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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림 견문록-113화 (113/150)

113화.

삿포로 외곽의 한 스낵바.

가장 먼저 기묘함을 느낀 건, 바에 앉아 의자를 톡톡 두들기던 한 중년의 여성이었다. 데낄라 한 잔 내 오는데 30분이라니. 날이 갈수록 가게의 컨셉이 심해진다고, 그가 막 생각한 참이었다.

“(주문한 건 대체 언제쯤 나오려나.)”

“(잠시, 대기 요망.)”

“(호세 쿠엘보가 그렇게 희귀한 술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비상 상황이니 재촉 금지.)”

“(······비상 상황까지 갈 정도야?)”

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리는 손님.

그녀의 앞에서 배불뚝이 바텐더가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특유의 안경과 머리띠를 착용한 오타쿠 바텐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선반과 진열대를 뒤지는 그를 향해, 손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호호. 내가 오늘 아주 찾기 힘든 술을 주문했나 봐?)”

“(추가 대화는 곤란하다.)”

“(뭘 그렇게 바쁜 티를 내. 뭐, 나 모르는 추가 주문이라도 들어온 거야?)”

“(당연.)”

“(지금 여기 나 말고 주문한 손님이 없는데 무슨 소린지.)”

“(있다.)”

“(뭐, 이 술집은 배달 주문이라도 받나?)”

“(······.)”

대단한 농담이라도 건넨 듯 킬킬거리는 중년의 손님.

그녀도 이 농담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스다 상의 주문이, 들어왔다.)”

“(······스다 상?)”

그렇다.

이곳은 스다 마사오의 직영 술집.

어쭙잖은 야쿠자들은 얼씬도 하지 못하는 이 술집은, 스다의 직속 조직원이 운영하는 업소. 눈앞의 오타쿠가 경비에, 바텐더에, 바지 사장 노릇까지 하는 이곳이 이 근방에서 큰 인기가 없다는 사실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흐으음.)”

분주하게 움직이는 오타쿠의 터질 듯한 셔츠 위로 벌써 땀이 흥건히 배인다. 누군가는 저들의 모습이 흉물스럽다고, 누군가는 술맛 떨어지게 왜 저런 오타쿠들을 업소 일선에 내세우냐고 말들이 분분했지만, 그녀는 그런 의견들에 동의하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네. 스다 상이 배달 주문을 시켰다고?)”

특이취향을 가진 그녀에게 있어서, 유흥가도 아닌 이 도시 외곽에서 저런 육중한 몸집을 가진 바텐더를 만나는 건 축복이었으니까.

슬쩍 일어나 바 위로 몸을 숙이는 그녀.

구향회의 최상위 간부가 대체 왜 이런 목도 안 좋은 외곽 지역에서 직영 술집을 운영하는지에 대해서는 수많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찌됐든 괜찮은 밤의 파트너를 만난 그녀로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 그 주문은 언제 끝나?)”

“(찾았다.)”

“(뭐야. 피규어 배달이었어? 이건 배달하면 안 되는 거 아냐?)”

“(배달은 아니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바 건너편에서 몸을 일으킨 오타쿠의 손에 들려 있던 건 회색 먼지가 뒤덮인 여고생 피규어. 귀한 보석이라도 바라보듯 피규어를 이리저리 바라보는 오타쿠를 향해, 픽 웃으며 바 너머로 고개를 뻗은 그녀가 은밀하게 귓속말을 속삭인다.

“(뭔진 몰라도, 축하해. 그나저나, 어때? 오늘 밤도 영업 끝나면 저번처럼 우리 집에서···.)”

“(쉿.)”

한데 뭔가 이상하다.

평소대로라면 뜨거운 콧김을 뿜으며 바보 같은 반응을 보일 저 오타쿠가,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뭐야, 그 눈빛은?)”

“(오늘.)”

“(나랑 놀기 싫어? 오늘따라 이상하···.)”

“(스다 상의 주문呪文대로.)”

“(지금 무슨···.)”

“(천지가, 개벽한다.)”

오타쿠의 눈에서 광기(狂氣)가 번쩍이고.

우직-!

그 두툼한 손 안에서 부스러지는 여고생 피규어를 보았을 때, 그녀의 목 뒤에 소름이 돋는다. 바 위로 떨어져 내리는 피규어의 새하얀 먼지로부터, 말 못할 위화감이 든다.

“(············!)”

문득 참을 수 없는 살기(殺氣)를 느낀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바 옆에 놓여 있던 펜을 들어 오타쿠의 목을 찌른다. 푸슉 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오타쿠는 낯빛 변화 없이 건조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스···다···상. 스···다···상···.)”

“(그, 그만!)”

아무렇지도 않게 목에 박힌 펜을 빼내어 자신의 전신을 난자하기 시작하는 오타쿠. 전신에서 솟구치는 붉은 피 위로, 피규어의 하얀 먼지가 구름처럼 떠다니기 시작했을 때.

오타쿠의 전신이, ‘부숴지기’ 시작한다.

“(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

“(이런 미친!)”

“(꺄아아악-!)”

“(저, 저게 뭐야-!)”

그제야 뒤편에서 터지는 손님들의 비명과 함께, 그녀 역시 소리를 지르며 황급하게 몸을 일으켰지만.

“(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스다상···.)”

“(끄아···!)”

그녀의 비명은 끝을 맺지 못했다.

등 돌린 자신의 뒤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림과 함께.

콰직-!

피투성이가 되며 부서지는 오타쿠의 주변에서, 그녀는 물론 가게의 지붕마저 찢어발길 만한 칼바람이 터져나왔으니까.

콰콰콰콰콰콰-!

* * *

구향회의 귀환선.

경찰 쪽의 무선이 연결된 회선에서, 이 사태를 마주한 경찰 인력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 (비상! 히가시구 외곽에서 이상 현상 있음!)

- (홋카이도 신궁 위로도 발견!)”

- (시코쓰토야 국립공원 후면 쪽으로 지원 요망!)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원로들.

홋카이도 경찰 본부에, 비상이 걸렸다.

이 비상사태의 원인이 스다 마사오라는 사실은, 이미 그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스다 녀석, 지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거야.)”

자폭(自爆).

적게 잡아도 500군데가 넘는 스다의 구역에서, 하늘 위로 터져 나온 칼바람이 건물과 도로를 파괴하고 있는 지금. 그 하얀 회오리가 솟구치는 지역에, 하루 쪽 조직원들은 없다. 그 말인 즉, 지금 스다의 수하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도시를 부수고 있다는 이야기.

“(나름의 작전 아냐?)”

“(헛소리! 도시를 박살내고 민간인한테 피해를 주는 게 작전이라고?)”

“(저건 차기 회장을 떠나, 구향회의 간부로서도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야.)”

자신이 관리하는 나와바리의 민간인들을 죽이는 건, 비단 구향회뿐만이 아닌 하급 야쿠자도 금기시하는 행위.

지금, 스다 녀석은 선을 넘었다.

구향회의 회장은커녕 무림인으로서도 실격. 이쯤해서는 원로들이 직접 개입해야 하는 사건이다.

“(분쟁 구역에 배치한 경찰조차 죽었어.)”

“(인의人義를 저버렸으니 우리도 어쩔 수 없어.)”

“(구향회의 탕아는, 구향회에서 수습하는 게 원칙.)”

귀향선의 갑판 위로 올라간 원로들.

쏟아지는 눈송이가 지그재그로 움직일 정도로 우렁찬 함성이 울려 퍼진다.

“(오쓰-!)”

“(오쓰-!)”

“(오쓰-!)”

고개 숙여 원로들을 맞이하는 구향회 간부들. 하나하나가 수십이 넘는 조원들을 이끄는 베테랑 고수들이 원로들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퍼엉-! 퍼엉-! 퍼엉-!

그들이 서 있는 난간 너머로, 삿포로의 하늘 위로 수십 수백 개의 눈기둥이 도시 위로 용오름치고 있다. 하필이면 도시의 요충지마다 조직원들을 박아 넣었던 스다 쪽 나와바리들. 그 모든 게, 설마 지금의 테러를 위한 것이었을까.

“(······.)”

“(······.)”

물끄러미 이를 바라보던 원로들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 저런 테러를 벌이고 있는지, 따위의 물음은 이제 소용없다. 하루와 그 조직원들이 홋카이도 북부로 올라간 지금, 저 회오리 주변의 민간인들이 얼마나 죽어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 말은 하지 않겠다.)”

홋카이도의 강호를 대표하는 고수들이 내려야 할 결정은 뻔했으니까.

“(구향회 전원.)”

일반인에게 칼을 돌린 괴물들의 처단.

그 하나의 목표 수행을 위해.

“(현 시간부로, 스다를 잡는다.)”

삿포로의 하늘로, 구향회의 칼 든 무인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 * *

인산인해(人山人海).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오타쿠들의 암기를 헤치며, 하루와 창규를 선두로 한 무림인들은 지금 눈 덮인 설산을 내달리고 있다.

“(다 죽여-!)”

“(재수 없는 오타쿠 새끼들, 이 판에 다 죽는다!)”

“(크하하하하-!)”

설산의 하얀 능선 위로, 빨간 핏줄기와 함께 부서진 뼈와 살점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칼과 표창이 만든 불꽃이 비산하고, 절벽 곳곳에서 괴성을 외치는 오타쿠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후욱, 후욱.)”

창규를 의식하며 선두 경쟁을 벌이던 하루가 숨을 몰아쉰다.

“(뭐야, 벌써 지쳤어?)”

“(···헛소리하지 말고 길이나 뚫어.)”

결과만 보면 좋은 타이밍이었다.

저 백창규라는 놈이 차지한 반지를 발견했을 때, 구향회 본부로의 복귀를 요청하는 원로들의 연락이 온 건.

스다가 홋카이도 전역에서 테러를 저지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 저 자식은 자신과 함께 행동하기를 자처했다.

“(더 빨리 움직여! 그 스다라는 새끼, 네 적 아니야?)”

“(···알았으니까 재촉하지 마.)”

확확 뒤로 밀려나는 설산의 풍경에, 백창규의 칼에 베여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오타쿠들의 모습이 더해진다.

‘(······확실해. 이놈은 지금 나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니다.)’

녀석이 적인지 아군인지도 확신할 수 없던 시점에서, 백창규가 자신과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건 하루에게 적잖은 안도감을 준다.

‘(······근데, 대체 이 새끼는 뭐지?)’

다만 의문은 거둘 수 없다.

어떻게 ‘그’ 검법을 쓰는지, 어떻게 ‘저’ 반지를 얻었는지, 어떤 목적으로 괴산파의 간부라는 저놈이 이 홋카이도에 온 것인지. 묻고 싶은 건 한둘이 아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콰콰콰콰-!

흥건한 핏빛 비를 뚫고 설산의 능선을 내려온 지금.

멀리 삿포로 외곽의 아파트가 담긴 하늘 아래. 눈 덮인 드넓은 평야 위로,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수의 오타쿠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고 있었으니까.

“(저것들 뭐냐? 삿포로에서 올 때는 저 정도 수가 아니었는데, 뭐, 땅에서 솟구치기라도 한 건가?)”

창규의 물음에도 하루는 대답할 수 없었다.

많아도 너무 많다.

여태 자신이 이 도시를 오가는 와중 봤던 오타쿠 무림인들의 수는, 분명 저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 땅에서 솟기라도 한 거야?)’

또한, 인원만이 문제가 아니다.

마치 자신의 경로를 예측하기라도 한 듯, 일부러 자신을 유인하기라도 하는 듯, 기묘한 위화감이 스멀스멀 자신의 몸을 덮었기 때문이다.

“(뭐, 상관없지.)”

“(잠깐.)”

“(걸리적거리면 다 부수고 가는 게 참하늘의 미덕 아냐?)”

“(뭔가 이상해.)”

넉넉잡아도 이백 명은 훌쩍 넘어간다.

하얀 눈밭 위로,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녀석들의 병장기를 본 하루가 손을 들어 올려 뒤따라오는 조직원들의 발걸음을 멈췄을 무렵.

“(뭐야, 쫀 거야?)”

“(닥쳐. 함정일 수 있으니···.)”

“(푸핫.)”

스다가 만든 전선 너머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창규의 다음말에, 하루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걱정마. 난 그분의 복음을 듣거든.)”

“(············뭐?!)”

“(눈 똑똑히 뜨고 잘 봐.)”

그가 천천히 들어 올린 발을 돌연 힘차게 내리찍었을 때, 그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바로.)”

━━━꽝!

“(참하늘의 진정한 메시아다-!)”

단 한 번의 진각.

그 어처구니없는 발울림에, 오타쿠들을 담고 있던 눈밭이 마치 장기판처럼 뒤집혀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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