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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림 견문록-108화 (108/150)

108화.

뚱보 무림인들 주위로 피어난 하얀 회오리.

우지끈 꺾인 기둥의 나무 조각들이, 사방에 가득한 눈송이와 함께 맹렬한 회전을 시작한다.

콰콰콰-!

바닥부터 일어난 세찬 눈발에 옷자락이 펄럭이고, 들썩이는 안경과 머리띠가 조금씩 부서지며 모래 같은 가루들이 허공으로 날아가지만, 그들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봉인, 해제할까나.)”

“(당연하지.)”

“(무례한 놈, 사형.)”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

방금까지만 해도 하루의 짙은 살기(殺氣)에 의해 뱀 앞의 개구리처럼 얼어붙어 있었던 그들의 표정은, 그 살기가 피규어를 찌른 순간 흉신악살처럼 바뀌어 있었다.

“(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

“(얼어붙은얼음은내영역어둡고차가운바람과함께일말의자비심도없이죽음의칼날을들이밀며···.)”

“(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죽인다)”

“(한정판매도안하는특별피규어전격애니메이션화확정코스튬은봉제선없고색감은무광택흑색으로···.)”

그들의 입에서 괴상한 방언이 튀어나올수록, 무너진 신사(神社)의 온갖 것들이 회오리로 빨려 들어온다. 쏟아지는 함박눈은 물론, 바닥에 깔린 눈더미, 시체와 나무 조각, 곳곳에 부러진 칼 조각까지.

슈우우-!

그 모든 걸 삼킨 맹렬한 회오리는 일순.

번-쩍!

하얀 섬광과 함께 하늘로 솟구친다.

수직으로 뻗어 오른 눈 회오리.

네 명의 뚱보 무림인들을 집어삼킨 채 용오름 치는 백색 기둥의 기세에 신사에 있던 수하들이 제각기 칼을 빼 들었지만.

“(······하루 상!)”

“(닥치고 다들 잘 보기나 해.)”

뒤로 뛰며 여유롭게 담배를 꺼내 문 하루.

신사 한가운데 치솟은 눈 기둥을 향해 사방팔방의 잔해들이 빨려 들어가는 와중에도, 그는 손으로 가림막을 만들어 담배에 불을 붙일 뿐이었다.

보인다.

태풍의 눈 안에서, 눈이 뒤집힌 채 부들부들 떠는 오타쿠들이.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내가 말했지? 그 벌레 같은 스다 새끼, 불쌍한 것들 세뇌해서 이상한 수작질이나 부리고 있다고.)”

묘한 광경이었다.

빠직빠직.

힘줄이 툭툭 튀어나온 그들의 신체 주위로, 하얀 가루들이 띠를 이뤄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부서진 안경과 머리띠.

얼굴에 딱 붙어 있던 안경과 머리띠가 가루가 되어 몸뚱아리를 스치듯 감싸기 시작한 순간, 그들의 전신에 봉인되어 있던 거대한 기도가 피어오른다.

마치 긴고아에서 해방된 손오공처럼.

살기(殺氣)에 의해 피규어가 박살 난 순간부터 안광을 빛내며 빠르게 수인을 맺는 녀석들은, 아까와는 전혀 달랐다. 어느새 아득한 하늘 끝까지 올라간 저 눈기둥처럼 거침없이 살기를 터뜨리는 무림인들.

콰콰콰콰-!

놈들이 마치 한 몸뚱이처럼 다가온다.

그들을 감싼 소용돌이가 비틀거리며 자신에게 쇄도해 온 순간에도, 하루는 여유롭게 담배를 한 모금 쭉 빨아들인다.

“(하루 상!)”

“(다른 지점 간 애들한테 피규어는 건드리지 말라고 전달해.)”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새끼. 보면 몰라?)”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자 날아가는 꽁초.

툭.

포물선을 그린 담뱃불은, 회오리에 닿기도 직전 순간적으로 큰 불꽃을 일으킨 뒤 흔적도 없이 사그라든다.

“(그 뱀 같은 스다 새끼. 이런 촌구석까지 진법을 설치해 놨어.)”

“(어, 어떻게···.)”

“(저 망할 피규어가 매개체야.)”

담배 연기를 내뿜은 하루가 피식 웃는다.

국소 지역에 솟구치는 회오리.

저건, 절대 고수라 불리는 이들이 검기를 펼쳐 만들어 내는 그런 종류의 바람이 아니다.

“(저것들, 완전히 고장 났네. 맛이 갔어.)”

저 안에서 멍한 눈으로 중얼대며 수인을 맺는 오타쿠들. 눈으로 된 기둥처럼 하늘 끝까지 솟구친 이 회오리는, 저들이 피규어와 스스로의 몸을 제물 삼아 피워 올린 거대한 제단과도 같아 보였다.

콰콰콰콰-!

부스러진 채 주위를 돌고 있는 안경과 머리띠 사이에서, 점점 퍼석퍼석해지는 듯한 놈들의 피부. 세뇌당한 건지 자의에 의한 행동인 건지는 몰라도, 녀석들의 눈에 불이 꺼졌다.

“(여긴 틀렸다. 다음 좌표 찍어라.)”

반지에 대한 정보, 여기서는 못 얻는다.

이제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방언을 중얼거리는 오타쿠들. 아무리 고문을 한다고 해도, 이미 전원이 꺼진 듯한 저들과는 유의미한 대화조차 나눌 수 없을 테니까.

콰콰콰콰콰-!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린다.

점점 다가오는 광폭한 회오리의 기세에, 늑대 같은 이빨을 드러내는 수하들이 하나둘 뛰어들려 할 때.

“(못 들었어?)”

“(하루 상!)”

“(다음 좌표 찍으라고, 새끼들아.)”

“(하지만···.)”

하루가, 칼을 아래로 내린 자세 그대로 빙글 회전하며 검을 뿌린다.

스걱━━━━━!

다가오던 회오리가, 잘렸다.

말 그대로 일도양단(一刀兩斷).

단 일격에, 하늘 끝까지 솟구쳤던 그 회오리의 몸통이 무 베인 듯 깔끔하게 베였다.

동시에 허공에 비산하는 핏물들.

허리가 끊긴 회오리 사이로, 이를 피워냈던 오타쿠들의 목이 잘린 채 솟구친 것이다.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하루의 검격에 감탄한 수하들이,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돌렸지만.

“(············시간 낭비했잖아.)”

회전을 멈춘 하루는 그저 짜증을 낼 뿐이었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

“(뭐 해, 이 새끼들아! 빨리 안 움직여!)”

“(오, 오쓰!)”

“(반지 찾으려면 동부 쪽 구역은 오늘 전부 돌아야 돼.)”

“(오쓰!)”

“(그리고, 봤지? 귀찮아지니까 정보 빼내기 전까지 저 망할 피규어는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폭주 뛰는 애들한테도 연락 돌려.)”

“(오쓰!)”

“(적어도 3일 안에는 무조건 찾아낸다.)

폭주족이건 양아치건, 산하에 영향력이 닿는 모든 인력들을 동원해서 스다보다 먼저 반지를 찾아야 하는 지금.

“(그나저나.)”

가야 할 곳은 한군데가 아니었으니까.

“(······이제 몇 개나 남았지?)”

* * *

홋카이도 경찰 본부의 최고층 회의실.

“(······몇백 개야 우습게 넘어가지요.)”

“(몇백 개요?)”

후룩.

대답 대신 차를 들이켠 원로가, 되물은 경찰 간부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다는 구향회의 차기 회장 후보 중 하나입니다. 관리하는 구역이 많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그건 아니지만···.)”

“(몇백 개라는 것도, 직간접적으로 관리하는 굵직한 업장만 그 정도지 피규어라도 놓게 해 달라고 알아서 상납하는 업장들까지 포함하면 천 개가 넘어갈걸요.)”

“(피··· 규어요?)”

“(여기 출신이 아니시군요. 홋카이도에는, 스다의 피규어만 구해놓으면 귀신도 영업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그건···.)”

“(이봐, 그런 기본 사항은 나중에 따로 체크하는 걸로 하지.)”

회의실 상석에 앉은 홋카이도의 경찰본부장이, 아까부터 뻔한 질문을 던지는 경찰 간부의 입을 막았다.

“(이해하시오. 도쿄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라 아직 적응기간이 필요해서.)”

“(괜찮습니다.)”

지금은 낭비할 시간이 없다.

민망한 듯 머리 긁는 간부를 향해 질책 어린 시선을 보낸 본부장. 그가, 구향회 원로에게 고개를 돌려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또 뭐가 필요하시다고요.)”

“(추가 인력이 필요합니다.)”

“(인력이라면 구향회도 만만치 않잖소? 그리고, 저번에 요청한 인력은 이미 구간마다 지원이 들어간 걸로 알고 있는데.)”

“(판이 생각보다 더 커졌습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궁금한 표정을 짓는 경찰본부장.

구향회가 이렇게 급하게 홋카이도 경찰 본부에 아쉬운 소리를 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더구나, 지금은 계승식이 진행 중인 상황.

베테랑이라 불리는 원로들이 이런 상황을 대비해 한참 전부터 짜놓은 계승식인데, 갑자기 추가 지원이 무슨 소린가.

“(······직접 보시겠습니까?)”

원로의 말에 본부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편에 서 있던 구향회 쪽 직원이 어딘가로 파일을 전송한다.

파팟-!

곧, 회의실 앞에 송출된 영상들.

대형 모니터에 각각 분할된 몇십 개의 영상들이 떠오른다.

[삿포로 - 3]

[하코다테 - 1]

[삿포로 - 2]

[기타미 - 1]

···.

홋카이도 각 지역의 예상 격돌 포인트마다 배치한 드론 카메라에 의해 송출되고 있는 영상들을 본 간부들의 눈이 커진다.

“(·········!)”

“(·········!)”

“(·········!)”

과장 좀 보태, 홋카이도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 송출되는 건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뜨악한 표정을 지은 경찰본부장을 향해, 원로가 입을 열었다.

“(아까 말씀드렸죠. 스다는 홋카이도 전역에 거의 천 개가 넘는 상납 구역을 만들어 놨다고요. 이건 구향회 내의 간부들 중에서도 독보적인 숫자입니다.)”

“(네.)”

“(스다가 만들어놓은 이 상납 업장들은, 각각의 지역에서 이번 계승식을 완수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모으는 일종의 허브로 작동합니다. 그곳을 중심으로 그동안 모아 놓은 각 지역의 인맥이나 소문을 취합해 초대 회장님의 유물이 있을 법한 장소를 찾는 작업이 진행 중이지요.)”

최대한 많은 거점들을 만들어 물건을 찾아낸다, 이것이 바로 이번 승계식에 임하는 스다의 전략.

“(반면, 하루에게 상납하는 업장의 수는 스다의 것에 비해 20분의 1도 되지 않습니다.)”

“(그건 저희도 알고 있습니다.)”

승계식은, 차기 회장으로서의 영향력을 입증해야 하는 시험. 이런 점에서 본다면, 홋카이도 각 지역의 소문과 정보를 빠르게 입수할 수 있을 스다가 유리해 보이지만.

“(그래서 저희 쪽에서도, 차기 회장을 스다로 상정해 놓기는 한 상황입니다만.)”

“(정상적으로 간다면 그렇겠지요.)”

“(그게 무슨···.)”

“(하루 녀석, 원래가 채집보다는 사냥을 좋아하는 놈입니다.)”

하루가 택한 방법은 폭력적이었다.

자신의 구역 따위는 진작 내팽개치고, 처음부터 끝까지 스다가 모은 정보들을 뺏기로 생각한 것이다.

“(·········늑대 같은 성향이군요.)”

“(따르는 놈들도 많고요. 업장을 관리하는 건 익숙하지 않아도, 테러만큼은 자신 있는 놈입니다.)”

구향회 조직원 외에도 스다를 따르는 폭주족과 야쿠자 같은 하류 인생들. 하루는,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해 스다네 패거리들을 습격하고 있다. 스다가 반지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모으면, 하루는 이를 통째로 빼앗으려는 것.

“(확실히, 싸움이 커지겠군요.)”

“(네.)”

경찰본부장이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부둣가.

···

해안 도로를 달리는 폭주족들이 습격한 캠핑장.

···

창문 위로 오타쿠들이 경공을 펼치는 관광호텔.

···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모니터를 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저게 끝이 아니군요.)”

“(네.)”

지금 모니터로 보이는 건, 미리 상정해놓았던 예상 격돌 포인트들. 하지만, 원로의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스다의 것이라 알려졌던 천여 개의 구역에서 치열한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거의 전면전이라고 봐야죠. 하루는 스다의 모든 구역과 병력을 부숴서 유물의 정보를 알아낼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또한, 깨달았다.

구향회의 원로가 이 홋카이도의 경찰본부에 찾아온 이유를.

“(···시민들의 일상에 위험이 가해질 수도 있겠군요.)”

“(네.)”

일반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구향회가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지켜야 한다. 비단 구향회가 인의(人意)를 중시하는 문파이기뿐만이어서가 아니라, 일반인에게 일정 이상의 피해를 줄 시 일왕 직속 부대에게 미움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좋습니다. 어차피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일이니, 전투 지역의 인근 민가나 상가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무림인 경찰들 위주로 지원해 주십시오.)”

“(무림인이요?)”

“(네. 저희도 모든 인력을 동원해서 민간인들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경찰이 막기 힘들 정도로 싸움이 과열될 경우도 상정해야 하니까요.)”

“(흠.)”

살짝 인상을 찌푸리는 경찰본부장.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림인 전형으로 들어온 저희 쪽 경찰들은 자존심이 꽤 셉니다. 구향회가 대단한 것이야 알지만, 그래도 경찰이 외부 문파의 뒤치다꺼리를 한다고 하면···.)”

“(하루에 1천만 엔.)”

“(···!)”

“(이번 계승식만 잘 마치면, 파견된 분들 모두에게 하루당 천만 엔씩 비용을 채워 드리겠습니다.)”

“(허.)”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예측한 것 이상으로 분위기가 과열되었다면, 그래서 민간인들에게 피해를 끼칠 것 같다면, 잠시 계승식을 멈추고 스다와 하루를 다시 불러들이면 그만이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렇게 저희에게 쏟는 예산이나, 새로운 대결 방법에 대한 합의점을 찾을 때까지 계승식을 연기하는데 드는 비용이나 별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요.)”

“(어쩔 수 없습니다.)”

그는 의아했다.

막대한 추가 예산을 투입하고서라도 절대 이 계승식을 멈추지 않는 이유가.

“(시작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계승식은 시작한 이후에는 절대 멈출 수 없거든요.)”

“(대체 뭐 때문입니까? 예산도 아니라면···.)”

“(유물.)”

“(예?)”

“(저희 초대 회장님께서 보관하고 있는 그 유물은, 밖으로 나온다면 무조건 새 주인을 찾아야 하거든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또한, 궁금했다.

홋카이도를 움직일 수 있다는 저 강력한 고수들조차 벌벌 떠는, 초대회장의 유물이라는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체, 그 유물이라는 게 뭐고.)”

또한 수백이 넘는 무림인들이 홋카이도 전역에서 피를 튀기게 하는 동시에 경찰당국에게도 고생을 안겨 주는 저 애물단지는, 대체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인지.

“(또, 어디에 숨겨놓은 겁니까?)”

* * *

- 여기야.

함박눈이 퍼부어지는 가운데.

“············찾았다.”

어깨에 소복하게 쌓인 눈더미를 털어 낸 창규가, 상쾌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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