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문득,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삿포로의 첫눈은 이 시기쯤 내린다고는 했지만, 지금 내리는 눈송이들은 마치 갑판 위에 퍼진 당혹감을 덮기 위해 하늘이 급하게 뿌린 지우개 같은 느낌이었다.
한 송이.
두 송이.
세 송이.
귀향선 갑판에 침묵과 함께 하얀 눈송이가 쌓여갈 즈음, 다섯 원로들이 새빨간 얼굴로 헛기침을 해댔다. 마치 집구석의 치부를 들킨 집안 어르신 같은 느낌.
“(크, 크험!)”
“(격식에 맞지 않은 농담이구나.)”
“(이거 실례했네.)”
하지만 창규는 당황하지 않았다.
“(승계식을 앞두고 예민해져서 말투가 좀 튀긴 하지만, 원래부터 이런 자는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나쁘지 않네, 김치맨.)”
“(음?)”
미친놈을 대하는 건 익숙하니까.
서정우부터 김두광까지.
이제 창규는, 이런 헛소리 따위는 더한 개소리로 받아칠 정도로 광기(狂氣)에 익숙해진 상태.
“(다만 이쪽도 칼밥 먹는 무인이니, 이왕이면 김치워리어라 부르는 게 더 경우에 맞을 것 같은데.)”
“(푸핫.)”
터졌다.
동공이 흔들리는 원로들 사이에서 스다가 홀로 발작적인 웃음을 터뜨린다.
“(어이어이, 김치워리어라니···.)”
“(그럼 그쪽은, 스시워리어인가?)”
“(풉! 스시··· 스시 워리어··· 나 지금, 진심으로 웃어 버렸달까?)”
남산만 한 배를 부여잡고 혼자 낄낄거리는 스다 마사오. 경멸하는 하루는 물론, 억지웃음을 짓던 다섯 원로들조차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때.
‘······90프로 이상이다.’
큭큭대는 스다를 본 창규의 심증이 서서히 확신으로 바뀐다.
‘이 새끼, 느낌이 와.’
광기 어린 눈빛, 주변 분위기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마이웨이 감성, 거기다 생뚱맞게 터지는 발작 포인트까지. 산전수전 겪은 무림인들 사이에서도 혼자 튀는 이런 느낌은.
‘이놈이 진짜 대장로라면···.’
물어볼 건 많다.
아시아 곳곳에 천마의 성물을 퍼뜨리고 다니는 참하늘주님성회의 대장로가 왜 하필 이 홋카이도를 은신처로 삼고 있는지, 어떻게 천마의 얼굴을 닮은 피규어를 만들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천마를 가둔 만형진법을 퍼뜨리고 다니는 자가 삿포로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등.
‘독대해야 한다.’
단둘이서 얘기해야 한다.
‘지금은 사람이 너무 많아.’
슬슬 눈이 쌓이는 갑판 위에서, 창규는 제각기 흉흉한 기도를 피우는 원로들을 바라보았다.
“(인사는 그쯤 하고 슬슬 준비하지.)”
“(구향회의 체면이···.)”
“(왜, 재밌는데.)”
“(선장은 실력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머지는 우리가 커버하면 돼.)”
“(맞아. 둘 중 하나로 회장이 정해지면, 그게 누구건 충성을 바치는 것이 우리 역할이다.)”
구향회의 다섯 원로들.
오랫동안 구향회의 회장을 보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이 강자들에 의해, 차기 회장 계승식의 시작과 끝이 정해지는 듯한데.
“(자, 백 상 얼굴도 익혔으니 슬슬 칼 덥히러 가지.)”
폭죽 터진 이후의 정식 계승식은 구향회 본사, 즉 귀환선의 갑판 아래에서부터 시작되는 모양이었다.
저벅.
저벅.
갑판 아래로 내려가는 원로들의 뒤를 순순히 따르는 스다와 하루를 보며, 창규는 이들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다들 엇비슷하네.’
저 5명의 원로들은, 내공만 따지면 차기 회장 후보라는 스다 및 하루와도 비슷한 수준이다.
‘누구든, 둘만 있으면 혈교 제사장도 무난히 잡겠어.’
애초에 이 정도의 고수들이 아니었으면 이런 계승식을 진행할 수도 없었겠지. 홋카이도 전체를 대표한다는 연합문파의 강함과 조직력은, 갑판 아래로 내려가자 더욱 확실하게 드러났다.
끼익.
갑판 아래로 내려가자마자 귀에 꽂히는 쩌렁쩌렁한 고함소리.
“(자, 형님들 내려오신다-!)”
붉은 카펫이 깔린 거대한 홀 좌우로, 올라오며 봤던 본사 각층의 무림인들이 90도로 허리 숙여 구향회의 최고위 간부들을 맞는다.
“(오쓰!)”
“(오쓰!)”
“(오쓰!)”
“(오쓰!)”
“(오쓰!)”
갑판 위로 다녀오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일본 강호(江湖)식 의전을 맞춘 소속 조직원들이, 칼자루를 들어 올리며 각자가 지지하는 후보의 이름을 연호한다.
“(하-루! 하-루! 하-루!)”
“(스-다! 스-다! 스-다!)”
단상까지 펼쳐진 빨간 카펫.
좌우에서 쏟아지는 서슬 퍼런 응원들을 들으며 카펫 위를 걷는 창규를 향해, 앞서 걷던 원로 중 하나가 고개 돌린 뒤.
“(궁금하지 않습니까, 백 상? 저 둘 중 누가 구향회를 이끌 새 회장이 될지.)”
선두에서 걷는 홋카이도 대표 조직의 두 후계자를 차례로 가리킨다.
“(하루 저 녀석의 별명은 뱃사공입니다.)”
“(뱃사공이요?)”
“(네.)”
먼저, 하루.
“(하루가 싸움을 벌인 판은, 장소에 상관없이 모두 피바다가 된다는 점에서 유래됐지요. 피로 된 바다 위를 유유자적하게 떠도는 뱃사공, 이런 느낌이라고 할까요.)”
“(아.)”
“(추진력이 좋긴 한데, 과하게 잔인한 면이 있습니다. 홋카이도에서 악명을 떨치던 고수 중 저놈에게 손가락이나 아킬레스건이 잘려 병신이 된 이들도 꽤 많고요. 아까도 보셨듯이,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확확 바뀔 정도의 다혈질입니다.)”
손속이 잔인할 것이라 예상은 했다.
전형적인 야쿠자의 상을 하고 있던 녀석은, 아까 창규에게 시비를 걸러 다가왔을 때부터 진한 피 냄새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참, 아까 일은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창규의 옆으로 와 귓속말을 하는 원로.
“(막상 자기가 회장이 된다면,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백 상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놈입니다. 애초에, 본인 스스로가 밖으로 쏘다니며 해외 인맥을 만들고 다니는 놈이라 괴산파 쪽 문주님과 한 번만 독대를 시켜 주면 낄낄 웃으며 넘어갈 거고요.)”
“(흐음.)”
“(확실히 괴산파 같은 정통 문파들과 관계를 맺는 게, 녀석 입장에서도 족보도 불확실한 어중이떠중이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보다···.)”
“(그럼.)”
뜻 모를 푸념을 시작하려던 원로의 말을 자르며, 창규가 입을 열었다.
“(저 스다라는 자는요.)”
“(아.)”
다음, 스다.
지금 궁금한 건 녀석이다.
“(어중이떠중이를 만나고 다니는 건 스다 녀석도 문제긴 하지만···.)”
“(회장이 될 만한 그릇입니까?)”
“(그릇이라.)”
문득 원로가 고개를 돌린다.
“(이런저런 단점이 뚜렷한 녀석입니다만··· 적어도 그릇만큼은 스다가 하루의 위라고 봅니다.)”
“(예?)”
“(천장을 한번 보시죠.)”
“(·········헛.)”
홀의 높은 천장, 희뿌연 구름이 보인다.
그 아래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안경 쓴 무림인들이 있다. 저들은 지금, 자신들의 육중한 몸에서 증발한 땀이 천장에 쌓여 구름이 낄 정도로 스다를 연호하는 중이다.
“(백 상은, 누군가에게 저렇게 뜨거운 응원을 받아본 적이 있으신지요.)”
“(······.)”
“(강호에서 무시당하던 오타쿠들을 본사 출입 가능한 간부급 무인들로 성장시킨 게 스다입니다.)”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짓는 원로.
“(게다가, 구향회의 그늘에 거둬들인 업소들도 하루 쪽보다 스다 쪽이 더 많지요. 홋카이도 전체로 따지자면, 하루가 밑에 둔 업장은 스다가 차지한 업장에 비하면 삼분의 일도 되지 않을 테고.)”
창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얘기만 들어서는 의외로 정상처럼 보이는 스다의 행적.
“(하는 짓이 경박해서 그렇지, 뭐만 하면 싹 다 죽여 버리는 하루에 비해 수익적인 면에서는 구향회에 더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지요. 가끔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것만 빼면요.)”
“(그 이상한 짓거리라는 게···.)”
문득 뭔가가 떠오른 창규가 입을 열었을 때.
두━━━웅!
홀 전체를 울리는 북소리가 들린다.
어느새 단상에 다다른 백창규.
이미 그의 앞에는 본격적인 계승식 선포를 준비하며 목을 가다듬고 있는 원로들이 있다.
두-웅! 두-웅!
전신에 문신이 가득한 훈도시 차림의 남자들이 거칠게 북을 두드리기 시작할 때쯤, 창규와 얘기를 나누던 원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여태까지 말씀드린 건, 사실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건 결국 계승식에서 유물을 찾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을 위한 것입니다.)”
“(······.)”
“(기대해도 됩니다. 원래 구향회의 계승식은, 각자가 가진 모든 것들을 폭력으로 치환하는 대결의 장이니까.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창규를 바라보던 원로가 문득 낄낄거리기 시작할 때쯤.
“(자-!)”
단상 제일 앞에 있던 원로가 마이크를 잡는다.
점점 빨라지는 북소리만큼 홀에 거칠게 울려 퍼지는 구향회 조직원들의 거센 함성 사이로, 그의 묵직한 사자후가 터지는 것을 시작으로.
“(오늘 자정을 기하여!)”
둥-! 둥-! 둥-! 둥-! 둥-!
“(우리 구향회를 이끌, 새 선장을 뽑도록 하겠다-!)”
구향회 차기 회장의 계승식이, 선포되었다.
* * *
그날 새벽.
자신의 숙소에 들어간 창규는, 계승식이 선포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며 귀향선의 포문 너머로 경공을 펼친 스다와 하루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들을 따라 소나기처럼 아래로 쏟아지던 각자의 부하들.
‘하, 참.’
왜 갑판을 놔두고 굳이 포문으로 떨어진 것인지, 몇 시간 늦춰지지도 않았는데 그 하루라는 놈은 왜 성질을 냈던 것인지, 그딴 사소한 의문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거 번거롭게 됐네···.’
결국, 끝까지 기회를 잡지 못했다.
스다 마사오.
대장로로 추정되는 녀석에게 만형진법에 대해 물어 볼 말이 있었건만, 놈은 자정이 되자마자 곧바로 하루와 함께 빠져 나가 버렸다.
‘(내일 정오부터 중계가 시작될 테니 오늘 하루는 푹 쉬어 두시길 바랍니다, 백 상.)’
‘(이걸··· 중계합니까?)’
‘(하하, 당연하지요).’
내일 정오부터 드론으로 중계되는 스다와 하루의 승계식. 모든 종류의 폭력이 허용되는 승계식이기에, 중계 전까지 구향회는 최대한 그 둘의 거리를 띄워 놓기 위해 각각 내보내는 것이다.
‘무슨 숨바꼭질도 아니고.’
지금, 창규가 따라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한다면 대놓고 저들의 승계식에 끼어드는 방해꾼처럼 보일 게 아닌가.
‘하.’
한숨을 내쉬는 창규.
계승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지, 그냥 여기가 뒤집어지건 말건 최대한 빨리 만형진법 유포자나 잡아 족치고 갈까 살짝 고민을 하는 그의 귀에.
- 야.
여태껏 잠잠하던 천마가 입을 열었다.
- 너도 가.
“예?”
- 나, 어딨는지 대충 감이 오니까.
“뭘요.”
- 뭐긴 뭐야. 내 반지지.
“아니, 선배님.”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아련한 표정을 짓던 천마는 저들이 찾는 ‘유물’이 자신의 것이라고 했었다.
“그거 진짜 선배님이 쓰던 거 맞아요? 솔직히 폭죽이 너무 눈부셔서 저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 내거 맞아. 절대 잊을 수가 없지···.
“만약에 선배님 말씀이 맞다고 해도, 그거 구무림 시절에나 끼던 거라면서요. 지금 어딨는지는 모르시잖아요. 여기 애들이 대를 이어가면서 여기저기 숨기는 위치를 바꿔 놨다고 하는데···.”
- 짐작이 가는 데가 있어.
확신에 찬 표정을 짓는 천마를 향해 되묻는 창규.
“확실해요? 아니, 대체 그게 무슨 반진데요? 대충 봐도 엄청 화려해 보이는 게 선배님 취향은 아닌 것 같던데.”
- 그게···.
문득 머뭇거리는 천마.
“뭡니까, 그거? 귀물이에요?”
- 그게···.
“아시잖아요. 지금 나가면 완전 튀어요. 대충 그게 어떤 물건인지 파악을 해 놔야 위험을 감수할지 말지 판단이라도 하죠.”
- 음···.
여태까지와 달리, 민망한 표정을 짓던 그의 입이 섣불리 떼어지지 않은 그때.
“아니, 대체 뭐길래 답답하게···.”
똑똑-!
순간, 숙소방문을 두드리는 누군가의 노크소리가 끝난 뒤.
“(김치워리어쨩.)”
빌딩숲으로 떨어진 줄 알았던, 오타쿠의 소름 돋는 말투가 들려왔다.
“(·········지금 그 옆에 함께 있는 분, 누굴까나?)”