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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무림 견문록-107화 (107/150)

107화.

천마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쾅━━━!

대형 창고 위로 추락한 창규.

지붕과 함께 무너져 시멘트 포대들 사이에 처박힌 그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야, 약혼?”

- 뭘 그렇게 놀래.

“거짓말 마십쇼, 약혼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 이거 상당히 실례하네.

“힘으로 협박하셨습니까?”

- 놀랍게도 내가 먼저 제안한 게 아니다. 그때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수준도 아니었고.

“그럼, 얼굴로 협박하신 겁니까?”

- 애송이 때 일이라고 했잖아, 아무리 나라도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생겼었겠냐?

“하긴, 세상 이치가 그래서는 안 되는데···.”

- 아 미친놈이.

중얼대던 창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약혼반지라.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여태까지 천마가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던 이유도 설명이 된다. 이 시끄러운 양반이, 창규가 구향회 본부 아래서 깽판 칠 때도 끼어들지 않았던 것도 설명이 되고.

- 일어나, 임마! 빨리!

다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하나 있다.

- 그 새끼, 그 염병할 피규어에다 뽀뽀한 것처럼 내 반지에다가도 침 묻힐지도 몰라!

반지 하나.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자 구 무림 전체를 자처하던 천마가, 고작 반지에 이렇게까지 흥분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말이. 심지어, 세상만사를 초월한 척하던 이가 약혼반지라니.

“·········무(武)에 올인했었다면서요?”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 아래서, 창규가 헛웃음을 짓는다.

“이것만큼 짜릿하고 아름다운 게 없다는 둥, 하루라도 무(武)를 멀리하는 시간은 무의미하다는 둥 하시던 양반이, 어떻게 약혼까지 다 하셨대요?”

- 그때는 무공의 티끌도 모를 때였지. 애송이였···.

“잠깐, 잠깐만요.”

심지어, 북해빙궁?

세계무림연맹이 오무답문으로 지정해 놓았다는 저 정체불명의 단체는, 완전하게 펼쳐진 만형진법에 의해 자신이 봉인될 때 가장 앞장서서 배신한 이들이라고 천마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때 분명히, 제일 먼저 복수해야 한다고···.”

문득, 창규가 눈을 치켜떴다.

북해빙궁주와의 약혼반지와, 북해빙궁의 주도로 구 무림의 모든 것과 함께 만년빙정에 봉인된 천마. 둘 사이에 얼마나 먼 시간적 공백이 있는지는 몰라도, 일련의 관계가 있음은 척 봐도 예상할 수 있었다.

- 후.

“선배님이 봉인된 거, 그 약혼반지랑도 관련이 있는 거예요?”

- 넌 결혼 같은 건 생각도 하지 마라···.

“아니, 그러니까···.”

- 하루 이틀로 끝날 얘기가 아냐. 나중에 다 말해 줄 테니까 일단 빨리 찾기나 하자고.

분명 사연이 있다.

착잡한 표정을 짓는 천마를 본 창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건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금, 구체적인 사연에 대한 궁금증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북해도(北海島).’

창규가 지금 일본 최북단에 위치한 홋카이도까지 온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한번 보여 줄 때마다 1,000명의 사람을 제물로 받으며 만형진법의 흔적을 해외에 뿌리고 다니는 녀석이 이 홋카이도의 삿포로에 있다는 정보를 알았기 때문.

‘여기, 생각보다 일의 사이즈가 커지는데.’

동시에 직감했다.

천마를 배신한 ‘북해빙궁’, 천마를 봉인한 ‘만형진법’. 하필이면 천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 키워드가 여기서 잡히는 것 역시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을.

퍼펑-!

문득 구멍 난 창고 지붕 위로 떨어지는 굉음에 창규가 고개를 들었다.

퍼펑-! 콰콰콰콰-!

하얀 달빛이 함박눈과 함께 쏟아지는 밤하늘을, 폭탄에 의해 터져 은하수처럼 떨어지는 유리조각과 검붉은 안개가 수놓는다.

하얀 밤하늘 사이사이서 부딪히는 요란한 검광(劍光)들이 안 그래도 화려한 삿포로 야경(夜景)에 불빛을 보탠다.

‘스다.’

스다 마사오에게 합류한 예의 그 뚱보 무림인들이, 스다를 쫓으려는 원로와 그 직할 조직원들을 상대하며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안전하게 대피시키도록 도와주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아직, 천마의 얼굴을 어떻게 피규어에 담았는지 묻지 못했는데···.’

참하늘주님성회의 믿음을 교환할 타이밍을 놓쳤다.

마천루 곳곳에서 불길이 나고 칼 소리와 기합 소리가 비처럼 쏟아지는 지금, 중요한 건 다음 단계를 밟는 것이다.

‘하루라는 놈은 어딨지?’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반대편 후보는 정말 폭탄을 터뜨리고 원로를 납치하려 한 것인가. 다른 건 모르겠지만, 창규는 지금 저들이 그 어떤 꼼수와 폭력을 써서라도 천마의 약혼반지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어쩌다가 저쪽 초대회장의 손에 선배의 반지가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잘됐네.’

아까 창문 밖으로 나오는 와중 스다에게 얼핏 듣기로는, 용인되는 폭력의 범위가 꽤 넓은 모양이던데. 보아하니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원로고 본사 건물이고 신경도 쓰지 않고 뻥뻥 날리는 게, 방법 불문 과정 불문 유물만 가져온다면 게임이 끝나는 상황.

‘그럼, 나도 눈치 볼 것 없잖아?’

눈치 보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킹 메이커.

저들이 찾고 있는 게 정말 천마의 약혼반지고, 그 반지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천마의 말이 진실이라면, 창규는 스다와 하루 둘 중 누구라도 구향회의 차기 회장으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만 한다면, 만형진법 관련자를 알아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그뿐인가.

성공하기만 한다면 창규는 저 거대한 무림 세력을 등 뒤에 세울 수 있다.

‘이 상태대로라면··· 외부인이 개입했다는 반발도 재울 수 있고.’

간단하다.

이번에 창규가 찍은 놈이 차기 회장이 된다면, 녀석이 원로들에게 창규를 차기 회장 경쟁의 조력자로 ‘이용’했다고 말하면 된다.

저 정도의 폭력이 용인되는 살벌한 경쟁.

우연히 삿포로에 온 줄 알았던 괴산파의 외부인이 사실은 일부러 부른 조력자였다, 고 말하면 해외까지 미치는 자신의 영향력을 자랑할 수 있을 기회니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둘 다 평소 일본 밖으로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녔다고 했으니 별문제는 없겠고···.’

안전장치를 마련한 창규가 고개를 돌린다.

이제, 그가 구향회의 왕위 계승 경쟁 속으로 뛰어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정보가 남았다.

- 빨리, 빨리! 빨리 가자고!

침을 튀기는 천마의 모습이 보인다.

- 그 새끼가 끼기 전에, 한 번이라도 먼저 껴 봐야겠어.

그윽한 표정으로 자신을 여체화한 피규어를 끌어안던 스다의 모습을 떠올렸는지, 아까부터 오만상을 찌푸리며 창규를 재촉하는 천마. 그를 향해, 창규가 입을 열었다.

- 어차피 그거 보관하는 데는 뻔하거든.

“그래서.”

그는, 당장 내일이라도 구향회의 차기회장을 자기 손으로 앉힐 수 있다.

“······그 약혼반지, 지금 어디에 있을 것 같은데요?”

천마의 기억만 정확하다면.

* * *

눈 덮인 신사(神社).

주위로 울창하던 숲에는 피 냄새만 가득하고, 횃대 모양의 입구는 깔끔하게 두 동강 난 채 돌바닥 위로 쓰러져 있다.

촥-!

백설(白雪) 위로, 붉은 피가 뿌려진다.

사방에 박살 난 울타리를 덮은 하얀 눈 위로, 부서진 석등을 덮은 하얀 눈 위로, 코가 비릿해질 정도로 많은 핏줄기가 흩날리는 눈송이들과 함께 쏟아지는 가운데.

“(············여기 있었네.)”

입을 찢은 하루가 칼을 내린 채 걸음을 내딛는다.

눈 위로 미끄러지는 그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그의 시선이 끝에 있는 신궁(神宮)에서부터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이어이! 다들 긴장하라고!)”

“(더 이상의 접근, 곤란.)”

“(천박한 인간이 오셨군.)”

“(다들, ‘봉인해제’할 ‘각오’가 되셨을까나.)”

신사의 한가운데.

안경과 머리띠를 한 네 명의 뚱보들이 칼을 빼 들었다. 이들은, 이 신사 한가운데 박힌 네 개의 기둥들을 동서남북으로 지키고 있는 스다의 직속 부하들.

“(물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 던질 각오’ 쯤이야.)”

정확히 말해, 그들이 지키고 있는 건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새전함 위에 걸린 여고생 모양의 피규어. 그들이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게 두툼한 등을 밀착시켜 지키고 있던 건, 분명 스다의 상납구역마다 배치된 그 피규어였다.

“(우리의 목숨 따위야, 더 큰···.)”

“(너희.)”

가까이 다가오는 하루를 향해 목숨 건 기세로 암기를 쳐든 오타쿠들의 손이, 일순 파르르 떨린다.

“(혀 잘릴래?)”

“(·········!)”

살기(殺氣).

걸어오던 하루가 가볍게 칼을 휘두르자, 발아래 쌓인 눈더미가 일어나며 삭풍처럼 스산한 살기가 자신들을 태풍처럼 감쌌기 때문이다.

사박.

사박.

저게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오타쿠 무인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 평범과는 거리가 먼 자들. 숨이 막혀오는 압박감 속에서, 오타쿠 하나가 간신히 입을 연다.

“(욕심 많은 자여! 언젠가, 운명의 저울이 네가 훔쳐간 무게추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것이다!)”

“(얘들아, 들었냐?)”

문득 입을 찢은 하루.

“(얘들이 나보고 욕심쟁이래.)”

하루가 낄낄 웃음을 터뜨리자, 신사 곳곳에 주저앉아 피 묻은 칼을 눈에 닦고 있던 무림인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제각기 아무렇게나 옷섶을 연 정장 셔츠를 입은 이들은, 모두가 하루 쪽 직속 조직원들.

“(형님 욕심쟁이 맞으심다! 곱게 죽여도 되는 새끼들 꼭 팔다리 하나씩은 뚝뚝 끊어 가시잖슴까.)”

“(그건 욕심이 아니지.)”

부하의 낄낄대는 호응에, 짐짓 고민하는 척 팔짱을 낀 하루가 싱글벙글 웃으며 입을 연다.

“(애초에, ‘죽었어야 하는’ 쓰레기들이잖아? 분수도 모르고 살아 있겠다고 욕심부린 놈들이 문제지.)”

“(형님 말씀이 맞슴다!)”

곳곳에서 터지는 호응 섞인 환호성을 들으며, 하루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짜 욕심쟁이는 스다지. 안 그래?)”

“(맞슴다!)”

“(하여간 쓸데없이 부지런하기만 한 새끼. 도박쟁이에, 마약쟁이에, 장기 팔아먹는 야쿠자까지 먹었으면 됐지, 이런 촌구석 신사까지 영역 표시를 다 해 놓네.)”

“(크하핫! 그러니까 말임다!)”

“(아무리 칼밥 먹고 산다고 해도, 종교는 건드리면 안 되는 거 아냐?)”

낄낄대며 다시 오타쿠들을 향해 다가가는 하루.

사박.

사박.

살기를 두른 그가 다가가는 곳 주위로, 돌바닥을 덮은 눈이 조금씩 녹기 시작한다. 그리고, 보인다. 신사 곳곳에 내린 함박눈에 반쯤 파묻혀 버린 스다 쪽 하위 조직원들의 시체들이.

“(이거 봐. 누가 신을 모시는 데서 이렇게 흉한 짓을 해?)”

“(그건, 네놈이···.)”

“(반지 숨겨 놓은 데가 어딘지 말해 주기만 했어도, 얘들은 곱게 죽을 수 있었지.)”

“(어리석은 자여! 반지의 위치는 우리도 모른···.)”

“(그건 정정하지. 대신, ‘바라보고’ 있는 곳은 어딘지 알잖아?)”

“(······.)”

“(참나. 스다 새끼, 세뇌를 어떻게 시켜 놓은 거야.)”

기세를 죽이지 않고 여전히 눈을 치켜뜬 오타쿠 무인들.

우뚝.

하루가 그들의 앞에 섰다.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

“(무슨 헛소리를···.)”

“(여태까지 너희가 저 흉물凶物을 통해 추적한 반지의 자취가 있다고 들었다.)”

턱을 덜덜 떨면서도 피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그들의 앞에 선 채 고개를 우둑우둑 돌리는 하루.

“(말하면 살려 주지.)”

겁을 주기 위해 살기(殺氣)를 담은 채 찔러 넣은 칼끝이, 오타쿠들의 옆구리를 비집고 피규어에 닿은 그때!

“(그게 아니면, 일단 저 역겨운 피규어들···.)”

“(인간.)”

후두둑.

오타쿠들이 쓰고 있던 안경과 머리띠가 부스러지며, 신사에 거대한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너는 지금, 큰 실수를 했다.)”

콰콰콰콰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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