

몇 달 전 삼일 타워 앞에서 횡단보도를 뒤집었던 ‘진짜’ 군림보. 땅을 매개로 지면 위의 적들에게 내공을 흘려 터뜨리는 평소의 군림보와 달리, 이건 지면 자체를 통째로 진탕시켜 뒤집는다.

- 오호. 벌써 반지 써먹는 노하우를 익힌 거야?

천마의 약혼반지.

삼일타워 앞에서 한계를 뛰어넘는 군림보를 쓰게 만든 게 기폭환이었다면, 지금 이를 가능케 한 건 한기(寒氣)가 깃든 이 반지다. 눈보라를 흡수해서 하얗던 반지가, 이젠 투명한 은빛으로 변해 있다.

눈을 감은 창규.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그의 피부에 문신처럼 내려앉는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공격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렘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 근데 이번 건 거의 다 썼네. 이건 일종의 빙공(氷功) 주머니라서, 아까 거기서 더 오래 흡수를 했다면···.

더 이상의 말은 들리지 않는다.

전신세맥에 스며든 냉기.

악문 치아 사이로 연기처럼 새어 나오는 하얀 숨.

반지에 흡수된 눈의 기운이 단전에까지 맞닿은 순간!

“············후.”

눈을 번쩍 뜬 창규가 땅을 박차고 오른다.

쩌━━━━━ㄱ!

발끝에서 터진 눈바람과 함께 솟구친 신형.

땅바닥이 순식간에 멀어지고, 떨어져 내리던 함박눈이 좌우로 휙휙 지나간다.

밤하늘에 그어진 일직선.

하얀 달 아래, 오타쿠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눈깜짝할 새 그 사이로 도약한 창규.

파리 떼처럼 전신의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던 놈들이 병장기를 꼬나쥔 채 악다구니를 지르고 있다.

“━, ━━, ━!”

“━━━━!”

“━━━, ━━━!”

광기(狂氣)로 반짝이는 수백의 동공들.

아득한 수의 병장기들과 눈빛에 반사된 무수한 달빛이, 사방팔방에서 유성우처럼 쪼개져 쏟아지는 가운데.

- 잠깐만.

보인다.

- 이것들,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는데.

인천에서 마주한 혈강시들처럼, 낙하하는 와중에도 경공을 펼쳐 대열을 맞춘 채 암기를 투척하려는 오타쿠들의 기묘한 움직임이. 거대한 군집을 이루어 바다를 활보하는 물고기떼처럼(Fish Ball), 놈들은 하나의 거대한 의지를 품은 채 움직이는 듯하다.

빠직.

빠직.

머리털과 전신 체모가 바짝 선다.

폭풍의 눈에 들어간 것처럼, 사방팔방에서 휘몰아치는 농밀한 살기(殺氣)의 회오리가 몸을 찌르는가 싶더니.

피핏-!

볼에 붉은 선혈이 새어나온 걸 시작으로, 수많은 암기들이 창규를 향해 빗방울처럼 퍼부어진다.

표창, 장침, 비표, 수리검, 단도···.

시야가 암전될 정도로 쏟아지는 각종 날붙이들의 폭우(暴雨).

핏, 피핏! 피피피핏!

피부를 아슬하게 스치는 물량 공세.

회피할 수 있는 공간이 한계까지 줄어든 순간, 창규가 흡수한 냉기를 칼자루에 흘린다.

꽈득.

칼날에 와사삭 끼는 하얀 서리.

이건, 인천에서 받아쳤던 혈교 제사장의 음파(音波) 대신 창규의 검격을 원거리로 전달할 매개체가 될 것이다.

‘·········검기(劍氣).’

당시의 감각을 떠올린 창규가 허공에서 몸을 비튼다.

콰콰콰-!

막무가내로 쏟아지던 암기들이, 점점 오와 열을 갖춰 거대한 원형의 구(球)를 이뤄 창규를 덮치기 시작했을 때.

스걱━━━!

비로소 뿌려진 창규의 일검(一劍).

피부를 스치던 날붙이들이 깔끔하게 베인 걸 시작으로, 근접거리까지 날아 온 암기들이 터지고 박살나기 시작했지만.

쨍강, 쨍강!

콱! 콰지직!

아직 멈추지 않은 창규의 검격은, 하얀 냉기를 탄 채 멀리서 암기를 쏟아 내는 오타쿠들을 향해 퍼져나간다.

창규를 중심점으로 퍼지는 은빛 동심원.

그러모은 빙기(氷氣)를 매개로 던진 검격이, 파문처럼 번지며 창규를 향해 쏟아지는 암기의 폭풍을 걷어 냈을 때.

‘·········된다!’

웃음 지은 창규가, 전신을 회전하며 본격적인 초식을 펼친다.

창천일로.

회전 공격에 특화된 이 초식에서 뿌려지는 모든 검격이, 희뿌연 검기의 고리를 사방팔방에 퍼뜨린다.

스걱━━━!

스걱━━━!

스걱━━━!

한 줄, 그리고 또 한 줄.

띠를 이룬 은빛 파문들이 밤하늘에 번진다.

쏟아지던 수백의 암기들이 파공음과 함께 걷히기 시작한다.

“(━━━, ━투하!)”

“(━! ━! ━발생!)”

“(━━크아아아아!)”

저 멀리서, 암기 투척을 중단하기 시작한 오타쿠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당황한 듯한 녀석들이 암기를 던지는 전략을 수정해 진열을 바꾸는 듯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 어때? 그게 빙공(氷功)을 다루는 기초 감각이야.

시원하다.

반지에 흡수된 눈보라를 검으로 전달할 때마다 전신에 퍼지는 얼음 같은 느낌이.

- 속성 무공은 내가 선호하는 쪽은 아니긴 한데··· 뭐, 어차피 무(武)의 끝을 보려면 이것저것 다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짜릿하다.

냉기 서린 검기를 날리는 동안 전신세맥을 떨리게 하는 이 살얼음 낀 듯한 감각이.

- 야, 뭐 해?

슬쩍 고개를 든 창규.

순간 그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폭풍우처럼 쏟아지던 암기들이 전부 걷힌, 각기 다른 박자로 경공을 펼쳐오는 저 오타쿠들이 점점이 박힌 저 밤하늘 위로.

시리도록 하얀 달이 떠 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천마는, 저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가리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찢고 찢다가 하늘마저도 찢어 버린 것이 아닐까. 이미 그는, 세상 모든 걸 검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역에 발을 디뎠음을 실감했다.

“·········저게 참하늘이지.”

- ·········미친놈.

실없이 낄낄거린 창규가 다시 칼을 잡는다.

- 그보다 슬슬 조심해라. 이제 검기는···.

“알고 있어요.”

이미 알고 있다.

천마의 약혼반지에 흡수되어 있던 냉기가 모두 사라진 지금, 직접 병장기를 꼬나쥔 채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오타쿠들에게 더 이상 검기를 쓸 수 없다는 것쯤은.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 알긴 뭘 알아? 저 새끼들, 확실히 그때 봤던 혈강시들보다 더 이상해. 양도 양이지만, 저놈들은 검법을 배운 놈들이야.

어느새 다시 밤하늘을 메운 오타쿠들.

한 마리의 말벌을 질식시키기 위해 모여드는 꿀벌들처럼, 어깨를 붙인 채 각종 병장기를 직접 부딪히며 경공을 펼쳐오는 적들이 낙하하는 가운데.

- 혼자 전부 상대하려면···.

“혼자라뇨.”

그 한참 아래에서.

“쟤 눈깔 뒤집어진 거, 안 보여요?”

참하늘에 미친 광신도가 칼을 짓쳐드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으니까.

* * *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설원(雪原) 위.

멀리 삿포로의 마천루들을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 같은 광경을 보던 하루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

저 백창규라는 놈.

처음 마주쳤을 때는 크게 위험해 보이지 않았던 놈이, 진각 하나로 스다 쪽 조직원들이 득시글대던 들판을 통째로 떼어 낸 동시에, 밤하늘 위에서 십수 발이 넘는 강력한 검기를 사방천지에 터뜨려댔다.

그렇다는 건.

“(·········저게, 저 정도의 유물이었다고?)”

놈이 찾아 낸 구향회 반지, 아니, 참하늘주님께서 남기신 유물의 위력이 그만큼 상상을 초월한다는 얘기다.

뿌드득!

이를 간 하루가 역수로 칼을 쥔다.

자신이 그토록 오래동안 구향회에 적을 둔 채 대장로 생활을 한 모든 이유가, 동시에 참하늘주님성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핵심 성물(聖物)이, 저 백창규라는 놈에게 있다.

“(·········백창규.)”

대체 저놈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 계파를 책임지는 대장로라는 직책은, 믿음조차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자리. 참하늘주님성회와 어떻게든 얽혀 있는 놈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녀석이 ‘그분’의 복음을 듣는다는 얘기만큼은 무조건 맹신할 수 없다.

“(됐다, 이건 나중에 생각해도 돼.)”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낸 하루의 눈앞에, 밤하늘을 덮은 오타쿠들이 보인다.

낙하하는 와중에도 서로의 전신을 디딤발 삼아 사방팔방으로 경공을 펼친 녀석들이 만들어 낸 거대한 공 모양의 형상. 현대 건축물 같은 거대한 크기만 제외하면, 마치 사냥감을 덮친 개미떼 같은 모습인데.

“(얘들아.)”

지금 중요한 건, 저들이 사냥감으로 감싼 백창규를 빼 오는 일이다. 스다 쪽 조직원들에게 녀석이 가진 반지를 빼앗기는 건 당연히 원치 않고, 녀석이 진짜 참하늘주님의 복음을 받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확인해 봐야 하는 지금.

“(백창규 저놈 건지러 가자.)”

“(오쓰-!)”

“(오쓰-!)”

“(오쓰-!)”

하루의 선창에 답한 조직원들이, 그를 따라 허공으로 경공을 펼쳐 오른다. 내공이 앞서는 조직원은 약한 자들의 디딤돌이 된 뒤 경공을 펼치고, 약한 이들은 그 상황에 맞춰 서로의 어깨를 밟고 경공을 펼치는 게, 이런 상황에 퍽 익숙한 듯했다.

후두두둑-!

저 거대한 대열에서 백창규의 칼에 맞아 낙하하는 오타쿠들. 저것들은 또다시 디딤돌이 되어 하루와 조직원들이 경공을 펼칠 수 있는 상승 계단이 되어 준다.

파파파팟-!

하얀 달을 배경으로 솟구친 하루의 조직원들.

달빛을 받아 반짝이던 그들의 칼끝이, 어느새 백창규를 감싸고 있는 오타쿠들의 군집체에 향했을 때.

“(뭐 해, 싹 다 죽여!)”

“(오쓰-!)”

“(오쓰-!)”

“(오쓰-!)”

비로소 바깥을 지키던 오타쿠들과의 칼부림이 이어진다.

베고.

베고.

베고.

흩날리는 함박눈 사이로, 진득한 혈향(血香)에 병장기가 부딪히는 매캐한 탄내가 흠뻑 젖을 무렵.

쿨럭!

칼에 꽂힌 시체를 뒤로 뽑아 던진 뒤 오타쿠들의 대열 안으로 진입한 하루는, 곧 피를 흠뻑 뒤집어쓴 창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봐, 백창규!)”

“(어, 좀 늦었네?)”

마치 술 약속에 늦은 친구를 대하는 듯한 대수롭지 않은 말투.

칼과 도끼는 물론, 사슬낫, 창에 언월도까지.

사방팔방 좌우앞뒤에서 오타쿠들이 꼬나쥔 병장기들이 숨 쉴 공간 하나 없이 자신을 노리는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왔음에도, 하루는 역시 태연자약하게 창규를 바라볼 뿐이었다.

푸슉-!

푸슉-!

세뇌라도 된 것인지, 각자가 쥔 냉병기가 서로의 몸통과 사지를 꿰뚫어도 아무렇지 않게 하루와 백창규를 다시 에워싸는 오타쿠들 가운데서.

“(반지 내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칼 던져 백창규의 뒤를 노리던 오타쿠의 머리통을 뛔뚫은 하루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연다.

“(남의 물건 도둑질하고 모른 척 하기냐?)”

“(남의 물건이라니.)”

이번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루의 다리를 베려는 오타쿠의 언월도를 자른 창규가 어깨를 으쓱한다.

“(이게 왜 네 물건이야. 엄연히 주인이 있는 물건인데.)”

“(너, 그 주인이 누군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물론.)”

사방으로 떨어져나가는 팔다리와 살점, 내장이 만들어 내는 피비린내. 그 모든 것들이 모이는 오타쿠들의 한가운데서. 쇄도하는 오타쿠 하나의 머리에 권을 박은 뒤 들고 있던 칼을 뽑은 하루가, 빠르게 창규의 앞으로 도약한다.

“(참하늘주님의 유물, 아냐?)”

“(·········건방진 새끼.)”

어느새 마주한 창규와 하루.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인 그 둘이, 반대편으로 등을 돌린다.

턱.

등을 맞댄 뒤.

쏟아지는 오타쿠들의 살의를 마주하며 칼을 쳐든 그 둘 사이에서.

“(그분의 복음을 듣는다는 말, 진짜냐?)”

“(직접 확인해 보던가.)”

“(거짓말이면 넌 여기서 죽는다.)”

“(사실이면.)”

“(그럼.)”

본격적으로, 참하늘주님을 향한 믿음의 경쟁이 붙었다.

“(뭐, 대장로직이라도 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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