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새하얀 조명이 가득한 넓은 연구실.
검은 천이 덮인 유리관들이 오와 열을 맞춰 가득한 가운데. 대리석 복도를 걷는 이를 향해 저 멀리서 누군가의 불만스러운 투덜거림이 울려퍼졌을 때.
“만형진법의 파장?”
만형진법(萬形陣法).
인류 역사상 가장 강했던 인간을, 구 무림의 자연지기와 함께 만년빙정에 봉인했던 고금제일의 진법. 북해빙궁의 배신과 함께 천마를 잡아넣었다는 구 무림 최고 진법의 파장이, 방금 감지됐다.
“어디서?”
“일본, 홋카이도.”
“흠, 이번 심부름꾼은 얼마 못 버텼네.”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예상했다는 듯, 가운 주머니에서 명찰 하나를 꺼내 쥐었다.
[ 스다 마사오 ]
일본에 파견했던 심부름꾼.
만형진법의 완벽한 복원을 꾀하기 위해 보냈던 그 사자(使者)가, 떡고물에 한눈을 팔고 있다는 신호가 잡힌 것이다.
“그 천마의 힘이라는 게, 그렇게 탐이 나나?”
“난 이럴 줄 알았어.”
“오타쿠 출신이라 참을성이 많을 줄 알았지.”
“원래 총을 주면 과녁부터 찾는 게 인간 본성이야. 통계에 기반한 만국 공통의 현상이라고.”
피식 웃은 여자가 스다 마사오의 이름이 적힌 명찰을 좍좍 찢었다.
만형진법의 100% 구현을 위한 데이터 수집.
원래 녀석이, 이 그룹의 일원으로서 홋카이도에서 추구해야 할 일은 이것 하나뿐이었다.
“스다가 복원한 게 어느 정도랬지?”
“지표만 보면 이제 한 50%.”
“이해가 안 돼. 조금만 더 버티면 정식 멤버로 삼아 준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그새를 못 참아서 배신을 택하는 게···.”
“어쩔 수 없지.”
“아무리 그래도, 고작 50%밖에 복원이 안 된 진법을 벌써 가동한다고? 그것도 우리의 규칙도 저버리고? 홋카이도가 도시째 망가질지도 몰라.”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거 아냐?”
“아니! 내 소원은 무림을 박살내는 거지, 세계멸망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
“어쨌든.”
가운을 펄럭이며 걷던 여자가 유리관 앞에 우뚝 선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스다 마사오의 배신도, 오무답문 중 하나라고 불리는 그들의 괴팍한 목표 따위도 아니었다.
“스다를 제거하겠다는 거잖아.”
“죽여 버려야지! 중요한 건 그딴 얄팍한 힘이 아닌 메시지인데, 그 벌레 같은 새끼가 감히.”
“지금 일본 근처에 있는 멤버가 누구지?”
“그건···.”
“어쩄든 그거야 알아서 하고.”
검은 천이 덮인 유리관.
천 아래로 배양액 안에서 보글거리는 거품이 보이는 지금, 그녀의 관심사는 단 하나뿐이었다.
“스다 녀석 죽이기 전에, 데이터나 가져오라고 해.”
“또 그놈의 데이터 타령이야?”
“맨날 말하잖아. 계량화된 수치가 없으면, 천마건 세계무림맹이건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어. 원래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라고.”
“하, 알았다, 알았어.”
수치와 데이터.
그녀에게 있어, 신 무림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과학뿐이었으니까. 스다 마사오라는 사자(使者)의 배신도, 오늘 이후 홋카이도에서 일어날 싸움도, 그녀에게는 더 큰 실험을 위한 재료에 불과할 뿐이라는 이야기.
화악!
그렇게, 탐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유리관을 탐욕스러운 표정으로 양 옆의 유리관을 쓰다듬던 그녀가 천을 걷어 냈을 때.
“그럼.”
유리관 안으로, 배양액 사이에서 기포를 뿜고 있는 무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슬슬 다음 심부름꾼을 골라 볼까.”
* * *
사방팔방에서 울리는 비명과 마찰음.
“(보일러실 쪽 습격이다!)”
“(옥상으로 와! 스다네 새끼들 여기 숨어 있어!)”
“(3층 복도로 집결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관광호텔 각층의 객실 곳곳에 모여 2차 습격을 준비하는 스다 쪽 조직원들. 그들을 잡기 위해 하루의 지시를 받은 부하들이 전원 호텔 곳곳으로 흩어진 가운데.
“(·········다시!)”
호텔 로비에 피어오른 먼지 사이에서, 또다시 칼을 짚고 일어난 하루의 호통이 울려 퍼졌다.
“(벌써 네 번째야. 아직도 모르겠···.)”
“(다시!)”
지겨운 표정으로 입을 여는 창규를 향해 광기 어린 안광을 내뿜는 하루. 벌써 초식의 빈틈이 4번이나 파훼당하고 반격을 맞았음에도, 그는 쉽사리 창규를 같은 교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듯했다.
“(김두광 몰라, 김두광? 나 한국 지부에서 네 얘기 듣고 왔다니까?)”
“(나름대로 우리 쪽 뒷조사를 했나보군.)”
“(아니, 내가 진짜···.)”
“(하지만 복음을 증명할 수 있는 건 칼뿐이다. 그리고, 자격도 없는 주제에 그분의 하늘을 사칭한 대가는 죽음이고.)”
“(후우.)”
“(다시 와, 이 불경한 새끼야!)”
피 묻은 머리칼을 쓸어올린 하루가 살기(殺氣)를 터뜨리며 다시금 창규를 향해 칼을 짓쳐든다.
확실히 대장로라 그런지 여간내기는 아닌 것 같은데.
- 하이고, 죽으려고 용을 쓰네.
하지만 죽여서는 안 된다.
일단 다른 수많은 이유를 차치하고, 창규는 저 하루라는 녀석의 도움이 필요했으니까.
‘녀석이 대장로라니 잘 됐어.’
놈을 같은 편으로 만들면 그 아래의 수많은 부하들이 따라온다. 만형진법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놈을 찾는 건 물론, 차기 회장으로 만들었을 때 홋카이도 전체 무림인들을 조력자로 둘 수 있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군.’
한숨을 쉰 창규가 심흔검을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렸다. 결국, 놈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초식의 파훼 정도가 아닌 완전한 파천검법의 시연이 필요하다.
“(삿된 놈, 감히 누구 앞에서···.)”
“(됐고.)”
진각을 밟자 쩍 금이 가는 바닥.
“(하! 복음도 모르는 주제에 우리를 따라하겠다고···.)”
“(잘 봐.)”
칼을 짓쳐든 뒤 앞으로 몸을 뉘인 후.
파천검법 제 1식, 창천일로.
호텔 로비에 자욱한 먼지 안개 사이로, 하늘마저 개어 버리는 검무(劍舞)가 터져 나온다.
“(이게 너희가 쫓는 하늘이다.)”
“(멍청한 새끼가···.)”
코웃음치던 하루의 표정이 변한다.
칼 너머로 보이던 창규의 신형이 순식간에 거리를 접혀 온 것이다. 그대로 칼 들어 맞부딪힌 하루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다.
“(············?!)”
쇠와 쇠가 부딪히며 생겨난 불똥 사이로 둘의 눈빛이 부딪힌 직후. 쌍방향에서 서로를 향해 회전하는 수차례의 연격(聯擊)이 터진다.
까앙-!
까앙-!
까앙-!
점점 밀리기 시작하는 하루.
파팟!
자신도 모르게 뒷발을 밟은 하루의 시선이, 이제야 검법을 펼치는 창규의 전신을 빠르게 훑는다. 디딤발의 위치, 전진하는 간격, 어깨와 팔꿈치의 각도를 스캔하는 그 시선을 본 창규가, 비로소 웃음을 지었다.
‘이쯤 되면 알겠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하루라는 놈은 천마를 신으로 여기는 사이비 종교의 대장로. 아류 검법조차 경전으로 모시는 녀석이, 그 모든 단점이 보완된 ‘진짜’ 검법을 직접 겪을 때의 반응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니까.
“(잠깐, 너···.)”
“(다음 초식 간다.)”
반대손으로 칼끝을 잡고 방어자세를 취한 하루에게 뛰어오른 창규가 가볍게 검을 흩날린다.
요천일로.
허초를 뿌려 시야를 어지럽히는 이 초식은 하루 역시도 익숙한 듯 보였지만, 그가 아는 것은 아류다.
피슉.
하루의 방어를 뚫고 들어간 창규의 칼날에 베인 팔뚝에서, 실처럼 가는 핏줄기가 어깨 위로 솟구쳤을 때.
“(············!)”
결국 검을 떨구는 하루.
“(·········뭐야.)”
“(뭐긴 뭐야. 너희가 그렇게 원하던 참하늘의 복음이지.)”
“(·········.)”
눈에 담겨 있던 광기와 살기는 이미 빠진지 오래다.
고개마저 떨군 채 멍한 표정으로 방금 겨룬 수를 복기하는 듯한 하루의 모습을 본 창규는, 자신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추기 시작했음을 확신했다. 하루는 지금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하다.
또옥-!
짧은 정적.
하루의 팔에서 핏방울이 떨어지는 조그마한 소리가, 칼끝을 내린 창규의 귀에 박힌 뒤.
“(·········.)”
“(·········.)”
허공에서 얽힌 두 사람의 시선.
서로를 향한 무언의 짐작과 정보가 교차하고 지나간 찰나, 먼저 입을 연 건 창규였다.
“(먼저 하나만 묻지.)”
묻고 싶은 건 산더미 같았지만, 지금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대장로는, 스다 마사오가 아니었나?)”
“(············스다?)”
“(김두광이 말해 줬어. 홋카이도 삿포로에, 아시아의 의리 계파를 총괄하는 대장로가 있다고. 난 그게 당연히 스다 쪽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슨 멍청한 소리야?)”
고개를 쳐든 하루.
창규의 정체에 대해 고민하던 그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얼룩져 있다.
“(스다라니. 그 놈은 참하늘의 세상에 무지한 새끼야. 대체 어떻게 이 검을 알았는지는 몰라도, 놈은···.)”
“(피규어.)”
“(그래. 그딴 수상쩍은 피규어나 뿌리고 다니는 의중 모를 새끼를 왜 하필···.)”
“(잠깐만.)”
문득 창규의 전신이 기묘한 위화감에 휩싸였다.
“(너, 그 피규어가 뭔지 몰라?)”
“(알아야 되나? 스다 새끼네가 아니더라도 유키하바라에 널리고 널린 게 여고생 피규언데.)”
하루는 스다의 피규어가 누굴 닮았는지 모른다.
뭔가 이상하다.
대장로가 천마의 얼굴을 모른다?
그리고, 스다가 대장로가 아니었다?
- 뭐야.
그렇다면 스다 마사오라는 놈은, 대체 어떻게 참하늘주님성회의 대장로도 모르는 천마의 얼굴을 본딴 피규어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 이 새끼가 범인 아니었어?
스파크처럼 연달아 튀는 의문점들.
떠오르는 의문점들을 빠르게 그러모은 창규가, 지금 가장 필요한 핵심적인 질문을 만들어 낸다.
“(참하늘주님성회의 대장로인 네가 여기서 칼부림을 하고 있는 거, 구향회의 회장직이 탐나서 그런 게 아니지?)”
“(갑자기 그건 또 무슨···.)”
“(이 반지 때문이잖아.)”
“(············!)”
창규가 활짝 펴 보인 손가락에 끼워진 천마의 약혼반지.
“(자, 잠깐만. 그 반지···.)”
털썩!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하루의 동공을 본 창규는 확신했다. 반지를 바라보는 놈의 눈에 경외심과 존경심이 서려 있다. 저 눈빛은, 천마의 신물(神物)을 대하던 김두광의 그것과 같은 결을 가지고 있다.
“(아, 아아···.)”
동시에, 직감이 들었다.
천마의 얼굴을 알고 있는 스다가 이 반지를 찾고 있는 이유 역시, 단순히 구향회의 회장 자리 따위를 탐내서만은 아니라는 위험한 직감이.
“(아아아아-!)”
“(일어나. 아직 할 얘기가···.)”
“(하루 상!)”
그때쯤 호텔 곳곳에서 하루 쪽 조직원들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크하하! 전부 정리했습니다!)”
“(나약한 것들, 다른 놈들은 심문 중에 전부 기절했습니다.)”
“(여기 오타쿠 새끼들만 남았습니다!)”
“(흐흐, 어차피 이제 거의 다 왔는데 마지막 정보만 얻으면 하루 상 원하시는 대로 되는 거 아닙니까?)”
털썩, 털썩.
로비에 떨어지는 두 명의 오타쿠.
“(마지막 심문은 하루 상께서 직접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것들 좀 보십쇼.)”
“(사실 저희끼리 보기 아까워서요.)”
뭔가 기묘했다.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서로를 꼭 껴안고 떨어지지 않는 두 명의 오타쿠. 나라의 국보라도 지키듯 그들이 감싸고 있었던 그것은···.
‘············피규어?’
천마 피규어였다.
“(하루 상! 하루 상께서 직접 심문을···.)”
“(다 됐어. 이제, 다시 돌아갈 준비해.)”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를 본 하루가, 창규를 향해 고개 돌리며 가만히 입을 열었을 때.
“(이미 반지 찾았다. 쓸데없이 낭비할 시간 없으니까···.)”
“(반지를.)”
“(찾았다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오타쿠들이 번갈아 입을 열더니,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드디어.)”
“(드디어.)”
동시에, 누가 말릴 새라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던 오타쿠들이 서로를 끌어안은 그 순간.
우지직-!
그 묵직한 뱃살에 부서져 버린 천마 피규어. 놈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지키던 물건을 왜 부섰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하얗게 바스라진 가루들이 오타쿠들을 감싸기 시작한 뒤.
콰콰콰콰-!
곧, 하루가 이전에 신사에서 봤던 하얀 회오리가 솟구쳐 올랐다. 놈들의 쓰고 있던 안경과 머리띠마저 산산이 부서지며, 칼바람 같던 하얀 회오리가 점점 거세지기 시작했을 때.
“(하루 상! 이건···.)”
“(뭐야.)”
하루는, 볼 수 있었다.
신사에서 보았던 그때와 달리, 오타쿠들이 먼저 스스로를 희생해서 피운 하얀 회오리.
콰콰콰콰-!
구멍 난 호텔의 1층 외벽 바깥으로.
“(저건···.)”
눈 날리는 홋카이도 곳곳에서, 방금 본 것과 똑같이 생긴 수십 개의 회오리가 펑펑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는 광경을.
“(······테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